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루, 너 그거……!”
“술 버렸지. 유규연, 버렸지!”
바닥에 엎어진 규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잠깐이었지만,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목 위로 서늘한 무언가가 닿았다. 규연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기겁했다. 목에 닿은 건 다름 아닌 쇠젓가락이었다.
나루의 팔을 밀어낸 규연이 한숨을 쉬었다. 나루는 여전히 술을 버렸다며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중이었다.
미성의 목소리는 원체 곱고 얌전해서, 소리를 질러도 지르는 것 같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웬 새끼 강아지가 왕왕대는 느낌이었다.
“일어나, 집 가게.”
“술 버렸어, 유규연.”
“이렇게 멀쩡히 취할 줄이야…….”
“나 안 취했어, 유규연.”
“…….”
“유규연. 안 취했어. 나.”
얼씨구? 웃기고 있다.
나루가 취하지 않았다며 고집을 부렸다. 얼굴은 평소 그대로였으나, 말투와 목소리가 영 정상적이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규연이 나루의 몸을 지탱하듯 안아 올렸다. 그러자 가느다란 다리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부들거렸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세워 보니 확실히 취한 것 같았다.
정말 얼굴만 괜찮은 거였구나.
“다들 일어나 봐, 가야 할 거 아니야.”
“아, 사장 새끼야!”
“…이런, 씨.”
서연을 깨우려던 규연은 하마터면 쌍욕을 내뱉을 뻔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직원들부터 챙기려고 했더니, 모두 협조해 주지 않았다.
규연의 옆에 잘 붙어 있던 나루는 어느새 건후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동그란 머리통이 정확히 건후의 왼쪽 어깨에 살포시 닿았다.
“송나루!”
“으움…….”
“나루야.”
“응?”
한 손으로 서연을 흔들어 깨우던 규연이 나루의 이름을 불렀다. 직원들 챙기랴, 애인 단속하랴,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다.
이름 석 자에 반응하지 않던 나루는 다정한 목소리에 곧장 고개를 들어 규연을 쳐다봤다.
규연은 건후에게서 떨어지라는 듯 짧게 턱짓했다. 확 찌푸려진 인상 때문에 얼굴이 더 까칠해 보였다.
“좀 일어나 봐.”
“나루를 괴롭히지 마! 사장 개새끼!”
“…….”
“우리 나루 씨이, 뽀둥뽀둥 귀여운데! 개싸가지 사장 새끼가 홀라당 데려가서는! 개새끼!”
다 쓸어 버리고 싶다.
규연은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며 서연의 막말을 참아 줬다. 와중에 사귀고 있다는 걸 용케 알아챈 그녀가 대단했다.
“네에?”
“쟨 왜 갑자기 대답이야 또.”
“개새끼 부르셨어요?”
“…얌전히 앉아 있어.”
“네에.”
서연의 외침에 대뜸 나루가 대답했다. ‘개새끼’라는 말에 반응한 듯했다.
규연은 나루를 얌전히 앉혀 둔 후, 직원들을 한 명씩 챙겼다. 정신을 깨워 놓으니 다들 좀비처럼 걸어가 택시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건후와 서연이었다.
규연은 서연을 먼저 챙겼다. 팔을 일으키려 하니 난동을 부려대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결국, 힘으로 서연을 안아 든 그가 무슨 짐짝 옮기듯 움직였다. 끝으로는 택시에 몸을 구겨 넣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회식은 늘 피곤했다. 이래서 카드만 주고 가는 건데, 오늘은 나루도 함께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는 게 안타까웠다.
문득 담배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규연에게는 담배를 태울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드륵.
“송나루 저걸 그냥.”
이럴 줄 알았다. 다시 가게 안으로 돌아왔더니, 나루가 건후의 등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정식적으로 연인 사이가 된 지 이제 이틀이었다. 한참 둘이서 좋아 죽을 시기인데, 현실은 처참했다.
“야, 안 떨어져?”
“나 건드리지 마.”
“너나 쟤 건드리지 말고 일어서.”
“싫어.”
규연의 말썽꾸러기 애인은 말을 들어 먹질 않았다. 원래도 말을 잘 안 듣는 편인데, 술을 먹여 놓으니 더 심했다.
이번에도 힘을 쓰는 수밖에 없나.
규연이 나루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안기기 싫었는지 바르작대는 게 느껴졌지만, 강제로 몸을 들어 올렸다.
“하지 마, 들지 마!”
“집에 가야 할 거 아니야.”
“안 가.”
“…가는 길에 붕어빵 사 줄 건데도?”
“…….”
붕어빵. 규연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나루는 얕은 수법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여기서 왜 붕어빵이 비장이 무기냐 하면, 규연이 평소에 잘 사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규연은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절대 사 먹지 않았다. 그래서 나루도 덩달아 먹을 수 없었다.
“팥 붕어빵이야?”
“몰라, 뭐든 들었겠지.”
“팥이야?”
“잠시만, 도건후까지 보내 놓고,”
“팥 붕어빵 먹을 수 있어?”
차에 나루를 내려놓은 규연이 문까지 완벽히 걸어 잠갔다. 건후를 보내고 대리 기사를 부르는 사이, 나루가 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루는 팥 붕어빵을 먹을 수 있는 거냐며 끈질기게 집착했다. 저 정도면 광기였다.
뒤돌아서 다시 가게로 들어가려는데, 깨어난 건후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택시 잡아 줄 테니까 기다려.”
