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30)


“왐마야…….”

“어휴, 고개 돌려.”

지켜보던 파티시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서로 민망한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나루는 부딪힌 코를 쓸어 만지며 규연을 밀어냈다. 언제 붙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람들 앞에서 이러고 있자니 부끄러웠다.

민망한 건 규연도 마찬가지였다. 어색해진 공기는 서연이 나타난 뒤에야 깨질 수 있었다.

“나루 씨, 우리 같이 이거 정리해요.”

“어, 네, 네!”

그녀가 규연의 가게에서 어떻게 오래 일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상황 대처하는 센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루는 호다닥, 자리를 옮겨 냅킨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규연의 눈빛이 이제야 잠잠해졌다.

건후는 서연이 부탁한 다른 일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규연의 기분을 파악한 그녀가 일부러 건후를 멀리 떨어뜨려 놓은 것이었다.

“아, 사장님. 새 직원 왔는데 회식 안 하나요?”

“…….”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연이 손으로 소주잔을 기울이는 척했다. 밝은 목소리 뒤에 그녀만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사장님 돈 왕창 뜯어 먹어야지.

서연은 회식 날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평소에 못 먹던 비싼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규연은 넘치는 게 돈이었다. YK 막내아들인데 돈이 없을 리가.

게다가 성격은 까칠해도 통이 커서 사 주는 건 잘했다. 입맛까지 까다로워서 회식 때마다 규연이 고르는 식당은 모두 서연의 마음에 완벽하게 들었다.

회식이라는 말에 나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회식은 TV 드라마에서나 보던 건데, 직접 경험해볼 수 있다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오늘 일 끝나고 가든가.”

“와, 비싼 거 사 주세요!”

“메뉴만 대충 골라 놔.”

규연이 흔쾌히 수락했다. 메뉴를 고르는 건 직원들의 몫이었다. 서연은 곧장 주방에 회식 소식을 알렸다.

“오늘 회식이래요!”

“아, 뭐 먹지. 벌써 고민되네.”

반죽을 짜던 파티시에 정수가 입맛을 다셨다. 오래간만의 회식에 다들 들뜬 모양이었다.

나루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TV에서 봤을 땐 다들 회식을 꺼려하는 거 같았는데, 실제는 다른 듯했다.

주방에 고개를 내밀어 수다를 떨던 서연이 건후를 향해 손짓했다.

“건후 씨가 정하면 되겠네요. 뭐 먹고 싶어요?”

“저는 그냥 고기면 돼요. 1차는 고기 어떠세요. 사장님이 사는 거니까 소 먹을래요.”

건후가 넉살 좋게 대답했다. 그렇게 1차는 소고기로 결정됐다. 서연은 멀뚱히 서 있는 나루를 살뜰히 챙겼다.

“나루 씨는요? 나루 씨도 새 직원인데 아직 회식 못 했잖아요.”

“어, 으음…….”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나루가 열심히 고민하는 척했다. 세상에는 맛있는 게 너무 많았고,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건 힘들었다.

심지어 나루는 회식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회식을 하면 주로 어떤 음식을 먹는지 몰랐다.

나루가 뜸을 들이자 기다려주던 서연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나루 씨, 술 마실 줄 알아요?”

“술이요……?”

술. 아, 그래. 이건 TV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회식에서는 주로 술을 마신다. 높은 사람이 술을 따라 주면, 주인공은 눈치를 보며 억지로 쓴 소주를 원샷하곤 했다.

나도 그래야 하는 건가. 그런데 술이 그렇게 쓴 걸까.

멋쩍게 웃던 나루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애초에 나루는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보니, 못 해 본 것투성이었다. 규연과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 세상에는 신기한 것들이 수두룩했다.

“저, 술 안 마셔봤는데…….”

“어머,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술을 안 마셔 봤어요?”

“네에.”

서연의 눈이 번뜩였다. 그 모습이 꼭 먹이를 포착한 하이에나 같았다.

성인 남성이 술을 한 번도 마셔 보지 않았다니. 서연은 감격했다.

2차는 무조건 술집으로 가야 한다. 서연은 나루의 술주정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저렇게 귀여운 사람이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될까. 애교를 부리려나?

벌써 입꼬리가 승천했다. 서연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지도 앱을 켰다. 말끔한 지도 위로 그녀가 찍어 놓은 맛집들이 우르르 표시됐다.

어느새 나루가 다가와 화면을 훔쳐봤다. 그러자 서연이 핸드폰을 가까이 밀어주며 의견을 물었다.

“여긴 어때요? 저번에 친구랑 가 봤는데 비싸긴 해도 안주가 꽤 괜찮았거든요.”

노란 조명에 연분홍색 벚꽃이 은은히 비치는 술집이었다. 저런 벚꽃이 가게 안에 한가득 들어차 있는 게 신기했다.

나루는 사진을 빤히 쳐다보며 신기하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가고 싶어 하는 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여기 갈래요?”

“네, 여기 좋아요!”

나루가 대답하자마자 서연이 규연에게 달려갔다. 회식 장소를 일러주기 위함이었다.

“사장님, 1차는 소고기 먹어요. 2차는 제가 장소 알아봤는데, 여기 어때요? 나루 씨는 좋다고 했어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규연이 마지막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나루가 좋다고 했다니. 서연이 제안한 2차 장소는 이자카야였다.

술을 마실 줄도 모르는 게 이자카야는 무슨.

규연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서연이 나서서 그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딱 봐도 제 애인이 술을 마신다고 하니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팔불출도 아니고. 은근 극성이었다.

“송나루가 여길 좋다고 했다고?”

“네, 역시 회식은 술이죠.”

“…….”

