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도 규연이네 형한테 인정받는 거야!
나루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아까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규성은 나루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적당히 옆에 있다가 떨어지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가정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나루가 앞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규성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저 막장 드라마 속의 장인어른처럼 말이다.
규연의 서재로 우다다, 뛰어 들어간 나루가 빈 종이와 펜 하나를 들고나왔다. 식탁 위에 종이를 올려둔 나루는 의자를 야무지게 끌어 앉아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1. 열심히 일하기
2. 규연이네 형한테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진 보내기
3. 옆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아내기
나루의 목표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새겨졌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목표일지도 모르지만, 나루에게는 중요한 인생 첫 목표였다.
덜컥.
한참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데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따로 일을 보러 나갔던 규연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루는 종이를 잽싸게 접어 제 주머니에 넣어두고 신발장까지 뛰쳐나갔다.
“규연아!”
“옆길로 안 새고 잘 와 있었네.”
“당연하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한 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마치고 온 규연은 낮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을 겪기라도 한 건지 눈 밑이 퀭한 것도 같았다.
나루는 규연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상태를 살폈다.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이 축 늘어져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욕실로 향한 규연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나루는 보던 TV를 꺼두고 욕실 앞에서 규연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 깜짝이야, 왜 여기 서 있어.”
“안 좋은 일 있어?”
“안 좋은 일은 아니고, 귀찮은 일.”
“뭔데?”
나루가 끈질기게 쫓아오자 옷을 갈아입으려던 규연이 하던 행동을 멈췄다. 나루는 마저 갈아입으라는 듯 규연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맨살 위에 닿는 손가락의 느낌이 유독 간질거렸다.
상의 먼저 갈아입은 규연이 나루의 어깨를 붙잡아 드레스룸 밖으로 쫓아냈다. 아쉬워하며 나온 나루는 쉬지 않고 질문을 던져댔다. 귀찮은 일이 뭐였는지, 누가 괴롭힌 건 아닌지, 하나하나 물어보는 집착이 대단했다.
“직원 한 명이 그만둔다고 해서.”
“누구?”
“정도민.”
“……오.”
이거 아주 좋은 소식인데? 귀찮은 일이 아니었잖아?
규연에게는 귀찮은 일이었지만, 나루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도민이 그만둔다니. 뜬금없는 희소식에 들뜬 나루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규연은 헤실거리는 나루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걱정스럽게 물어볼 땐 언제고 듣고 나니 방실거리며 웃는 게 어이없었다.
도민은 어째서 그만두겠다고 말한 걸까. 나루는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눴던 그때, 도민은 제 목적을 솔직히 밝혔고 화난 나루가 경고를 남겼었다. 그래도 나름 같은 수인이라 반가웠는데 떠난다니 조금 아쉬웠다.
“그럼 내일 안 나와?”
“이번 달까지만 하겠대서 급하게 면접 보고 왔어.”
“면접?”
“사람 새로 뽑았다고.”
이제야 규연이 피곤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일을 마친 뒤 면접까지 보고 와서 기가 빨린 듯했다. 나루는 새로 올 직원이 누구일지 궁금해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건 항상 무서우면서도 설렜다.
“누군데?”
“말하면 아냐. 이름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얼굴 아는 애라 적당히 뽑았어.”
“그렇구나…….”
규연이 말을 하면 할수록 나루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이름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또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 몇 달 동안 붙어 지냈지만, 규연과 이런 관계로 지내는 사람을 본 적이 드물었다.
아무렴 어때. 착한 사람이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나루가 여유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타이밍에 도민이 제 발로 나가 주다니,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송나루, 기분 좋아? 갑자기 웬 콧노래야.”
“응, 기분 좋아.”
“왜.”
“그냥, 다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야!”
다 잘 풀릴 거 같은 느낌. 딱 이런 기분이었다.
나루는 설렘에 부푼 마음을 껴안고 집 안을 정신 없이 돌아다녔다. 앞날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예감이 좋았다.
* * *
출근길에 맞는 아침 바람이 전보다 더 차가워졌다. 어느덧 나루가 일을 시작한 후, 3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고작 몇 주 지났을 뿐인데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떨어져 가는 게 신기했다. 슬슬 겨울이 오려는가 보다.
딸랑.
경쾌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나루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카운터에 서 있던 서연이 똑같이 손을 흔들어 줬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던 도민은 두 사람을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루는 익숙하게 일할 준비를 마쳤다. 앞치마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연갈색의 베레모까지 쓰고 나니 때맞춰서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나루 씨, 이거 진열 좀 해줄래요?”
“넵.”
