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30)


“나 원래 귀엽다는 소리 많이 들어.”

나루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뭐, 사실이긴 했다. 시골 똥강아지 시절에 귀엽다는 말을 쉴 새 없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최근에는 규연에게도 많이 들었다.

지하실에 갇혀 지냈을 땐 그저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당당해졌다.

저기선 하지 말라고 해야지. 송나루 저거 일부러 저러네.

규연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직원들은 다 웃고 있는데 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게 꼰대 같았다.

나루는 규연을 놀리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유규연, 더 질투해! 더!

일부러 규연을 부추기던 중, 미닫이문이 열렸다. 직원이 주문한 한우를 들고 온 모양이었다.

식탁 위로 먹음직스러운 밑반찬과 빛깔 좋은 한우가 놓였다. 나루는 생으로 집어 먹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냈다.

한우의 등장으로 나루와 규연의 미묘한 기 싸움이 마무리되었다.

“제가 구울게요. 원래 이런 건 신입이 하는 거 알죠.”

“편하게 드시지, 저 고기 잘 굽는데.”

“저 굽기 신이에요.”

서연에게서 집게를 빼앗은 건후가 능숙하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소고기라 그런지 겉이 금세 익었다.

직원들이 하나둘씩 젓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건후는 잘 구워진 한우를 나루의 앞접시에 툭, 놓아 주었다.

동시에 또 다른 한우가 나루의 접시에 놓였다. 규연이 챙겨 준 것이었다.

와, 고기 천국.

“얘는 내가 줄 테니까 너 많이 먹어.”

“아, 그래? 영 못 주워 먹길래.”

질투심을 숨긴 규연이 애써 친절한 척 연기를 했다. 속뜻은 겉과 전혀 달랐다.

송나루 건드리지 말고, 너나 많이 처먹어라.

차마 이 말을 내뱉을 수가 없어 답답했다.

“고기가 녹아…….”

“맛있냐.”

“평생 먹고 싶어…….”

입을 오물거리던 나루가 눈을 빛냈다. 똑같은 고기 맛일 줄 알았는데,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게 최고였다.

아이 같은 반응에 살풋 웃음 짓던 규연이 고기 몇 점을 더 덜어 주었다.

본인의 앞접시는 텅 비워두고 나루의 접시에 고기를 산처럼 쌓아두는 게 사랑꾼 같았다.

“진짜 맛있다.”

“하, 참…….”

“규연이보다 좋아.”

고기를 덜어 주던 손이 멈칫했다. 하다 하다 이제는 한우한테까지 밀린다. 유치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억울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그가 나루의 얼굴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게 보여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많이 먹어라…….”

앞으로 많이 데리고 다녀야지, 안 되겠네.

자존심이 상하니 마니 할 땐 언제고, 팔불출처럼 나루를 부둥거렸다.

나루는 그 자리에 꼭 붙어 앉아 끊임없이 먹었다. 규연이 고기를 덜어 주는 족족 앞접시가 텅 빌 정도였다.

배를 가득 채우고 나니 몸이 나른해졌다. 다른 직원들과 시끄럽게 떠들던 서연은 어서 2차를 가자며 분위기를 띄웠다.

“나루 씨, 이제부터가 시작이에요. 알죠?”

“네, 네……!”

드디어 술 마실 시간이 다가왔다. 한우 맛에 취해 있던 나루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사실 남들이 술 마시는 건 원 없이 보았다. 예전에도 규연을 따라 클럽에 갔을 때 본 적이 있었다.

독한 냄새가 나던데, 괜찮을까.

다 같이 도착한 이자카야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더 근사했다. 너무 어두컴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게 오묘했다.

“앉아요, 앉아요.”

“아주 신났지.”

“어휴, 진짜 신나죠!”

규연이 서연을 반쯤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장난스러운 눈빛에 발랄하게 대답한 서연이 곧장 직원을 호출했다.

회식이라고 비싼 걸 마음대로 주문했더니 주변 직원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런 간 큰 짓은 오직 서연만이 할 수 있었다. 제일 선배였으니 말이다. 정작 규연은 뭘 시키든 상관하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다 보니 주문한 술이 먼저 나왔다. 기껏 이자카야까지 와서 시킨 건 한국식 소주였다.

“나루 씨는 술 처음이니까 이걸로 시작하라고 시켜 봤어요!”

“와아…….”

세세한 배려가 따듯했다. 나루는 초록빛 병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테이블 위로 온갖 요리가 올라왔다. 사시미는 기본이었고, 탕이나 튀김류까지 먹을 게 많았다.

튀김 하나를 주워 먹던 나루는 앞에 놓인 잔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자, 받아요!”

현란한 솜씨로 병뚜껑을 딴 서연이 나루의 잔에 소주를 조금 부어 주었다. 규연이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 따라 주는 손이 덜덜 떨렸다.

술이다! 술!

킁킁. 습관처럼 냄새를 맡아 보던 나루가 미간을 좁혔다. 확 올라오는 알코올 향이 영 별로였다.

“건배합시다, 건배!”

서연이 잔을 들어 올리자, 다들 따라서 손을 올렸다. 눈치를 보던 나루는 어정쩡하게 건배를 외쳤다.

“거, 건배.”

쨍, 소리가 경쾌했다. 나루는 술을 들이켜기 전, 규연을 슬쩍 바라보았다.

오, 규연이도 마시네.

잔을 기울인 규연이 쓴 액체를 목구멍 너머로 잘도 넘겼다. 나루는 눈을 질끈 감고 술을 털어 넣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루에게 닿았다.

“못 마시겠으면 뱉어.”

꼬올깍.

규연이 뱉으라며 손을 내밀었지만, 나루는 액체를 부드럽게 삼켰다. 그리고 정적이 돌았다.

