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30)


목구멍이 조여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동자가 일렁이는 차원 이동구를 따라 어지럽게 흔들렸다. 도민의 말이 거짓이길 바랐는데, 모든 게 사실이었다.

이곳으로 올 수 있게 된 건 좋았으나, 나루는 차원 이동구가 굳게 닫히길 원했다.

전 주인은 집착이 심한 사람이었다. 나루가 도망치면 며칠 내내 사람들을 풀어 잡아 왔고, 지하실에 묶어놓은 뒤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세뇌하며 매질을 했다.

그 탓에 나루는 장기간 도망쳐 본 적이 없었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사흘 도망친 게 전부였다. 하지만 차원 이동구로 넘어오면서 처음 도망에 성공했다.

여태껏 규연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느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 주인은 지금쯤 나루를 찾느라 미쳐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차원 이동구를 발견해 이쪽으로 넘어온다면 나루의 인생은 끝장날 것이다.

설마, 아니야,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모퉁이 뒤에 숨어 차원 이동구를 바라보던 나루가 눈을 질끈 감았다. 끔찍한 상황을 생각하니 온몸에 오한이 드는 느낌이었다.

위험해지기 전에 벗어나자. 벗어나야 해.

뒤돌아선 나루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걸음걸이가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송아지와 비슷했다.

“우웁…….”

극심한 두려움에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입을 힘껏 막은 나루는 코로 심호흡하며 골목길을 벗어났다.

차원 이동구를 발견한 순간 되살아난 전 주인에 대한 기억과 그의 만행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상한 약을 먹고 방치당한 일, 침대에 사지가 묶인 채로 채찍질 당한 일, 차가운 지하실 바닥에 자신을 던져두고 끔찍한 장난감들을 무자비하게 사용하던 전 주인의 모습.

나루는 다시 지하실로 돌아가 학대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러기 싫었다. 여기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알아 버렸는데, 전 주인의 손에 붙잡혀 간다면 어떻게 될까. 안 봐도 뻔했다.

죽고 싶을 거야. 죽을래. 정말 죽을 수도 있어.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까.

“하, 하아, 하…….”

가슴께를 주먹으로 쿵쿵 내리치던 나루가 묵직한 숨을 터뜨렸다. 불안한 감정이 온몸을 잡아먹는 것만 같았다.

타닥!

눈물을 글썽이며 앞으로 나아가던 중,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힘겹게 고개를 든 나루는 발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마자 힘껏 뛰쳐 들었다.

“규연아……!”

달려온 사람은 규연이었다. 나루를 찾으러 나온 규연은 비틀거리는 몸을 제 품에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두터운 허리에 나루의 두 팔이 교차하며 감겼다.

험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벌벌 떨어대던 나루가 규연의 품속을 깊게 파고들었다. 작게 앓기까지 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규연은 나루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송나루, 너 왜 그래. 누가 괴롭히기라도 했어?”

“으으, 으…….”

“잠깐 다친 곳 없는지만 확인할게, 나 봐.”

“으으응!”

나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해 다친 게 아닐까, 걱정하던 규연이 몸을 살짝 떼어냈다. 우선은 나루의 상태를 파악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루는 이것조차 싫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투정 섞인 웅얼거림은 덤이었다. 규연은 하는 수 없이 나루를 다시 껴안아 주었다.

규연이 도망치기라도 할까 봐 허리를 꼭 붙든 나루가 코를 킁킁거렸다.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규연의 향이 짙게 느껴졌다. 익숙하게 냄새를 맡다 보니 그나마 마음이 좀 진정됐다.

상황은 심각한데, 하는 행동이 지나치게 귀여웠다. 규연은 걱정하다가도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은 이런 감정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송나루.”

“…….”

“나루야.”

“나 집에 갈래. 규연이 집에 갈래.”

규연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던 나루가 딴 리를 했다. 무작정 집에 가겠다고 하는 모습이 처음 만났던 날과 유사했다. 겁에 잔뜩 질려서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표정. 몇 개월간 못 보던 표정이었다.

규연은 나루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집에 가는 건 상관이 없었으나, 나루가 조금이라도 진정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스킨십 효과가 있었던 걸까. 얼굴을 폭 파묻고 있던 나루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촉촉해진 두 눈이 유독 처연했다. 규연은 나루의 눈 위에 살포시 입 맞추고 떨어졌다. 반쯤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일단 카페 들러서 인사만 하고 가자. 괜찮지?”

“크흥, 괜찮아…….”

까칠한 규연의 말투가 말랑한 푸딩처럼 부드러워졌다. 아기를 대하듯 달래자, 나루가 코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치듯 안긴 품이 따스하고, 또 든든해서 몸이 점차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규연은 제 팔로 나루의 어깨를 감싼 채 걸었다. 그 몸에 기대듯 걸어 들어온 나루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반듯하게 섰다.

밖에서는 몰라도, 카페에서는 규연과 가까이 지내면 안 됐다. 나루는 규연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지금도 저 품에 다시 안겨들고 싶었으나 있는 힘을 다해 참아냈다.

나루의 행동에 잠시 당황하던 규연은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이럴 때는 모르는 척 기대어도 되는데, 말을 잘 듣는 나루가 안쓰러우면서도 웃겼다.

“나루 씨, 어디 안 좋아요? 안색이 갑자기 왜 이래요….”

