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집에 있어.”
“나도 나가고 싶은데…….”
나루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갑자기 튀어나온 귀 때문에 규연과 함께 출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규연은 소파에 웅크려 있는 나루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얼마나 속상해하던지, 나루 근처가 어두침침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출근 준비를 하는 규연을 부럽게 쳐다보던 나루가 잽싸게 욕실로 들어갔다. 혹시 모르니 미리 나갈 준비를 하는 거였다.
규연은 나루가 매달리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출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최대한 빨리 현관문을 나서야 했다.
나루는 한 번 매달리면 절대 다리를 놔 주지 않았다. 나가고자 하는 욕망이 클 땐 더욱 심했다. 조그마한 게 고집은 세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어떻게든 이뤄내려고 했다.
쏴아아.
욕실에서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규연은 이 틈을 타 집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욕실 문 너머로 나루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규연아! 나 사라졌어!”
목소리가 나루의 기분을 그대로 나타내 줬다. 지금쯤 들떠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게 뻔했다.
그나저나 귀가 사라졌다니 다행이었다. 영영 사라지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심 고민했는데, 늘 나와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규연은 현관문 손잡이에서 조심스레 손을 떼어 놓았다.
덜컥!
“나 귀가 사라졌어!”
“야, 물기는 똑바로 닦고 나와야지.”
“봐, 없어. 나 나갈 거야. 출근해야 해.”
욕실 문이 열리고 온몸에 수건을 둘러싼 나루가 뛰쳐나왔다. 뭐가 그리 급한지 물기도 닦지 않고 그냥 나왔다. 규연은 물바다가 되어가는 바닥을 절망스럽게 쳐다봤다.
나루는 제 머리를 규연에게 들이대기 바빴다. 물이 떨어지는 것 따위 모르겠고, 귀가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확인받는 게 제일 중요했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려 보던 규연이 자연스레 수건을 덮어 줬다. 귀가 없어진 게 신기했으나, 지금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좀, 감기 걸려.”
“나 출근할 수 있는 거지.”
“그래, 할 수 있어. 그런데 만약 밖에서 갑자기 귀가 튀어나오면….”
만약의 상황을 생각하던 규연이 말끝을 흐리자, 나루가 대차게 고개를 저어댔다.
이전에 농장에서 일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밤에는 귀와 꼬리가 튀어나오고, 아침이 오니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쏙 사라지길 반복했었다.
오늘 튀어나온 것도 마찬가지일 거다. 한 번 들어갔으니 당분간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아냐, 괜찮아.”
“출근이 그렇게 좋냐.”
“응, 오늘은 새로운 사람도 오잖아.”
출근이 좋다니. 직장인 중 절반 이상은 출근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려 버린다고 했다. 하지만 나루는 달랐다. 규연이 반드시 출근해야 한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쉴 기회를 뻥 걷어찼다.
새로운 사람. 맞다, 오늘은 새 직원이 오는 날이었다.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나루에게는 큰 이벤트였다. 도민을 떠나보내 아쉬웠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고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가서 옷 갈아입고 와.”
“기다려!”
나루는 드레스룸으로 쏜살같이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머리카락까지 완벽히 말린 후 모습을 드러냈다. 촉촉이 젖어 있던 얼굴이 뽀송해져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거울을 바라보던 나루가 제 머리를 꾹꾹 눌렀다. 혹시 모르니 귀가 있던 부분을 손바닥으로 눌러 놓는 거였다.
규연은 제 아래로 보이는 정수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팔랑이던 귀가 정말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없으니까 뭔가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누가 올까, 진짜 궁금해.”
“뭐가 궁금하다는 거야.”
“새로 오는 사람. 착했으면 좋겠다.”
나루의 두 뺨이 복숭아빛으로 물들었다. 무언가를 기대할 때마다 꼭 이랬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홍조가 도는 게 잘 보였다. 이런 나루와 달리 규연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오늘도 나란히 차에 탄 둘은 카페까지 함께 출근했다. 한적한 거리를 구경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나루가 당당히 문을 열었다.
딸랑.
종소리마저 경쾌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일찍 출근한 서연이 홀을 쓸고 있었다. 언제 봐도 부지런한 직원이었다.
나루는 눈치 있게 달려가 빗자루를 뺏어 들었다. 서연이 괜찮다며 말렸지만, 기어코 뺏어서 바닥을 쓰는 게 기특해 보였다. 규연은 두 사람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오픈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새 직원 온대요.”
“잘생긴 사람이 왔으면 좋겠네요.”
“잘생긴 사람?”
“네, 사장님이랑 나루 씨처럼 잘생긴 사람!”
서연의 주접은 언제 들어도 민망스러웠다. 하지만 민망한 걸 떠나서 기분이 좋았다. 나루는 칭찬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통창 앞에 서서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던 규연이 헛기침을 했다. 한 소리 내뱉기 전에 대화 주제를 돌리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귀신같이 알아들은 서연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규연의 눈치를 보던 나루가 서연에게 귓속말했다. 직장 분위기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이었다.
“몇 시에 올까요?”
“새 직원이면 아마 아침에 올 거예요. 어어, 곧 오겠다.”
서연이 제 손목시계를 보여주며 문밖을 기웃거렸다. 현재 시각은 오전 8시 40분. 새 직원은 보통 9시에 출근한다.