…….

눈동자를 굴리며 술맛을 느껴 보던 나루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와, 우와, 헐.

“캬아…….”

“……?”

“맛있어.”

나루의 말에 직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먹인 건가, 걱정했는데 오히려 정반대로 맛있다니.

처음 먹어 보는 애가 술을 맛있다고 느낄 수 있는 건가.

규연이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나루의 잔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 부어졌다.

“야, 취하니까 그만 줘.”

“어머머, 나루 씨 잘 마신다!”

서연의 행동을 말린 게 무색해졌다. 나루는 잔이 그득 차자마자 손목을 꺾었다. 액체가 또다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시원하면서도 화한 느낌.

잔을 내려놓은 나루가 몰래 발을 동동거렸다.

이건 신세계다! 신세계야!

“송나루, 천천히 좀,”

“더 주세요!”

얘 왜 이래, 진짜.

규연이 이마를 짚었다. 이 상태라면 속도 조절 없이 그냥 쭉쭉 마실 텐데, 혹시라도 나루가 금방 취할까 봐 걱정됐다.

천천히 마시라며 손을 붙잡았더니, 곧바로 팔을 비틀어 빼낸다.

어쭈.

규연이 다시 나루의 팔을 붙잡았다. 살면서 애인 단속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데, 새로운 경험이었다.

“놔.”

나루가 단호히 말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표정이었다.

‘씨…발, 놔.’

그래, 처음으로 쌍욕을 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규연은 나루의 팔을 순순히 놓지 않았다. 술 먹고 고생하는 모습을 볼 바에야, 차라리 한 번 욕 먹는 게 나았다.

“너 내가 따라 주는 것만 마셔.”

“안 줄 거잖아.”

“그렇게 하라면 해.”

“너나 해.”

가면 갈수록 맞받아치는 스킬이 늘었다. 너나 하라니. 어이가 없어서 뇌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규연은 괜한 서연을 원망했다. 애초부터 회식을 미뤘더라면 괜찮았을까.

규연이 방심한 사이, 잔을 채운 나루가 또 원샷을 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손목을 꺾는 게 우스웠다.

“푸핫, 야, 너 좀 마시네.”

“잘 마시면 좋아?”

“뭐, 나쁜 건 없지.”

나루를 보며 폭소하던 건후가 자연스레 술병을 들었다. 그러자 규연이 나루의 술잔 입구를 손으로 턱, 막아 버렸다.

다행히 다른 직원들은 이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저들끼리 떠들며 마시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형, 쟤 아직 멀쩡한데 왜 그래.”

“취하는 건 한순간이야.”

“얼굴색도 그대로인데?”

건후가 나루의 얼굴을 가리켰다. 뽀얗고 흰 피부는 1차에서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유난을 떨며 건후를 말리던 규연이 한숨을 삼켰다. 그의 말대로 취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루의 얼굴색이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뭐지.

규연이 조용해진 틈을 타 술잔을 채워 준 건후가 어서 마시라며 손짓했다. 나루는 배시시, 웃고는 액체를 한꺼번에 삼켰다.

“송나루, 어지러우면 말해.”

“안 어지러워.”

“속은 어때.”

“괜찮다니까.”

되게 귀찮게 구네.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나루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규연을 쳐다봤다.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넌 상관하지 말라는 눈이었다.

그 뒤로 나루는 직원들이 따라 주는 술을 거절하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다섯 잔이 되고…….

규연은 일부러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나루가 취하면 잘 챙겨서 집까지 데리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에 쌓인 술병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규연이 시선을 돌렸다.

옆에는 멀쩡히 튀김을 주워 먹고 있는 나루가 있었다.

쟤, 뭐야……?

술에 취한 직원들은 몸을 휘청거리거나, 헛소리하기 바빴다. 술이 센 건후마저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이건 취한 거야, 안 취한 거야.”

“응?”

“송나루, 나 좀 봐봐.”

“왜?”

규연이 나루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간혹 조용히 취하는 사람도 있던데, 나루가 그런 부류 같았다. 아마도.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안 취할 리가 없어.

규연의 걱정과 달리 나루는 멀쩡했다. 그냥 기분만 조금 좋아 보일 뿐,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너도 마셔, 이제 나랑 건배할 사람 없어.”

“……어.”

빈 잔을 건네준 나루가 술을 따랐다. 방금까지 자신을 상대해 주던 서연이 뻗어 버려서 함께 마실 사람이 없었다.

얼떨결에 잔을 받아 든 규연이 쓴 액체를 삼켜냈다. 의심스러운 눈동자가 나루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술잔이 비면, 또 채워지고. 또 비우면, 다시 채워지고…….

규연은 쉴 틈 없이 술을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마다 나루가 눈치를 줘서 반강제로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술을 못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잘 마시는 편에 속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건…….

지옥 같았다.

“잠시만, 송나루, 잠깐.”

“마셔.”

“너 이러다 죽어.”

“마셔.”

규연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서 회식 자리를 끝내고픈 마음인데, 나루가 그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술잔을 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동시에 규연의 눈동자도 떨렸다.

“규연아, 빨리 마셔.”

“…….”

“짠.”

입으로 깜찍한 소리를 내며 건배한 나루가 망설임 없이 술잔을 꺾었다.

……미치겠다.

규연은 나루 몰래 잔에 담긴 액체를 따라 버렸다. 연속으로 술만 들이켜니 속이 울렁거려 죽고 싶었다.

쾅!

잔을 세게 내려놓은 나루가 규연의 앞접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둘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규연은 나루의 맑은 눈이 진심으로 두려웠다.

“…왜 그렇게 쳐다봐.”

“너어.”

쿠당탕!

큰 소음과 함께 규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나루의 기습 공격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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