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서 내린 나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부터 잡았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규연은 자연스레 나루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스윽.
삐친 나루가 한 발짝 떨어져 섰다. 규연은 일부러 두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금색으로 제작된 엘리베이터 문에 나루와 규연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쳐 보였다.
괜한 데서 자존심을 세운 나루가 세 발짝 더 멀어졌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규연은 안으로 들어가 열림 버튼을 꾹 누르고 기다렸다.
하나, 둘, 셋, 넷…….
아무리 기다려도 나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규연은 반대편 벽에 붙은 거울을 이용해 벽에 딱 기대어 선 나루를 훔쳐봤다.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쟤 뭐 하냐, 진짜.
규연이 장난스레 열림 버튼에서 손을 떼었다.
‘문이 닫힙니다.’
친절한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그러자 나루가 어깨를 크게 움찔거렸다. 규연은 다시 열림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 줬다.
미치겠네.
거울 너머의 나루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축 늘어진 눈썹이 심각해 보여서 귀여움이 배가 되었다.
“빨리 와, 송나루.”
“…….”
“나루야.”
“……!”
“안 오면 진짜로 두고 간다.”
규연의 목소리가 복도에 웅웅 울렸다. 강아지 달래듯 이름을 부르던 그는 거울로 꾸준히 나루의 반응을 살피며 승부수를 던졌다. 두고 간다는 말에 힛, 하고 숨을 들이마신 나루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뿅,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했다. 슬쩍 간을 보던 나루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발을 잽싸게 들여놓았다.
얘를 어떡하면 좋지. X발. 귀여워서 욕 나온다.
<문이 닫힙니다.>
규연의 어깨 아래로 나루의 둥근 뒤통수가 보였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튀어나오려는 욕을 겨우 삼켜냈다.
꾸욱.
‘58층.’
“크읍…….”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자, 나루가 규연의 집 층수를 소심하게 눌렀다. 결국, 참던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규연은 조용히 흐느끼며 웃었다.
퍽!
뒤돌아선 나루가 규연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쳤다. 아까는 차 앞바퀴를 발로 차더니, 이제 주먹까지 사용한다. 웃긴 건 나루의 손이 은근 매웠다는 거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던데, 틀린 말은 아닌가 보네.
제 가슴팍을 손으로 쓸어내리던 규연이 아픈 척 연기를 시작했다. 눈썹을 한껏 찌푸려 주니 나루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앙칼지게 뜨인 눈이 점점 동그랗게 변하는 중이었다.
“아파?”
“어, 아파.”
“…원래 때리면 아파.”
걱정되는 주제에 안 그런 척한다. 쿨하게 대답한 나루는 자꾸만 규연의 몸을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럴 때마다 레몬 빛의 연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규연은 당장이라도 나루를 껴안고 싶었다. 제 아래에서 둥실거리는 뒤통수가 미친 듯이 귀여웠다. 귀엽다고 생각하는 게 질릴 정도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58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소리 없이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나루는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 나갔다. 그리고는 현관문 앞에 서서 얌전히 규연을 기다렸다. 하는 행동이 강아지 그 자체였다.
규연은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고, 현관문에 딱 붙어 선 나루를 빤히 쳐다봤다. 덕분에 두 사람의 간격이 가깝게 좁혀졌다.
나루는 눈동자만 올려 규연을 마주 보았다. 저런 건 또 언제 배웠는지, 쳐다보는 눈이 요망했다.
도저히 못 참겠다.
규연이 참지 못하고 두 팔을 활짝 벌렸을 때였다. 갑자기 자그마한 몸이 꿍, 부딪혀 왔다. 그러더니 규연의 허리에 두 팔을 두른다.
안아 주려고 했는데, 나루 쪽에서 먼저 안겨 온 것이었다. 규연은 마음속으로 애국가를 4절까지 되뇌었다.
“내 거야, 유규연.”
“…….”
“아무나 안지 마. 꼬리치지 마.”
“꼬리 안 쳤어. 나 억울해, 송나루.”
규연이 우는 소리를 흉내 내며 억울함을 토했다. 나루는 대답 대신 팔에 힘을 주었다. 규연은 지금 당장 죽어도 될 만큼 행복했다. 두 팔로 허리를 조이는 느낌이 묘하게 안정적이었다.
규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바로 나루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새근새근.
품 안에서 나루의 숨소리가 들렸다. 일정하게 터져 나오는 온기가 규연의 가슴팍을 간질이고 있었다.
얘는 어떻게 숨 쉬는 것까지, 하……. 귀엽다고 말하기도 지친다.
“후으, 으…….”
“…….”
규연은 일부러 나루를 더 꽉 껴안았다. 둘 사이는 틈새 하나 존재하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가만히 안겨 힘겹게 숨을 내뱉던 나루가 뒤늦게 규연의 등을 톡톡, 쳤다. 두 팔로 규연의 몸을 다 감싸지도 못해서 허둥거리는 게 엉성해 보였다.
“나, 나 숨 안 쉬어져…!”
“놔 줘?”
“……아니.”
규연이 살짝 힘을 풀자, 나루가 얼굴을 옆으로 뺐다. 이제 가슴팍에 묻혀 힘겹게 숨을 쉬지 않아도 됐다. 나루는 놓아주지 않아도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참 동안 껴안고 있던 두 사람은 10분이 지난 후에야 떨어졌다. 그 사이에 나루의 기분이 완벽히 풀어져 있었다. 심통 난 표정은 어디로 가고, 동글동글한 눈만이 남았다.
