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갈색의 정장 차림. 그 위에 깔끔히 걸쳐 입은 코트. 흠집 하나 없는 구두까지 완벽했다. 카페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규성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나루에게 아는 체를 했다. 눈썹을 살짝 찡긋거려 주니, 나루가 그 표정을 어설프게 따라 하며 받아쳤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던 규연은 곧장 한숨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규성과 나루가 메시지를 나눈 일로 화를 내던 참이었는데, 그 당사자가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규연이 달갑지 않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자 규성이 실소를 흘렸다. 막냇동생이라 그런지 예의 없게 행동해도 그저 귀여워 보였다.
“왜 왔어, 형.”
“직원들 커피 사 줄 겸 들렀어. 나루 씨 얼굴도 좀 보고.”
턱짓으로 나루를 가리키던 규성이 자연스레 지갑을 꺼내 들었다. 직원들에게 커피를 사 준다는 게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얼떨결에 대량 주문을 받은 나루는 뚝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연이 능숙한 폼으로 나루를 도왔다.
규연은 그런 나루를 힐끔, 쳐다보고는 규성의 팔을 냅다 잡아끌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얘기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야 했다.
규성은 규연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 주었다. 벌써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규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눈치였다.
카페 뒤쪽 문을 열고 나온 규연이 짝다리를 짚고 섰다. 매우 건방진 태도였다. 그러나 규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하다 나온 거니까 간결하게 해.”
“형이 왜 쟤랑 메시지를 주고받아?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
규성의 묵직한 시선이 규연에게 닿았다. 동생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규연은 제 형이 나루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나루와 규성, 조합부터 이상하지 않은가. 게다가 규성은 나루를 대놓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연락을 취하고, 심지어는 카페까지 직접 찾아와 나루와 눈인사를 나누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규성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했다. 그리고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져 주었다.
“너 진짜 나루 씨 좋아하는 게 맞긴 해?”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두 사람, 정식으로 연인 관계인 게 맞냐고.”
상상치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규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규성이 왜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 도저히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분위기였다.
그보다 더 문제인 게 하나 있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송나루와 내가 정식으로 연인 관계가 된 걸까.
답은 아니었다. 물론 규연은 자연스레 사귀는 것에 익숙했지만, 나루는 전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규연은 나루에 대한 마음을 밝히던 날, 제대로 고백하려고 했었다. 연애에 무지한 나루를 위해 ‘우리는 이제 진짜 연인 사이다.’라는 걸 알려주려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날, 규연은 나루와의 사이를 확실히 정의 내리지 못했다. 말을 꺼낸 순간 나루가 다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왜 대답을 못 해, 유규연.”
“좋아하는 거 맞아.”
규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마 연인 관계라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치 빠른 규성은 목소리 톤과 짧은 대답만으로 규연의 상황을 완벽히 파악했다.
그는 몇 주 동안 주고받았던 나루와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나루는 사소한 것 하나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전부 규성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다. 귀찮을 법도 한데, 규연을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는 게 제법 기특해 보였다.
규성은 곧바로 제 동생을 나무랐다. 처음에는 나루를 그저 모자라게 봤는데, 여태 메시지를 나눠 본 결과 이만큼 똑부러지는 애가 또 없었다.
“쟤는 너 때문에 내 눈에 들려고 노력하는데, 너는 여태 뭘 한 거니.”
혼내는 듯한 말투에 규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아니, 다 떠나서 규성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나루와 규성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길래 이러는 걸까.
송나루가 나 때문에 형 눈에 들려고 노력했다고?
핸드폰을 빼앗을 때 얼핏 보았던 대화창이 스쳐 지나갔다. 사진과 함께 오늘은 이걸 했다, 저걸 했다, 하며 주절거리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었는데, 그 모든 게 형 눈에 들려고 노력한 거였다니.
규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우중충해졌다. 방금까지 제 동생을 밀어붙이던 규성은 다시 다정한 말투를 꾸며내며 충고해 주었다.
“하려면 확실히 해. 노력하는 사람 불쌍하게 만들지 말고.”
“저번에는 안 좋게 보더니, 갑자기 왜 이래?”
“…기특하더라고.”
규연의 짜증스러운 말에 진심 어린 답이 돌아왔다. 규성은 어쩌면 나루가 제 동생인 규연보다 더 성숙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규연이 들으면 성질을 낼 만한 속마음이었다.
규성은 이렇게나 의지가 강한 사람을 보는 게 오랜만이었다. 나루는 자기 의사도 확실히 밝힐 줄 알고, 말로만 자신만만한 게 아니라 직접 행동까지 보여줬다. 인정을 안 해줄 수 없는 아이였다.
“아무튼 관계 확실히 해.”
“…….”
“형 바빠, 더 얘기 못 하니까 나머지는 나중에 하자.”
