다소 시끄러웠던 아침이 지나갔다. 나루는 든든해진 배를 두드리며 차에 올라탔다. 규연이 끓여 준 콩나물국 덕분에 속이 쓰리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은 한 시간 늦게 출근하는 날이었다. 규연이 직원들을 위해 배려해 준 거였다.
“뭐야, 언제 탔어.”
“빨리 와, 규연아.”
“너 내가 과자 들고 타지 말랬지.”
“부스러기 안 흘려.”
규연은 운전석 문을 열자마자 잔소리부터 늘어놓았다. 나루가 조수석에 앉아 과자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루는 뻔뻔스럽게 대답하며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져 차를 더럽혔다. 안 흘린다고 말한 게 고작 2초 전인데 말이다.
나루가 어색하게 웃자 규연이 포기했다는 듯 시동을 걸었다.
“오늘 너 먼저 들어가.”
“왜?”
“나 잠깐 재료 받아올 게 있어서.”
“으응, 그렇구나.”
이유가 재미없었다. 나루는 금세 흥미를 잃고 창밖을 바라봤다. 한 시간 여유롭게 출발했을 뿐인데, 거리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한산했다.
꽃집도 열려 있고, 늘 궁금하던 케이크 전문점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와, 한 시간이 이렇게 중요한 거였구나.
거리를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어느새 차가 카페 앞에 멈춰 섰다.
나루가 내리지 않고 있자, 규연이 어서 가라며 턱을 까딱였다.
“먼저 들어가라니까.”
“올 때 맛있는 거 사 와.”
“까분다.”
“사 와.”
저게 진짜.
규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찌 된 게 시간이 흐를수록 한마디를 안 진다.
나루는 가뿐하게 내려 창문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조수석 시트에 나루가 먹은 과자 부스러기가 정신없이 떨어져 있었다.
이 꼴을 해 놓고 해맑게 손을 흔드는 애인이라니.
결국, 지는 건 또 규연이었다. 조수석 창문을 조금 내린 그가 나루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기껏 인사를 받아쳐 줬건만, 나루는 본 체도 하지 않고 뒤돌아 갔다.
“송나루 저거…….”
뭐가 그리 신나는지 콩콩거리며 뛰어가는 뒷모습이 유독 발랄해 보였다. 규연은 나루가 무사히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딸랑.
가게 문을 연 나루가 캄캄한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오픈 전이라 불이 꺼져 있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건가.
의아해하던 중, 카운터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루 씨?”
“안녕하세요…….”
“와, 나루 씨. 상태 괜찮아요? 나 지금 진짜 죽을 거 같아요.”
고개를 든 사람은 서연이었다. 눈 밑이 퀭한 게 잠을 못 잔 사람처럼 피곤해 보였다.
모자를 더 푹 눌러 쓴 그녀가 윗배를 문질거렸다. 속이 안 좋은 건가. 자세히 보니 머리도 감지 못한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어우, 아니요. 나루 씨는 어떻게 괜찮은 거지…?”
“저는 아침에 콩나물국 먹었어요.”
“해장 제대로 했네요. 부럽다…….”
나는 혼자 살아서 그런 거 잘 안 끓여 먹거든요. 귀찮아서.
서연이 중얼거리듯 말을 덧붙였다. 나루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혼자 살면 요리를 못 해 먹나. 규연과 함께 살아서 다행이었다. 콩나물국도 공짜로 얻어먹고.
그나저나 새 직원인 건후가 보이지 않았다. 주방을 봐도 없고, 홀을 봐도 없고, 아직 출근하지 않은 걸까.
나루가 주변을 살펴보자 서연이 무언가를 눈치채고 바로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건후 씨는 아직 안 왔어요. 어제 많이 힘들었나 봐요. 출근 시간 딱 맞춰 오겠는데요?”
하긴, 어제 건후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멀쩡한 게 이상하지.
나루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앞치마 끈을 야무지게 묶었다. 다들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자기라도 열심히 일해야 했다.
서연은 입으로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할 일을 부지런히 이어갔다.
“아, 나루 씨는 이거 버리고 와 줄래요?”
“네!”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든 나루가 뒷문을 열었다. 쓰레기 버리는 거라면 자신 있었다. 이것만큼 쉬운 일이 또 있을까.
힘차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서연이 흐뭇하게 웃었다.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라니. 이전에 스쳐 지나갔던 직원들보다 나루가 다섯 배, 아니 열 배는 더 나았다.
덜컹!
문을 열고 나와 쓰레기를 쌓아 둔 나루가 손을 탁탁 털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일하니 기분이 좋았다.
‘……해서.’
‘……네가.’
다시 카페로 돌아가 서연의 일을 도우려는데, 어디선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루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둘 다 자신이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호기심이 또 발동했다. 나루는 조심스레 다가가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
바라본 곳에는 건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도건혁?
분명 건혁이었다. 이전에 나루를 끈질기게도 괴롭혀대던 뱀 같은 도건혁.
어째서 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나루는 저도 모르게 이를 드러냈다.
나루의 눈에는 건후가 건혁에게 괴롭힘당하는 걸로 보였다. 어쨌든 건후도 제 친구였다. 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저 인간이 왜 여기까지 와서 건후랑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나루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지금 당장 건후를 저 못된 인간에게서 떼어내야 했다.
“크흠, 큼, 여기서 뭐 해.”
“아, 너, 너 언제 여기까지 왔냐.”