규연은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루를 데리고 들어가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하는데, 스킨십에 눈이 멀어 있었다.
“이제 들어가서 아까 못한 얘기 해야지.”
“무슨 얘기?”
“너랑 내 사이.”
간단히 대답해 준 규연이 현관문을 열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나루는 집 안으로 들어와 곧장 소파로 달려갔다. 폭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니 잠이 올 것 같았다.
규연은 나루의 앞에 앉아 본론부터 꺼낼 준비를 했다. 눈이 딱 봐도 졸려 보여서 이야기를 최대한 빨리 끝내려는 요령이었다.
“송나루.”
“응?”
“다시 대답해 봐,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강아지랑 주인보다 가까운……?”
아까의 상황을 떠올려 보던 나루가 미묘하게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래도 강아지랑 주인에서 한 발짝 앞서가긴 했다.
규연은 나루가 자연스레 이 사이를 깨닫길 바랐다. 각자의 위치가 확실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등하게 서 있는 연인관계라는 것을 말이다.
행동만으로 알아채면 좋겠지만, 이 상태에서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규연은 하는 수 없이 행동과 말로 이해시키기를 택했다.
나루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잡은 그가 입술을 짙게 맞추었다. 쪽, 하고 떨어질 줄 알았던 입술은 꽤 길게 붙어 있었다. 나루는 놀란 듯 눈을 댕그랗게 뜬 채 입술 사이를 벌렸다.
“으음……!”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한 키스는 처음이었다. 적당히 스킨십을 이어가던 규연이 천천히 떨어졌다. 나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규연을 쳐다보았다. 눈동자 속에 약간의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규연은 나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제 마음을 고백했다. 여태 보았던 모습 중 가장 다정했다.
“강아지랑 주인이 아니라, 애인.”
“애, 인……?”
“예전까지는 잘도 그런 것처럼 행동하더니, 왜 제일 중요한 때에 이상한 생각을 해.”
애인. 나루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비록 처음에는 규연의 마음을 열어서 애인이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진짜 애인이라고 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나루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했다. 평생토록 주종관계만 겪어 봤지, 누군가와 연인관계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애인이야?”
“응.”
“규연이 네가 더 잘난 사람이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애인 사이에 누가 더 잘나고 못나고가 어디 있어.”
백 점짜리 대답이었다. 들뜬 나루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규연이랑 내가 진짜 애인 사이라니. 달려들어서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전 주인이 무서워 덜덜 떨었는데, 이상하게도 규연의 고백을 듣고 나니 두려운 마음이 전부 가시는 듯했다. 오히려 비 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속내가 단단해졌다.
“안 믿겨…….”
“안 믿겨?”
“어, 응…….”
“사랑해.”
두근!
규연이 작정하고 나루의 마음을 녹였다.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헉, 하고 놀란 나루는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런다고 해서 심장박동이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규연이가 사랑한다고 했다.
유규연이 사랑한다고 했다.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한대. 사랑한대. 사랑한대.
나루의 속마음이 시끌벅적해졌다. 1초마다 수만 가지 생각이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그중 절반, 아니 절반 이상이 주접에 가까웠다.
뭐라고 대답하지. 뽀뽀하고 싶어. 유규연 잘생겼어. 근데 내 애인이래. 짱이다.
오랫동안 뜸을 들이던 나루가 폴짝, 뛰었다. 그러더니 규연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붙잡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 신나 있던 탓에 오늘도 이를 드러내 버렸다.
자그마한 송곳니가 규연의 입술을 따끔하게 짓누르고 떨어졌다. 흔히 나는 쪽, 소리도 안 났다. 나루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헤실거리는 중이었다.
“나, 나도.”
“뭐가 나도야, 응?”
“나도 규연이 사랑해.”
안 어울리게 부끄러워하던 나루가 사랑한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땐 언제고, 막상 직설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니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게 예뻤다.
둘 사이에 몽글거리는 분위기가 흘렀다. 잠시 말을 아끼던 나루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그러면 이제 규연이가 아니라 여보야?”
“그냥 규연이라고 불러.”
“왜? 사랑하면 여보라고 불러.”
여보. 간질간질한 호칭에 미간을 꿈틀거리던 규연이 단호히 거절했다. 나루가 불러주는 게 귀엽긴 했지만, 귀여워서 문제였다.
그나저나 이런 호칭은 어디서 배워 온 걸까.
“…너 그런 호칭 어디서 배웠어.”
“티비에서 보면 그래. 다 여보라고 해.”
규연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TV한테 감사해야 하나.
그래도 일단 나루를 말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첫 번째 이유는 규연의 심장에 무리가 가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규연이 오글거리는 호칭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입에 담지 않은 건 나루도 마찬가지였으나, 신기하게도 호칭을 잘만 불렀다.
“그건 나중에.”
“결혼하면 해?”
“크흡, 응, 그래. 결혼하면 해.”
“아아, 알겠어…….”
나루와 대화를 나누면 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결혼이라니. 발칙하고 귀여운 단어에 웃음을 터뜨린 규연이 고개를 끄덕여 줬다.
나루는 쉽게 수긍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끈덕지게 질문을 던져 볼 생각이었는데, 규연이 바로 고개를 끄덕여서 다행이었다.
나루의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갔다. 그 미소가 오늘따라 더 화사해 보였다.
이제 애인 사이가 됐으니까 내가 규연이를 지켜줘야지. 전 주인이 이곳으로 넘어와도 규연이 옆에 꼭 달라붙어서 다치지 않게 할 거야.
속으로 다짐한 나루가 작게 주먹을 쥐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