손목시계를 힐끔거리며 훔쳐보던 나루가 눈을 반짝 빛냈다. 서둘러서 오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새 직원에게 관심이 쏠린 탓이었다.
결국, 오늘 오픈 준비는 규연 혼자 다 했다. 몇 번이나 잔소리했건만, 나루와 서연은 대답만 잘하고 설렁설렁 움직였다. 둘 다 간댕이가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송나루, 잘리고 싶지.”
“아니요?”
“그럼 얌전히 가서 일해.”
“테이블도 다 닦았는데…….”
궁시렁거리며 말끝을 흐리던 나루가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러자 원두를 꺼내던 서연이 어서 오라며 장난을 걸었다. 규연은 요새 저 둘이 신경 쓰였다.
오픈 준비는 안 하고, 저들끼리 모여서 의리를 다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딸랑.
아직 오픈 시간이 아닌데, 카페 문이 열렸다. 서로 속닥거리던 나루와 서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왔어요.”
“어, 왔냐.”
두 사람이 그토록 기다리던 새 직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발을 들이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규연은 꽤 친숙하게 인사를 받아 주었다. 급하게 면접을 봤다고 하더니, 아는 사람을 데리고 온 듯했다.
“와, 진짜 잘생겼어.”
서연은 남자를 발견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루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남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뭐랄까, 어딘가 익숙한 게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붉은색 머리카락에, 귀에 박힌 피어싱, 그리고 어딘가 불량한 이목구비.
키도 훤칠하게 크고, 으음. 그러니까 누구였더라…….
“건후! 도건후!”
한참 생각하던 나루가 남자의 이름을 떠올려내고 소리쳤다. 우렁찬 목소리에 모든 이의 시선이 나루에게 집중됐다. 특히, 규연은 꽤 놀란 눈으로 나루를 쳐다보았다.
“송나루?”
그래, 새 직원이라며 들어온 남자는 다름 아닌 건후였다. 나루가 규연에게서 도망쳤을 때 만났던 그 건후. 농장에서 함께 감자를 캐던 그 건후!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다 있을까.
나루가 카운터에서 달려 나와 건후의 앞에 섰다. 건후 또한 나루를 반갑게 맞이하며 이름을 불러 줬다.
“야, 너 여기서 일해? 대박이네.”
“너는 어떻게 여기 왔는데?”
“일하러 왔지. 너랑 나랑 일복 좀 터진다?”
“신기해…….”
건후는 나루의 손을 붙잡아 흔들며 악수했다. 격한 악수에 미간을 좁히던 나루는 곧 표정을 풀며 웃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난 게 신기해서, 건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반면, 규연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중이다. 여태 나루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아는 사람들뿐이었는데, 언제 친구를 사귀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루는 규연의 속도 모르고 건후에게 말을 걸었다.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이다.
“너 여기 살아?”
“이제부터 살 예정. 놀러 올래? 집은 좁지만.”
“갈래.”
어느새 나루와 건후 만의 세계가 형성됐다. 서연과 규연은 완전히 소외당해 버렸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얼마나 좋은지, 주변에 꽃과 나비가 돌아다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규연은 나루의 무방비한 행동에 대놓고 인상을 썼다. 인사를 나누는 건 그렇다 쳐도, 집에 놀러 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가긴 어딜 가.”
“으앗!”
규연이 나루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불쾌함을 드러내며 둘 사이를 떼어놓자 건후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 얘랑 어떻게 알아.”
“왜 저번에 농장에서 같이 일했었거든.”
“농장? 무슨, 아…….”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형은 얘랑 무슨 사이야?”
까칠한 말투에도 쫄지 않고 대답하던 건후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사정 있어 보이는 나루와 규연의 조합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규연은 썩어빠진 눈을 하며 말을 아꼈다.
규연의 등 뒤에 서 있던 나루는 침묵 속에 기회를 재다가 입을 열었다.
“내 애인이, 으웁!”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계약서 쓰게 따라 와.”
“으부읍!”
“송나루, 넌 창문 좀 닦고 있어.”
발랄하게 내뱉어지던 목소리가 강제로 막혔다. 규연이 나루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은 것이었다. 직원들 다 있는 곳에서 연인 사이라는 걸 밝히려 하다니. 지나치게 순수한 행동에 규연의 심장이 철렁였다.
그러나 건후와 서연은 이미 나루의 말을 이해한 뒤였다. 서연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음흉하게 웃었고, 건후는 믿기지 않는 듯 작은 탄식을 뱉었다.
규연에게 창문 닦기 미션을 받은 나루는 어쩔 수 없이 일을 시작했다. 상황은 그제야 얼레벌레 마무리되었다.
“형, 의외다.”
“입 다물고 사인이나 해.”
“송나루 쟤 성격 은근 장난 아닌데, 괜찮아?”
“…….”
“아니, 형도 한 성격 하잖아. 둘이 부딪힌다고 생각하니까 신기해서.”
악의 없는 물음이었다. 건후는 나루와 규연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루의 성격은 농장에서 함께 지내며 알게 되었고, 규연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 계약서가 내밀어졌다. 규연은 펜 하나를 건네주고는 턱을 괴었다. 건후를 바라보는 시선에 온갖 감정이 섞여 있었다.
걱정, 질투, 측은함, 같은 것들이 마구 엉켜 복잡한 눈동자였다.
건후가 규연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건후는 도건혁의 이복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