벽에 세워 놓았던 빗자루를 무기 삼아 들고 간 나루가 어색하게 바닥을 쓸었다. 건후는 나루의 등장에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순간 나루와 건혁의 시선이 맞물렸다. 어딘가 싸한 눈과 맞대응하듯 굳은 표정. 나루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다.
“너 저 사람이랑 알아?”
“어? 그게, 저, 아니 일단 들어가 있어. 나 금방 출근하니까…….”
“내 뒤로 와.”
횡설수설하며 상황을 수습하려던 건후가 입을 꼭 다물었다. 나루와 건혁 사이에 도는 분위기가 영 쎄한 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나루는 건후의 팔을 붙잡아 끌며 제 작은 몸 뒤에 숨겨주었다. 키가 커서 숨겨도 숨겨지지 않았지만, 친구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건혁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아침부터 건후를 마주쳐서 기분이 더러웠는데, 나루까지 끼어드니 눈이 돌았다.
건혁이 건후를 곁눈질하며 압박을 줬다. 나루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설명하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건후는 제 형과 나루를 떨어뜨려 놓기 위해 애썼다.
“야, 얼른 들어가자. 어? 괜히 참견하지 말고.”
“다친 곳 없어? 저 사람 손버릇 나빠.”
“아니, 그게, 하…….”
들어가자며 나루의 팔을 이끌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선 나루가 절대 발을 떼지 않았다.
건혁도 마찬가지였다.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기 싸움을 이어갔다. 곤란한 건 건후뿐이었다.
언제 봐도 재수 없는 눈깔.
건혁을 빤히 응시하며 견제하던 나루가 고개를 휙 돌렸다. 상대해 봤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도건후랑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 응?”
“들어가자, 저런 사람 상대하는 거 아니랬어.”
비아냥거리는 건혁을 무시한 나루가 앞만 보고 걸었다. 쓸데없는 시비를 피하는 데에는 무시가 최고였다.
건후의 팔을 무작정 잡아끄니 묵직한 몸이 딸려왔다. 그는 건혁과 나루를 혼란스럽게 번갈아 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비한 톤이 귀를 뚫고 들어오는 게 불쾌할 정도였다.
“도건후, 정신 차리고 살아라.”
“…….”
“어디 저딴 거랑 어울리고 다녀.”
“형……!”
저딴 거. 건혁이 나루를 ‘저딴 거’라고 칭했다. 숨죽인 채 걸어가던 건후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매사에 껄렁거리던 건후가 건혁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소리를 지른다고 질렀지만,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답하지 마. 저거 개새끼야.”
“……!”
“가자.”
나루는 강압적인 태도에 굴복하지 않았다. 건혁이 자신을 ‘저딴 거’라고 칭했다면, 더 심한 말로 되돌려주면 그만이었다.
졸지에 개새끼가 되어 버린 건혁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화가 나서 피가 쏠린 모양새였다.
나루는 신경 쓰지 않고 건후의 팔을 이끌었다.
덜컥!
카페 안으로 들어온 나루가 문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혹시라도 건혁이 따라오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바깥이 고요했다. 아무래도 규연의 카페 근처라 얌전히 돌아간 듯했다.
나루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건후는 그런 나루를 멀뚱하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너, 저 사람 알아?”
“응, 알아. 나쁜 사람이야.”
“…….”
나쁜 사람이라. 명확한 대답에 건후가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의 형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건 많이 봐 왔다.
하지만 그 상대 중에 나루도 있었다니,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너는 어떻게 알아?”
“엉?”
“저 사람.”
“아, 그냥…….”
건후는 건혁이 제 형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나루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멋쩍게 목 언저리만 긁적거리니 더 이상 질문이 날아들지 않았다.
딸랑.
타이밍 좋게 카페 문이 열렸다. 나루는 입구를 한 번 쳐다보고 손을 흔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규연이었다. 그는 건후와 나루가 붙어있는 걸 발견하자마자 곧장 가까이 다가왔다.
“둘이 왜 여기 서 있어.”
“어, 규연아.”
“무슨 일 있어?”
“응, 그게 방금 내가, 우부븝!”
긴장한 채 규연의 눈치를 보던 건후가 황급히 나루의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두 시선이 건후에게 닿았다. 못마땅하다는 시선과 왜 막느냐는 앙칼진 시선이었다.
건후가 입을 막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선, 최근에 규연과 건혁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자신의 형이 잘못했을 게 뻔했다.
규연은 한 번 돌아선 사람에게 가차 없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루와 건혁이 마주쳤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앞일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건후는 규연의 화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요즘에는 나름 성질을 부리지 않고 참는 듯해 보였지만, 예전에는 답도 없는 망나니 수준이었다.
“으우부븝!”
“쓰레기 버리려는데 얘가 자꾸 방해해서, 누가 잘못했냐 안 했냐 투닥거렸어.”
건후가 능숙하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두 눈 가득 의심하던 규연은 이번만 넘어가 준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건후의 팔을 떼어냈다.
“흡, 하아, 하, 왜 막아!”
“자, 일하자, 일! 형, 아니, 사장님, 창문 좀 닦을까요?”
규연의 시선을 돌린 건후가 나루를 향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방금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해달라는 신호였다.
“사장님! 이거 재료 개수가 좀 모자란데요.”
마침 재료를 살피던 서연이 규연을 호출했다. 건후도 자연스레 그 뒤를 쫓아가려 했으나 발목이 붙잡혔다.
덥석.
“야, 잠시만. 네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알면 가지 마.”
얘 눈이 원래 이렇게 무서웠나.
나루에게 붙잡힌 건후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