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연의 마음을 제대로 흔들어 놓은 나루가 자리를 떴다. 이럴 때를 보면 꼭 연애 고수 같았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밀당 스킬이 장난 아니었다.
나루를 붙잡으려던 손이 허공을 휘적였다.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잡고 이야기를 할 틈도 없었다.
다시 카운터로 돌아간 나루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일을 이어갔다. 규연의 마음을 다 뒤집어 놓고, 자기는 태연하게 구는 모습이 아기 여우 같았다. 요망한데 자기가 요망한 줄 모르는 아기 여우.
힘없이 자리에 앉은 규연이 이마를 짚었다. 묘하게 얼굴이 뜨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나루 씨, 사장님 왜 저래요?”
“이따 다시 얘기하재요.”
“뭐 안 좋은 얘기 했어요?”
“으음, 아니요. 그건 아닌데…….”
서연의 물음에 도리질 치던 나루가 테이블을 힐끔 쳐다봤다. 규연이 더 가까워지길 원하는 것 같아서 그런 호칭을 써 줬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좋지 않은 듯했다.
이게 아닌가.
나루는 규연에게 금세 관심을 떼어 버렸다. 한 가지 일에 꽂히면 다른 걸 신경 쓰지 못하는 편이라, 지금은 그저 일에만 집중했다.
오늘은 유독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도민이 카페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앙숙처럼 지내 왔지만, 나루는 도민이 그리 싫지 않았다. 같은 수인이라 그런지 미우면서도 자꾸만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달까.
진열을 마치고 돌아오던 나루가 도민의 옆에 붙어 괜히 얼쩡거렸다. 그만두는 건 좋은데, 그 이유가 뭔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뭘 자꾸 쳐다봐. 너 할 일이나 해.”
“왜 그만두는 거야?”
“흥, 내가 그만둬서 좋잖아, 갑자기 웬 친한 척.”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대답하는 게 앙칼졌다. 하지만 나루는 물러서지 않고 얼굴을 더 들이밀었다. 간혹 이렇게 맑은 광기를 부리는 게 우스우면서도 무서웠다.
애써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돌리던 도민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끈질기게 이유를 물어보는 나루의 행동에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호기심을 품는 게 강아지 그 자체였다.
“너 세 시에 일 끝나지. 잠깐 좀 나와.”
“왜?”
“궁금하다며.”
“그냥 지금 말해 주면 안 돼?”
“아, 안 돼!”
도민이 까탈스러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테이블을 정리하던 서연이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자 그제야 데시벨을 줄였다. 나루는 도민이 소리를 지르든 말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루는 도민을 역으로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그냥 말해 주면 될 것을, 굳이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게 한다니. 의미심장한 눈초리에 발끈한 도민이 하악질 하듯 손톱을 세웠다.
“아무튼 퇴근 후에 봐.”
“귀찮아…….”
끝까지 토를 달던 나루가 총총거리며 멀어졌다. 도민은 올라오는 화를 눌러 참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래서 개들이 싫다니까.
씩씩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에 서연이 살풋 웃었다. 두 사람 다 귀엽게 생겨서는 하는 행동도 소동물 같은 게 깜찍해서였다.
나루도, 도민도, 진지했으나 서연의 눈에는 그저 뽀시래기들처럼 보였다. 아기 강아지와 고양이가 서로 투닥이며 장난을 치는 모습 같기도 했다.
“아휴, 귀여워라.”
“…네?”
“아아, 아니에요.”
도민의 황당한 대답에 손을 내저은 서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루는 귀엽다고 칭찬하면 부끄러워하며 실실 웃는데, 도민은 몸을 움찔거리는 게 진짜 고양이와 비슷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너무 귀엽다.
오늘따라 매장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규성이 다녀가고, 규연은 왠지 모르게 영혼이 빠져나가 있고, 도민과 나루는 열심히 투닥거리고. 하지만 서연은 이런 분위기가 은근 좋았다. 여기서 도민이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도 조금 들었다.
시간은 꽤 빨리 흘러갔다. 열심히 일하던 나루는 세 시 정각이 되자마자 앞치마를 홀라당 벗어 던졌다. 기회를 노리며 눈동자를 돌리던 도민은 잽싸게 나루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어, 어?”
“꾸물대지 말고 와.”
카페 뒤편으로 나온 도민이 나루의 손을 까칠하게 놓았다. 이곳에 단둘이 있으니 저번에 기 싸움에서 졌던 기억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나빴다.
나루는 여유롭게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도민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악의 없이 뜨인 동그란 눈매가 은근 얄미워 보였다.
도민은 분위기를 무겁게 잡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무슨 이야기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나루의 호기심이 점점 커져만 갔다.
“너, 조심해.”
“응?”
“내가 왜 그만두는 건지 궁금하다고 했지. 나, 전 주인한테 돌아가.”
생각하지 못한 말에 당황한 나루가 눈을 끔뻑였다. 나루보다 먼저 이 세계로 온 도민은 약은 수법을 쓰며 잘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앙칼진 태도에 비해 맹해 보일 때가 많았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전 주인한테 돌아간다고?
나루에게는 심히 두려운 말이었다. 여기서는 자유롭게 살 수 있어도, 다시 저쪽으로 넘어가면 그럴 수 없게 된다. 도민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루의 경우는 이랬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이쪽으로 못 오잖아…….”