규연의 시선이 나루에게 닿았다. 술을 마시게 해도 되는 걸까. 강아지 귀를 달고 애교부리던 나루의 모습이 떠올라서 쉽게 허락하기 어려웠다.

“사장님, 여기 가요. 나루 씨가 사진 보면서 가고 싶어 하더라구요.”

“…뭐, 그래.”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나루는 술을 마신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렸다.

우와, 술이다. 나도 규연이가 눈치 주면 다 마셔야겠지.

* * * 

카페 데스티니의 문이 평소보다 조금 일찍 닫혔다. 

회식을 위해 마감 시간을 당겨, 한 시간 빠르게 영업을 끝낸 직원들은 저들끼리 잡담을 나누며 회식 장소를 향해 걸었다. 소고기는 어느 부위가 제일 맛있고, 뭘 곁들여 먹어야 좋은지 열변을 토하느라 시끌벅적했다.

나루는 건후와 규연 사이에 끼어 직원들의 뒤를 따랐다. 걸어가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 가벼웠다.

“야, 술 잘 마셔?”

“아니, 안 마셔봤는데.”

“여태 술도 안 마시고 뭐 했어. 안 되겠다, 내가 오늘 제대로 알려준다.”

놀리는 듯한 말투로 얘기하던 건후가 나루의 등을 툭툭, 쳐 줬다.

서연도 그렇고, 건후도 그렇고, 나루에게 술을 알려준다며 들뜬 상태였다.

나루는 이런 관심이 좋았다. 같이 일하는 직원이지만, 친구처럼 대해 주니 편하기도 했다.

1차는 규연이 자주 가는 식당으로 향했다. 한우만 취급하는 식당이었는데, 외형부터 웅장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직원들은 계 탔다며 규연의 뒤를 졸졸 쫓아 들어왔다.

나루는 주변 풍경에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내부가 온통 목조로 되어 있었는데, 은은한 조명 빛이 더해지니 고풍스러운 느낌이 났다.

“뭐 해, 들어와.”

“와아…….”

직원이 방을 안내해 줬다. 문을 여니 한옥처럼 꾸며진 내부가 보였다.

나루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고깃집을 꽤 많이 봤는데, 이런 곳은 또 처음이었다.

규연이 고개를 까딱이자 나루가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사장님, 저 무조건 비싼 거요.”

“알아서 먹고 싶은 거 시켜.”

“아싸, 건후 씨 뭐 먹을래요.”

서연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메뉴판을 뒤적였다. 직원들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주문할 고기를 결정했다.

시원스러운 태도로 메뉴를 결정한 건후가 살갑게 물을 따라 건넸다. 확실히 사회생활을 해본 티가 났다.

“나루 씨, 건후 씨, 우리 앞으로 잘해 봐요! 저는 진짜 행복한 거 있죠. 사장님이 매번 잘생기신 분들만 새 직원으로 뽑아서, 흐흥…….”

서연이 회식 분위기를 자연스레 이끌었다. 주접 섞인 말을 내뱉으니 규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 보지 말고 일을 해, 일을.”

“아니, 그런데 건후 씨는 사장님 지인이신 거예요?”

“친한 동생.”

잘생긴 사람은 비슷한 부류랑만 어울리는 건가? 와, 사장님 클라스.

서연이 주책을 떨며 작게 소리 질렀다. 손으로는 옆에 앉은 나루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내리치는 중이었다.

규연의 시선이 그 손끝에 닿았다. 매서운 눈빛을 쏘아대니 서연이 잽싸게 손을 거두었다.

“건후 씨, 좋은 친구분 계시면 나중에 저 좀 소개 주세요.”

서연이 능글맞게 말했다. 건후와 친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더 말을 붙인 거였다.

“좋은 친구분이면, 잘생긴 사람이요?”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네요.”

“안타깝게도 제가 제일 잘생겨서요. 그렇지, 송나루? 나 잘생겼지 않냐.”

장난스럽게 웃던 건후가 나루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배가 고파 젓가락을 물고 있던 나루가 건후의 팔을 짜증스럽게 쳐냈다.

“규, 사장님이 더 잘생겼어.”

“취향 확실하다? 나도 한 미모 하는데.”

“어쩌라고.”

규연의 이름을 말하려다 말고, ‘사장님’으로 호칭을 고친 나루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매정한 목소리에 규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럴 때를 보면 그 누구보다 단순한 성격인 것 같았다.

나루는 빈말이라는 걸 못 했다. 건후도 잘생기긴 했지만, 규연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규연은 냉하게 생겼어도 심하게 싸가지 없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품위가 넘치는 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반면, 건후는 규연보다 더 가벼운 느낌이었다. 불량하던 첫인상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두 분이 다른 느낌으로 잘생기긴 했죠. 건후 씨는 나루 씨 어때요? 저 나루 씨 볼 때마다 귀여워 미치겠어요!”

서연의 주접에 작은 불씨가 크게 번져갔다.

“하찮아서 은근 귀여워요. 말랑하게 생겨서 난폭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건후가 나루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 말랑하다는 말에 걸맞게 나루의 흰 볼이 찹쌀떡처럼 늘어났다.

잡아당기는 손짓에 거침이 없었다. 부드럽게 대해 주는 규연과 딴판이었다.

간질거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친구를 대하는 태도. 딱 이 정도였다.

나루에게는 이렇게 느껴졌지만, 과연 규연도 그럴까.

슬쩍 고개를 돌려 보던 나루가 흠칫, 몸을 움찔거렸다.

젓가락을 꽉 쥔 규연이 손을 떨고 있었다. 게다가 눈은 누구 하나 죽일 듯 날카롭게 뜨여 있었다.

오오……. 유규연 질투한다.

나루의 한쪽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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