“나 먼저 들어가 볼 테니까, 마무리 부탁해.”

“네, 사장님. 들어가 보세요.”

설거지하던 서연이 울상을 짓더니 나루를 걱정했다. 규연은 대신 대답하며 상황을 급히 마무리시켰다. 서연은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들어가 보라며 인사했다.

서연의 옆에서 빵을 썰던 도민은 나루의 상태를 보고 몰래 인상을 찌푸렸다. 나루가 저 정도로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괜히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직원들의 눈치를 보던 나루는 코를 훌쩍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도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잘 가…….”

“멍청하게 울지 말고, 잘 살든가 말든가.”

“웅…….”

“대답도 멍청해.”

“크흥, 응!”

억세게 손을 붙잡은 도민이 격한 악수를 했다. 그는 일부러 나루를 놀리듯 말했다. 속을 살살 긁어 주니 금세 기운을 차린 나루가 크게 대답했다.

두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던 규연이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나루는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한 발짝 비켜서 줬다.

이번에는 규연이 손을 내밀었다. 살포시 손을 맞잡은 도민이 나루를 장난스럽게 쳐다봤다. 그러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솟구쳐 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고했어. 월급은 조금 더 넣었으니까 확인해 보고.”

“네, 사장님. 저 너무 아쉬운데 포옹 한 번 해도 될까요?”

“뭐? 안,”

안 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민이 규연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일부러 그런 거였다. 그는 등 뒤에 있던 나루에게 얄밉게 혀를 내밀어 줬다.

방금까지 시무룩하게 있던 나루가 도민의 도발에 눈을 이글거렸다. 하여간 두 사람은 틈만 나면 투닥거렸다.

규연은 도민의 몸을 단호하게 붙잡아 떼어냈다. 당황한 시선이 도민에게 닿았다가, 다시 나루에게 닿기를 반복했다.

씩씩거리던 나루가 규연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어서 집에 가자는 신호였다. 인사를 엉성하게 마무리한 규연은 나루의 손에 이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짜증 나는 고양이. 퉤퉤.

카페 밖 통창으로 내부를 들여다보던 나루가 도민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역시, 고양이는 강아지와 맞지 않았다.

“타.”

“…….”

차를 끌고 온 규연이 운전석에서 내리며 말했다. 가만히 서 있던 나루는 심통 난 표정으로 규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유규연 쉬운 남자. 아무한테나 품을 내주면 안 돼. 내 건데.

나루의 질투심이 활활 불타올랐다. 조용히 조수석에 올라타려던 나루는 앞바퀴를 힘껏 걷어차 줬다. 억대 스포츠카를 저렇게 대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루밖에 없을 거다.

퍽, 소리가 들리자 규연이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짧게 한마디 했다.

“야, 발 다쳐.”

“…….”

퍽!

나루가 또 한 번 앞바퀴를 걷어찼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나루의 이런 행동에 놀라 수군거렸다.

“어머, 미쳤나 봐. 저거 딱 봐도 비싼 차 같은데 발로 차도 돼?”

“와, 간댕이 크다. 차주 제대로 열받겠는데.”

나루는 이게 얼마나 비싼 차인지 몰랐다. 애초에 규연의 주차장에는 이것과 비슷한 차가 세 대나 더 있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달리 규연은 차가 아닌 나루를 걱정하고 있었다. 심통 났다고 바퀴를 뻥뻥 차대는데 얇은 발목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결국, 나루에게 다가온 규연이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 몸을 구겨 넣어 줬다. 안전벨트까지 손수 해주는 폼이 꽤 다정했다.

강제로 차에 타게 된 나루는 앞만 바라봤다. 그리고 규연이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탄탄한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윽!”

“…….”

“송나루, 왜 이래.”

“뭐.”

뭐가 또 마음에 안 드셨네, 저거.

꼬집힌 허벅지를 어이없게 쳐다보던 규연이 시동을 걸었다. 나루는 운전하는 규연을 빤히 노려보며 압박을 가했다. 순둥한 얼굴에 독기 한번 가득했다.

신호가 빨간불로 변하고, 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규연은 곧장 조수석을 돌아보며 나루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유규연은 존나 쉬워.”

“……뭐라고?”

“내 건데, 왜 다른 사람 안아?”

나루가 미성의 목소리로 험한 말을 내뱉었다. 존나, 는 아까 도민이 쓰던 걸 베껴 쓴 것이었다. 규연은 황당함에 말문이 막혀 입술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빠앙!

그때,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규연의 차가 출발하지 않자, 뒤에서 한참 기다리던 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규연은 황급히 액셀을 밟았다.

“잠깐, 운전 중이니까 내려서 얘기해.”

“…….”

“참고로 나 진짜 억울하다, 송나루.”

“어쩌라고.”

이제는 ‘어쩌라고’를 당당하게 말했다. 규연은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핸들을 돌렸다. 나루가 가끔 이렇게 굴 때마다 혼이 탈탈 털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위치가 점점 바뀌어 갔다. 초반에는 확실히 규연이 더 우위에 있는 거 같았는데, 지금은 나루가 규연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듯했다.

슬쩍 나루를 쳐다본 규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오리 같았다.

어쩔 수 있나, 내가 져 줘야지. 송나루 저거 부둥부둥 해 줘야지.

잔뜩 토라진 애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삐친 송나루는 진짜 더럽게 귀여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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