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건혁, 그리고 도건후. 둘은 형제였다. 배다른 형제.
형인 건혁은 계약 결혼 관계에서 태어났고, 건후는 불륜 관계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같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으나, 두 사람의 대우는 확연히 달랐다.
한쪽은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탄탄대로를 밟았고, 한쪽은 가문에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숨어 살아야만 했다. 물론 건후는 후자에 속했다.
한때 건혁과 어울려 다니던 규연은 그의 동생인 건후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건후를 처음 봤을 땐, 첩 자식이라는 인식 때문에 가까이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우연히 대화를 나눠 본 후, 규연은 뒤늦게서야 색안경을 벗어 던졌다.
규연은 건혁보다 건후와 말이 더 잘 통했다. 성격이 비슷하기도 했고, 행동하는 게 시원스러워서 마음에 들었다.
그는 건후와의 연락을 간간이 이어왔었다. 중간중간 긴 텀이 존재했지만,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사이였다.
집에서 따로 나와 사는 건후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아르바이트 생활을 전전했다. 규연은 이런 건후를 늘 안타깝게 여겼다.
그렇게 다시 연락이 뜸해졌을 즈음, 도민이 그만두겠다는 말을 전해왔고, 마침 타이밍 좋게 건후와 연락이 닿았다. 규연은 곧바로 제 카페에서 일해 보겠냐며 제안했다.
건후는 망설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늘 험한 일만 하느라 버거웠는데, 규연의 카페라면 비교적 쉽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봤을 텐데, 나루랑 꽤 친해졌나 봐.”
“아, 농장에서 일할 때 내 또래가 쟤밖에 없었어.”
사인 된 계약서를 가져가던 규연이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건후는 거짓 없이 대답해 주었다. 나루와 친해진 건지 아닌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농장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친구라고 불러도 될 듯했다.
나루는 정말 신기했다. 어딘가 엉성한데 야무지고, 건후의 나이대와 다르게 서툴러 보이기도 했다. 이런 모습에서 흥미를 느끼고 다가간 건 맞지만, 딱히 그쪽으로의 호감을 품은 건 아니었다.
명쾌한 대답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규연이 유니폼을 건네주었다. 하는 행동을 봐서는 아직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건후는 문득 농장에서의 나루를 떠올렸다. 꺼진 핸드폰을 붙들고 울망거리던 모습. 그때 연락하려고 했던 사람은 분명 규연이었을 것이다.
“규연이 형, 쟤랑 만나는 거 정말 괜찮아?”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야.”
“아니,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게 아니었어. 아니야, 됐어.”
규연이 질문을 오해하고 표정을 굳혔다. 그러자 건후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회수했다. 굳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괜한 질문을 꺼냈다가 분위기만 어색해졌다. 다행히 규연이 침묵을 깨고 서연을 불렀다.
“신입 교육 좀 부탁해.”
“네에, 맡겨 주세요.”
건후의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준 규연이 나루를 살펴보러 떠났다. 신입 교육이라는 말에 바삐 달려 온 서연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권했다.
“어, 건후 씨? 저는 서연이라고 불러 주시면 돼요. 오늘부터 같이 잘해 봐요.”
“잘 부탁드릴게요. 여기 텃세도 없고 좋네요.”
“어머, 텃세 당연히 없죠!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외향적인 두 사람이 만나니 분위기가 금세 시끄러워졌다. 서연은 건후의 털털한 모습에 들떠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딘가 불량하게 생겨서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생각한 것처럼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건후는 일을 꽤 빨리 배웠다.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아서 눈치껏 움직이는데 재주가 있었다.
일머리가 얼마나 좋았냐 하면, 한 달 먼저 들어온 나루를 챙길 수 있을 정도였다. 1년 전에 했던 카페 아르바이트 짬밥 덕분이었다.
“야, 야, 송나루,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다 쓸어 담냐.”
“내가 할 수 있어.”
“아오, 답답해. 봐라, 내가 하니까 한 번이면 끝나지.”
“…어떻게 한 거야?”
포장 용기에 하나씩 담기던 쿠키가 우르르 쏟아졌다. 건후는 능숙한 솜씨로 쿠키를 담고, 곧장 다음 상자를 펼쳤다. 그러자 지켜보던 나루가 소리 없이 감탄했다.
돌아다니며 매장을 살피던 규연은 그 장면을 목격하고 짝다리를 짚었다.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데, 둘 사이가 심히 가까워서 거슬렸다. 그래도 애처럼 질투할 수 없으니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나루는 불난 규연의 질투심에 기름을 쏟아부었다.
“우와, 힘 엄청 세다.”
“내가 덩치가 좀 든든한 편이지.”
“그럼 이것도 옮겨.”
“야, 너 그러면서 자꾸 나한테 시킨다?”
나루가 재료 상자를 낑낑거리며 나르자, 건후가 나서서 도와줬다. 나루는 건후를 칭찬하며 부추기고 남은 상자까지 옮기기를 부탁했다.
별거 아닌 상황인데 왜 짜증이 나는 걸까.
미간을 찌푸리던 규연이 건후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확실히 덩치가 큰 게 듬직해 보이긴 했다.
물론 규연의 피지컬이 더 뛰어났지만, 나루의 시선은 건후에게 꽂혀 있었다. 오늘따라 저 동그란 눈동자가 얄미워 보였다.
