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괴로웠다. 누군가가 드릴로 관자놀이를 깨부수는 느낌이었다.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며 일어난 나루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술 마신 다음 날에는 원래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걸까.
영롱하게 빛나던 초록색 소주병이 원망스러워졌다. 중간에 건후가 더 맛있는 술을 만들어 주겠다며 맥주라는 것까지 소주에 섞어 주었는데. 그게 문제였던 걸까?
어제의 회식을 떠올리던 나루가 배시시 웃었다. 머리는 아파도 직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건 즐거웠다.
웃고, 떠들고, 마시고, 먹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건 언제나 행복했다.
규연은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진 게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어제 술 취한 직원들을 챙겨 집에 보내고, 나루까지 안아 들고 왔으니 말이다.
나루는 이 사실을 몰랐다. 가게에서 나온 뒤의 기억이 뚝,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생각나는 건, 규연이 붕어빵을 사 주겠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배고파서 밖으로 나온 나루가 거실을 뒤적였다. 나루 전용 간식 상자를 뒤져 보았는데, 그 어디에도 붕어빵이 보이지 않았다.
“유규연 사기 쳤어.”
꼬르르륵.
사실 지금은 붕어빵이고 뭐고, 그냥 아무거나 입에 집어넣고 싶었다.
시리얼은 퍽퍽해서 싫고, 뭔가 국물을 먹고 싶은데…….
부엌을 아무리 뒤져도 먹을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나루는 냉장고를 열어 안을 살펴보았다.
“으음…….”
요리할 때 사용할 채소, 일정하게 쌓인 고기 팩들, 간간이 자리한 유제품들, 그리고 달걀들.
고민하던 나루는 날달걀 하나를 집었다.
퍽!
싱크대 위에 달걀을 내리치자 껍질이 잘게 깨졌다. 나루는 잽싸게 그릇 하나를 받쳐 노른자를 안전히 살렸다.
그리고는 접시에 바로 얼굴을 처박았다.
찹찹.
오랜만에 먹는 날달걀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살짝 비리면서도 고소한 게 최고였다.
규연은 어딘가 익숙한 소리에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나루의 엉뚱한 행동을 감지한 듯했다.
저 기괴한 찹찹 소리.
그래, 규연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접시에 코를 처박고 시리얼을 먹던 나루의 모습을.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규연은 이불을 확 걷어내고 뛰쳐나왔다.
“송나루, 안 돼!”
일단 상황을 마주하기 전에 안 된다는 말부터 내뱉고 봤다.
규연의 외침에 귀신같게도 찹찹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너 그게 무슨…….”
부엌 꼴이 말도 아니었다. 달걀 두어 개가 깨져서 껍질이 이리저리 떨어져 있었고, 나루는 또 접시에 코를 처박은 채 날달걀을 흡입하는 중이었다.
요즘에는 얌전하더니, 배고파서 이성을 잃은 듯했다.
“내 붕어빵 어디 있어?”
“…….”
“붕어빵 사 준다고 했으면서.”
와중에 붕어빵을 찾는 게 어이가 없었다. 술에 취해서 기억을 못 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것만 기가 막히게 기억해냈다.
규연은 부엌으로 들어와 어질러진 싱크대 위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나루가 사고 치는 걸 수습하느라 치우는 스킬이 늘어 있었다.
“이따 나가면서 사 줄게.”
“…….”
치우는 데 집중해서 말이 설렁설렁 나왔다. 나루는 얼굴도 바라보지 않고 말하는 규연을 은근슬쩍 노려봤다.
“너 지금 나 노려보지.”
“……!”
“다 보인다.”
규연의 예리한 지적에 나루가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다.
규연이는 눈이 뒤에도 달린 걸까.
진지하게 의심해 보던 나루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규연이 무신경하게 구니 괜히 관심을 받고 싶어졌다.
“나 아파.”
“뭐? 어디가 아픈데, 와 봐.”
아프다는 말에 행주를 내려놓은 규연이 나루의 팔을 끌어당겼다.
나루는 일부러 더 아픈 척 연기했다. 입꼬리가 축 늘어지고, 눈가가 금세 촉촉이 젖어 들었다.
“머리 아파.”
“너 내가 그렇게 퍼마실 때부터 알아봤다. 앉아 있어.”
“어어?”
규연이 나루의 어깨를 눌러 식탁 의자에 앉혔다. 얼떨결에 앉게 된 나루는 분주히 움직이는 규연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원래 더 걱정해야 하는데, 잔소리만 늘어놓고 끝내는 게 이상했다.
이게 아닌데…….
냉장고를 열어 콩나물을 꺼낸 규연이 능숙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나루에게 줄 해장국을 끓이는 거였다.
식탁에 엎드린 나루가 코를 킁킁거렸다. 시간이 지나니 담백하고 시원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잠시 후, 규연이 김이 폴폴 피어나는 국을 들고 돌아왔다. 밥과 간단한 반찬까지 올려놓으니 든든한 아침상이 완성됐다.
“이것부터 먹어.”
“이거 뭐야?”
“속도 쓰릴 거 아니야. 해장하면 좀 나아지니까 남기지 말고 먹어.”
숟가락을 든 나루가 콩나물국을 한 입 떠먹었다.
뜨끈하고 시원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간다. 나루는 발을 마구 흔들거렸다.
이게 해장이구나!
나루의 반응에 규연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한 입 떠먹더니 숟가락을 열심히 움직이는데, 정성껏 만들어 준 보람이 있었다.
그 앞에 앉아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규연은 문득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전 주인의 악몽을 꾸며 앓던 나루.
“너, 뭐 요즘 힘들거나 한 거 없지.”
“힘든 거? 없어.”