시간을 확인한 규성이 급히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남아 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손님 대하듯 깍듯하게 안내한 나루가 잘 포장된 컵들을 넘겨주었다. 뿌듯한 얼굴로 받아든 규성은 유독 짙은 빛깔의 아메리카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히 손이 야무진 편이네.
쏟아지지 않도록 일회용 컵 입구를 꼼꼼히 막아놓은 게 야무졌다. 반은 서연의 솜씨일 테지만, 나루도 옆에서 도왔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칭찬해 주고 싶었다.
“포장이 꼼꼼해서 좋네요.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저, 규연이한테 핸드폰 뺏겨서 연락 못 해요!”
“응?”
“며칠은 사진 못 보낼지도 모, 몰라요.”
눈치를 보던 나루가 말끝을 더듬었다. 의아한 눈으로 나루를 쳐다보던 규성은 유순한 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성실한 모습을 보이려는 나루가 제 동생같이 귀여워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나저나 핸드폰을 뺏었다니, 유규연 이 자식 성깔이 여전해서 어쩌나.
마침 정신을 되찾은 규연이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규성은 뒤돌아서기 전에 한마디를 남겼다.
“나루 씨 핸드폰 돌려주고, 유규연.”
“형, 바쁘다며.”
“나중에 한 번 들러.”
짧게 인사를 마친 규성이 걸음을 바삐 옮겼다. 카페에서 나온 그는 방금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랑 연애하겠다는 동생을 이렇게 밀어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 부모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저 두 사람에게 부모님의 허락이라는 큰 벽이 남아 있었지만, 규성은 언제든지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루의 작전이 완벽히 먹혀든 셈이었다.
딸랑, 언제 들어도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루는 눈을 반짝이며 규연을 쳐다보았다. 규성의 말대로 핸드폰을 돌려달라는 뜻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제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던 규연이 삐져나오려는 한숨을 삼켜냈다. 서연은 규연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손을 뒤로해 나루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 줬다.
간지러운 느낌에 옆을 본 나루가 물음표를 띄웠다. 서연은 눈짓으로 규연을 가리키며 잘 달래 보라는 귓속말을 했다. 뒤늦게 규연의 표정을 발견한 나루는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가까이 다가섰다.
“규연아, 너 무슨,”
“송나루, 얘기 좀 하자.”
“으응?”
이제 막 얘기를 좀 꺼내 보려고 했더니, 규연이 말을 가로챘다. 나루의 손을 세게 붙잡은 그가 가장 구석 테이블로 와 의자를 끌고 앉았다.
자연스레 그 앞에 앉은 나루는 동그란 눈을 열심히 깜빡였다. 규연이 왜 이렇게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규연은 상당히 애매하면서도 대답하기 쉬운 질문을 던졌다.
“넌 우리 관계가 뭐라고 생각해.”
“어어…….”
“…….”
“주인이랑 강아지?”
콰과광!
규연의 마음속에 벼락이 쳤다. 나루가 뱉은 말은 생각한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냥 친구 사이도 아니고, 뭐? 주인이랑 강아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생각해보았으나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규연의 허망한 얼굴과 달리 나루는 평소처럼 평온해 보였다.
서로 좋아하는 주인이랑 강아지 아닌가? 규연이는 주인 하기 싫은 건가? 어째서지.
나루에게 주인은 애인 관계와 비슷했다. 물론 전 주인과는 애인 관계라고 하기 애매했지만, 규연은 확연히 달랐다.
전 주인과는 어딘가 일방적인 관계였다면, 규연과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그런 사이였다.
규연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주인과 강아지라는 말이 아직 충격으로 남아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듣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충분히 오해할 만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송나루, 나루야…….”
“왜? 규연아.”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루는 다정하게 불린 제 이름에 얼굴을 붉혔다. 매일 이름 석 자만 듣다가 ‘나루’라는 호칭을 들으니 마음이 괜히 일렁거렸다.
마른세수를 하던 규연이 나루를 심란하게 쳐다봤다. 주종관계로 생각하고 있는 애한테 어떻게 고백해야 하는 거지. 갑자기 속이 착잡해졌다.
가만히 규연의 표정을 살피던 나루는 머리를 굴려 생각했다.
우리 관계가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지고, 내 대답에 우울해하는 규연이.
왜 우울해하는 거지. 내 대답이 틀린 걸까.
설마, 주인이라고 하는 게 싫은 건가? 조금 더 가까운 게 좋은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나루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규연이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아니다, 이따 집에서 다시 얘기하자.”
“응, 여보야.”
“……?”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규연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정처 없이 떨리는 동공이 나루를 위태롭게 응시했다.
“너, 너 방금 뭐라고 한 거…….”
“여보야?”
파스스스.
규연은 몸이 굳다 못해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정작 규연의 혼을 쏙 빼놓은 나루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깜찍한 목소리로 ‘여보야’라니.
이건 반칙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