“혀엉, 고마워. 나 형 아니었으면 돈도 못 벌 뻔했다. 형은 알잖아, 우리 형 성격…….”
술주정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건후는 얌전한 편이었다. 서연에 비하면 양반 수준이었다.
대신, 푸념이 끊이질 않았다. 주로 형인 도건혁의 욕이 절반이었다. 규연은 대충 이야기를 들어 주며 택시를 잡았다.
“형, 형은 행복해, 저거, 쟤, 송나루랑 좋아 보이더라…….”
“들어가라.”
문이 닫히자마자 택시가 출발했다. 새벽이라 차가 없어서 그런지 제법 속도를 낸다.
규연은 뒤늦게서야 제 차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움직였더니 기가 다 빨리는 기분이었다.
뒷좌석 문을 연 그가 나루의 옆에 앉았다. 대리 기사가 올 때까지 쉴 모양이었다.
붕어빵을 기대하던 나루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오늘따라 새근거리는 소리가 컸다.
“신기하게도 자네.”
규연이 나루의 머리를 제 쪽으로 살포시 밀었다. 잠시 휘청이던 머리는 넓은 어깨에 무사히 안착했다.
편안한 고요함 속에서 쉬던 중,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규연이 부른 대리 기사였다.
차 키를 넘겨준 그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여태 피곤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차 안의 분위기가 포근해졌다. 특히, 엇박자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숨소리가 귀여웠다.
캄캄한 도심 속을 달려 집까지 도착한 차가 멈춰 섰다. 규연은 차가 멈추자마자 귀신같이 눈을 떴다.
대리 기사에게 돈을 건네준 그가 잠든 나루를 품에 안아 들었다. 차마 받치지 못한 팔이 허공에 달랑거렸다.
나루가 깨지 않도록 자세를 고쳐 안은 규연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삐비빅, 덜컥.
드디어 집이었다. 규연은 잠든 나루를 제 침대 위에 내려놓은 후, 간단히 씻고 나왔다.
시간이 얼마 안 걸린 거 같은데, 잠깐 사이 30분이 지나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무방비하게 잠든 나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옷을 갈아입히지 않아서 불편해 보였다.
옷만 갈아입힐까.
편한 옷을 가지고 돌아온 규연이 나루의 몸을 살며시 뒤집었다. 엎드려 자고 있어서 옷을 벗기기 힘들었다.
“으…….”
“…….”
순간, 앓는 소리에 놀라 하던 행동을 멈췄다. 규연은 잽싸게 상의를 벗기고 제가 가져온 옷을 입혀 놓았다.
자그마한 흰색 강아지 로고가 박힌 티셔츠가 나루와 잘 어울렸다.
바지까지 갈아입히려던 그는 포기하고 나루의 옆자리에 몸을 뉘었다. 여기서 바지까지 갈아입혔다가는 나루가 깰 것 같아서였다.
핸드폰 불빛이 어둠 속을 뚫고 반짝였다. 현재 시각은 새벽 세 시. 지금 자도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규연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술을 무리하게 마셔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일 머리 꽤 아프겠네, 하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규연은 하는 수 없이 깨어 있어야만 했다.
“사, 살려, 으으, 죄송, 잘못했어요.”
“……?”
“흐으, 아파요, 때리지 마세요…….”
적당히 눈을 감고 있다가 잘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나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괴롭힘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지, 말투에 두려운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살려달라느니, 때리지 말라느니, 심지어는 잘못했다고 빌기까지 한다.
눈을 번쩍 뜬 규연이 나루의 상태를 살폈다. 차에서만 해도 잘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괴로워했다.
“송나루,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자자.”
“으, 두고 가지 마, 제가, 잘못했어요.”
규연이 황급히 몸을 흔들어 깨워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꿈속까지 깊게 빠져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루는 계속해서 우는 소리를 내며 빌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루를 쳐다보던 규연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설마, 아니겠지.
나루에게 전 주인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규연은 제발 그 인간의 꿈이 아니길 바랐다.
“자, 잘못, 주인님, 벌 받기 싫어…….”
“…….”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불쾌했다.
규연은 끙끙거리는 나루를 조심스레 안아 주었다. 과거 모습을 훔쳐본 기분이라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그 인간 밑에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길래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는 걸까.
규연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고작 꿈인데도 지나치게 고통스러워하는 나루가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나루의 뒤통수를 끌어 더 단단히 안아 준 규연이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차분한 토닥임에 앓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규연은 어떻게든 그 전 주인이라는 놈을 찾아내 찢어 죽이고 싶었다.
애를 얼마나 심하게 학대했으면…….
나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겨 주던 그가 이마에 짧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규연의 얼굴 속에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나루가 보았다면 대신 속상해할 만한 표정이었다.
송나루는 제가 아무리 힘들어도 남의 감정부터 신경 쓰는 애인데.
학대당하던 순간에도 자신보다 그 인간의 감정을 더 이해하려 들었을까.
나루라면 그랬을 게 분명했다. 밝고 엉뚱하게 행동해도 천성이 착하고 여리니까.
여러 상황을 유추해 보던 규연은 눈을 지긋하게 감았다. 저 작은 몸으로 괴롭힘을 받아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그만 생각하자.
나루를 힘껏 껴안은 그가 포근한 향을 맡았다. 나루 특유의 체취였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일정하게 내뱉어지며 교차했다. 규연은 자그마한 숨소리에 집중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속상하고, 가슴 아픈 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