“…그럼 예전에는.”
“예전?”
조심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루가 볼을 긁적였다.
예전이라면 얼마나 예전을 말하는 걸까.
규연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나루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규연은 전 주인과 있었던 일을 듣고 싶어 했다. 어째서지.
전 주인과 있었던 일들은 모두 규연이 듣기에 적절치 않았다. 그의 상상 이상으로 심하게 학대당했기 때문이었다.
나루는 눈치 없는 척 질문을 흘리기로 했다.
“규연이 처음 만났을 땐 조금 힘들었는데, 이제는 안 그러잖아.”
나루는 규연과 처음 만났을 때를 이야기했다. 이 정도면 규연이 과거를 더 캐묻지 않을 것이다.
“그 예전 말고, 내가 뭐 물어보는 건지 알잖아.”
“그게, 왜 궁금한데?”
나루의 눈이 공격적으로 변했다. 자기방어를 하는 거였다.
나루는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알리기 싫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무서운 것보다는, 규연이 자세한 속사정을 알게 되는 게 수치스러웠다.
처참하고 더러워서, 규연이 떠나갈까 두려웠다.
“궁금한 것보다는 걱정이 돼서.”
“…….”
걱정. 규연이 진지한 톤으로 대답했다.
나루의 마음이 순간 휘청거렸다. 단순히 궁금한 게 아닌 걱정이라니.
과거를 밝히기는 싫은데, 규연이 이렇게 다정하게 굴 때마다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나 사실 그곳에서 죽고 싶었다고.
울컥 차오르는 말을 눌러 참은 나루가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 안 해도 돼. 나 괜찮아.”
“괜찮긴 무슨…….”
규연은 어젯밤 앓던 나루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정말 괜찮았다면 그런 잠꼬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들어찼다. 나루는 규연의 반응에 웃음을 싹 지워냈다.
정적이 몇 분 정도 이어졌다. 규연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결국, 나루가 먼저 정적을 깼다.
“힘들었어.”
“…….”
“말을 안 들으면 가둬. 지하실에 갇히면 밥도 못 먹고, 추워서 떨어야 해. 말을 잘 들어도 혼나. 상을 준다면서 나를 괴롭히거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규연은 몰래 주먹을 움켜쥐며 화를 참아냈다.
그러나 나루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표정 변화가 없어서 더 걱정스러웠다. 모든 걸 체념했다는 듯 구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지난번에 전 주인의 이야기를 얼핏 들었지만, 자세히 들어 보니 가관이었다.
규연은 제가 실수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이 정도일 거라고 예상치 못하고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시킨 것이다.
“이제 그만 말해도,”
규연이 나루의 말을 황급히 끊어 보려 했으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주인이 오면 무조건 나가서 반겨야 해. 그러지 않으면 머리채가 잡혀. 무릎 꿇고 있는 건 기본이야. 주인은 내가 무릎을 꿇고 있어야 예쁘대. 나는 아프기만 한데.”
저건 멀쩡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나루가 살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뒤늦게라도 이곳에 오게 된 게 천만다행일 수준이었다.
규연의 속이 호미질 당한 듯 푹푹 패였다. 나루가 저런 일을 당하고 살았다는 게 미친 듯이 속상했다.
이것보다 더 속상한 것은, 나루가 괴로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다.
안광이 사라져 체념한 눈빛이 산 시체 같기도 했다.
“지하실 밤은 무서워. 묶여 있으면 손이랑 발이 저리고, 가끔 주인이 약을 먹이면 아침까지 울어야 해. 죽고 싶어져.”
나루가 말한 건 극히 일부였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한 일들을 많이 당했다. 말 그대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일방적인 대화가 끊겼다. 이마를 짚고 있던 규연은 마른 세수를 하고 나루에게 사과를 건넸다.
“밀어붙여서 미안해. 일부러 널 괴롭게 하려고 물어본 건 아니었어.”
“…괜찮아. 나 이제 그 사람 안 무서워.”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나루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곤 남은 콩나물국을 접시째 들이켰다.
하는 행동이 태연했으나, 규연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저런 일을 당했는데 괜찮을 리 없다. 괜찮은 애가 그런 잠꼬대를…….
“혹시라도 그때가 생각나서 무서우면,”
“괜찮아!”
“…….”
“괜찮다니까!”
규연이 걱정해주는 건 좋았지만, 전 주인 문제가 엮이는 건 싫었다. 이런 걸로 걱정시키기 싫었다는 거다.
“그래도, 읍!”
규연이 말을 더 이어가려 하자 나루가 냅다 달려들어 입술을 맞췄다. 강제로 입을 막으려는 수작이었다.
쪽, 하고 떨어진 나루가 생글생글 웃었다. 작은 미소에 주변 공기가 환해졌다.
규연의 표정이 멍해졌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아니, 송나루, 읍!”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입술이 부딪혀왔다. 막무가내로 입을 맞춰서 이가 부딪혀 따끔거렸다.
더 말하기 싫어하니까 그냥 넘어가야겠지.
규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루가 이런 걱정을 원하지 않는데 굳이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손을 뻗어 나루의 입가를 닦아 주던 규연이 스쳐 지나가듯 물었다.
“지금은 어때.”
“응?”
“나랑 사는 거.”
왠지 모를 긴장감이 들었다. 나루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 행복할까.
알 수 없는 눈으로 규연을 바라보던 나루가 순수하게 웃었다.
“행복해!”
나루는 제 진심을 서슴없이 내비쳤다. 규연은 마음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 글자만으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거구나.
나루가 진심으로 행복하게 지내 줘서 다행이었다. 규연은 다짐했다.
이제 겨우 행복해진 나루의 삶을 어떻게든 지켜 주겠다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