“못 오긴 왜 못 와?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나만 올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봐, 지금 너도 내 눈앞에 있잖아.”
맞는 말이었다. 나루도 이 세상으로 넘어올 수 있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이 못 오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나루는 울상을 지으며 도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전 주인한테 돌아가겠다니. 이건 아무리 원수 사이라도 뜯어말려야 했다.
“너 괜찮은 거야?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여기 넓으니까 잘 도망치면……!”
“누가 누구 걱정을 해. 나는 이 삶이 지쳐서, 그래서 가기로 한 거야. 일하면서 사람들한테 치이는 거 싫어. 그냥 주인 밑에 가서 편하게 살 거야.”
도민의 상황은 나루와 조금 달랐다. 주인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도민은 학대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름 귀하게 자랐다는 거다.
물론 얼떨결에 이 세상으로 넘어와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돈을 벌고 살아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수인이면서 누군가에게 키워진 도민에게는 무척 어려웠다.
예쁘장한 얼굴과 직접 일해 보며 깨달은 사회생활의 팁으로 어떻게든 살아오긴 했지만, 도민은 매우 지쳐 있었다. 안락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 함께 살고 싶었다. 의도치 않게 주인과 헤어지게 되었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갑자기 전 주인이 나타났다. 경황 없는 모양새의 그는 도민을 발견하자마자 원래 세계로 돌아가자며 오열을 했다.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구가 아직 열려 있다고. 그러니 함께 넘어가서 전처럼 살아가자고.
“어떻게 그럴 수가…….”
“네가 지금 남 걱정할 때야? 우리가 넘어온 그 공간이 열린 게 확실해. 그 말은, 네 주인이 널 찾으러 넘어올 수도 있다는 거지.”
나루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도민의 말대로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는 거다.
전 주인이 나를 찾으러 넘어올 수도 있다니. 거짓말…….
나루의 눈동자 속이 텅 비어 탁해졌다. 도민은 그런 나루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혀를 찼다. 매섭게 투닥거렸어도 같은 수인이라고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내 주인은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괜찮아. 그런데 넌 아니잖아?”
“…응.”
“아무튼 조심해. 수인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랬으니까.”
날카로운 말투였으나 나루를 생각하는 마음이 잘 드러났다. 잠시 우중충하게 서 있던 나루는 도민에게 냅다 달려들며 포옹했다. 얼떨결에 마주 안게 된 도민은 몸을 바르작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루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키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묘하게 비슷한 두 사람이 껴안고 있으니 앙증맞은 게 귀여웠다. 심각한 분위기 속에 서로를 안고 있던 둘은 곧 낑낑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우, 너는 좋겠다. 주인이 착한 사람이라 좋겠다.”
“씨, 그러는 넌, 사장님이랑 사귀는 중이면서.”
“그래도! 저쪽으로 넘어가면 착한 주인 밑에서 잘 살아야 해.”
으르릉거릴 땐 언제고, 둘은 서로를 10년지기 친구처럼 애틋하게 여겼다. 약하고 차별받는 존재인 수인들은 같은 아픔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 본능적인 유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도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나루가 머리를 살짝 비비적거리자, 도민이 어쩔 수 없이 받아준다는 듯 볼을 문질거렸다.
타이밍 좋게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서연이 그 둘을 발견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고, 아이고, 저 귀염둥이들을 어떡하지.
인기척을 느낀 도민이 나루를 퍽 밀어내 버렸다.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왔는지 도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러자 밀쳐진 나루가 아쉬운 티를 냈다.
“큼, 아무튼 몸이나 잘 사려. 넌 멍청하니까 특히 더 조심해.”
“응, 나 안 멍청해. 알겠어…….”
“하, 끝까지 짜증 나게 굴긴.”
콧방귀를 뀐 도민이 나루의 어깨를 톡, 치고 지나갔다. 마지막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나루가 얄미웠으나, 마냥 싫지 않은 게 묘했다. 도민도 나루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거다.
도민은 생각했다. 나루가 이 세상에 잘 적응해서, 적당히 행복하게 살기를.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훔쳐내던 나루가 도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등에는 미련 따위 없어 보였다.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내가 있던 곳이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세계일 수도 있구나.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루는 문득 카페 뒤쪽에 나 있는 길을 떠올렸다. 처음 이곳에 오게 됐을 때,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규연의 카페를 봤었다.
그렇다는 건, 차원 이동구가 이 근처에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홀로 남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나루는 카페로 들어가는 대신, 뒤쪽에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본능적으로 발이 움직여서 제 의지로는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정말 도민의 말대로 구가 다시 생겼을까.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전자 상가가 보였다. 나루가 앉아 TV를 시청했던 그곳이었다. 감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나루는 익숙한 모퉁이를 발견했다.
여기다. 이곳을 돌면 내가 처음 왔던 장소야.
골목 안이 유독 컴컴했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한 게 음침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키던 나루가 조심스레 모퉁이를 돌았다.
“……!”
골목은 처음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쓰레기들, 복잡하게 튀어나온 가스관. 그런데 하나, 그때 없었던 것이라면…….
어둠 속에 일렁이고 있는 자그마한 차원 이동구.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