속으로 욕을 짓씹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 나루의 희미한 목소리가 규연의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다정하고, 착하고, 천사 같고, 내 말을 잘 들어 주고, 든든한 사람…….’
언젠가 들었던 나루의 이상형이었다. 다정하고, 착하고, 든든한 사람이라. 그때 당시 규연은 그게 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지금 상황에서는 건후와 비슷할지도…….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규연은 애써 머릿속을 비워내고, 붙어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송나루, 이리 와 봐.”
“왜요?”
고개를 돌린 나루가 눈을 반짝였다. 규연은 제가 한 짓에 당황하고 있었다. 순간 질투가 나서 부르긴 했는데, 마땅히 시킬 일이 없었다.
나 왜 이렇게 유치해졌냐. 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고소한 빵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주방에서 갓 구운 크루아상을 꺼내고 있었다. 규연은 이때다 싶어 크루아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니, 무슨?”
뿌듯한 표정으로 크루아상을 바라보던 파티시에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진열할 빵인데 나오자마자 덥석 집어 가다니. 사장이라 차마 뭐라고 하지 못했다.
“맛 괜찮은지 먹어 봐.”
“먹어도 되는 거야?”
“어, 먹어.”
마찬가지로 당황하던 나루가 얼떨결에 빵을 베어 물었다. 이제 막 나온 빵이라 그런지 겉은 바삭하고, 속은 김이 나올 정도로 뜨거웠다.
고개를 돌려 김을 식히던 나루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뜨겁긴 해도 크루아상의 맛은 변함없이 맛있었다.
이 카페의 근본이기도 한 크루아상은 진열하자마자 품절 될 정도의 인기를 자랑했다. 맛도 한결같아 극찬을 받는 빵이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크루아상 시식을 시키다니. 뭔가 이상했다. 파티시에는 규연 몰래 빵 하나를 빼돌려 입에 넣어 보았다.
“그것 참 이상하네.”
크루아상의 식감은 여전히 뛰어났고, 바삭 쫄깃하면서도 고소한 게 맛있었다.
사장이 또 까탈스럽게 구는 건가.
곁눈질로 규연을 힐끔거리던 파티시에가 입을 쩍 벌렸다. 유독 까탈스럽게 굴길래 기분이 안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랬는데…….
규연의 두 눈이 반달처럼 접혀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입꼬리가 귀에 걸쳐질 듯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나루를 대하는 태도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 영 낯설었다.
“으움, 맛있다.”
“다행이네.”
“그럼 난 다시 일하러,”
“가긴 어딜 가, 더 남았어.”
크루아상 하나를 다 해치운 나루가 뒤돌아섰을 때였다. 규연이 황급히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억지스러운 핑계로 빵까지 먹여 놓고, 더 남았다며 붙잡는 게 뻔뻔스러웠다.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나루는 주방 너머를 기웃거렸다. 잘 보니 아직 오븐이 돌아가고 있었다. 방금 나온 건 크루아상밖에 없는데, 뭘 더 시식해야 한다는 걸까.
그래도 규연과 붙어 있는 게 좋아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카페에 있을 땐 사장과 직원 관계라더니, 평소와 다름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아, 해.”
“아아.”
규연이 카운터 근처에 있던 마카롱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굳이 시식하지 않아도 되는 건데 굳이 꺼내 먹는 게 희한했다.
규연의 말에 나루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포장까지 손수 뜯은 규연은 연분홍색 마카롱을 자그마한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입을 우물거리던 나루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달콤한 마카롱은 언제 먹어도 좋았다. 특히, 차가우면서도 크리미한 필링의 식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거 왜 줘요?”
“말했잖아, 맛 어떤지 먹어 보라고.”
“이건 맛볼 필요 없는 건데…….”
“또 말대꾸.”
양심이 쿡쿡 쑤셨다. 나루의 말이 맞는데도, 규연은 엄한 척 말을 끊으며 입을 막았다.
규연은 이후로 나루의 입에 마카롱 하나를 더 넣어 주고, 그것으로 모자라 조각 케이크까지 먹였다. 파티시에들이 만들어서 내놓는 족족 가져다가 먹이는 게 기가 찼다.
부른 배를 쓰다듬던 나루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이번에 내민 것은 에그타르트였다. 이 정도면 시식이 아니라 식사에 가까웠다.
“송나루, 아-.”
“아아, 안 할래요. 나 저거 도와주러 가야 하는데.”
규연의 손짓을 거부한 나루가 눈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바라본 곳에는 재료 상자 옮기는 일을 끝마치고 쓰레기봉투를 정리하는 건후가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던 규연이 동태 눈깔을 떴다. 아침부터 온종일 건후, 건후, 하는 게 열받아서였다. 정작 건후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말이다.
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루가 조용히 걸음을 떼었다. 침묵이 곧 허락인 줄 알고 건후에게 가려던 것이었다.
탁!
하지만 규연의 질투는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순간 나루를 붙잡은 그가 그대로 얄쌍한 몸을 끌어당겼다. 힘없이 딸려온 나루는 규연의 넓은 어깨에 코를 박고 말았다.
이런 자세를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커플이라고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살포시 포옹한 자세가 민망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