서연이 갓 나온 디저트들을 진열해 달라며 웃었다. 나루는 커다란 쟁반을 들고 옮기며 디저트를 예쁘게 진열했다. 조개 모양의 마들렌들을 열 맞춰 놓으니 더 앙증맞아 보이는 게 귀여웠다.
만족 만족.
진열을 마친 나루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아직 사진 찍는 스킬이 좋지 않아서 조명이 마구 번져 나왔지만 뿌듯한 마음은 변함없었다.
[저 오늘 디저트 진열 열심히 했어요! 이거는 레몬 마들렌이에요.]
[(사진)]
찍은 사진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송됐다. 핸드폰 화면 상단에는 ‘유규성’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지난 3주간 나루는 규성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사진을 전송했다. 하루는 깨끗하게 닦은 유리창을, 또 하루는 반듯하게 자른 바게트 사진을, 채팅방 스크롤을 올릴 때마다 다양한 사진이 주르륵 떠올랐다.
규성에게 인정받겠다는 목표는 허투루 세운 게 아니었다. 나루는 성실하게 메시지를 보냈고, 2주 째에는 처음으로 답장까지 받았다.
[오늘도 열심히 해요.]
오늘 역시 답장이 도착했다. 규성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 사진을 받았을 땐 그저 황당해하는 듯하더니,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이제는 저를 밉지 않게 봐주었다.
“송나루, 또 핸드폰 만지지.”
“아이쿠야.”
물론 규연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요즘 들어 핸드폰에 집착하는 나루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궁금해서 좀 보려고 하면 잽싸게 화면을 가리질 않나, 가끔은 아예 핸드폰을 숨겨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니 화가 안 날 수가 있나.
테이블에 앉아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규연이 나루의 팔을 붙잡았다. 나루는 1초 만에 화면을 꺼버리고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내가 일할 때는 핸드폰 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급한 거여서.”
“네가 급할 게 뭐 있어. 보여줘 봐.”
“싫어, 유규연. 이거 내 후라이바시야.”
“프라이버시겠지. 핸드폰 안 내놔?”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말대꾸 하나는 또 잘했다. 주워 들은 거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 뉘앙스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따라 한다. 덕분에 규연의 속은 오늘도 김밥 옆구리 터지듯 터져 버렸다.
한 번 경고하고 넘긴 규연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나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오늘은 도민이 일하는 마지막 날이라 평소보다 더 바빴다.
마들렌 진열하기 다음은 수플레 만들기였다. 주방에서 수플레를 구워 보내면 나루는 갖가지 과일들을 썰어 토핑하고 시럽과 슈가 파우더를 뿌려야 했다. 일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어서 이런 것쯤은 껌이었다.
“나루 씨, 이거 토핑.”
“네!”
포실포실하고 통통한 수플레가 흰 접시에 담겨 나왔다. 토핑 시간은 나루에게 고역이었다. 일 자체는 쉬웠으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참는 게 꽤 어려웠다.
입맛을 다신 나루가 눈을 질끈 감고 시럽과 슈가 파우더를 뿌렸다. 다음으로는 바나나와 딸기를 예쁘게 썰어 군데군데 놓아 주었다.
찰칵.
오늘따라 잘 만들어진 수플레를 보며 뿌듯하게 미소 짓던 나루가 사진을 찍었다. 이건 무조건 규성에게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방금 숲플래 만들었어요. 저는 여기서 바나나 뿌렸어요.]
[(사진)]
규연의 눈을 피해 메시지를 보내느라 내용이 엉망진창이었다. 손님에게 직접 서빙까지 마치고 온 나루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럽이랑 슈가 파우더도 뿌렸음.]
“어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나루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뿌듯하게 전송 버튼을 눌렀는데 핸드폰이 손에서 쏙 빠져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다급하게 뒤돌아본 나루는 규연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눈을 매섭게 뜬 규연은 빼앗은 핸드폰 화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홀드키를 못 눌러서 채팅방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데 큰일이었다. 나루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규연의 큰 키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줘!”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뭐야, 이게 다 무슨.”
“…….”
“유규성? 이거 형 번호잖아.”
규연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스크롤을 올리면 올릴수록 표정이 점점 험악하게 변해가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3주 동안 들키지 않고 잘해 왔는데!
나루가 규연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한참 동안 채팅방을 살펴보던 규연은 누가 봐도 황당한 말투로 물었다.
“네가 왜 우리 형이랑 메시지를 주고받아……?”
“나 지금 잘 보여야 하거든.”
나루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 괜히 거짓말을 했다가 규연의 화를 살까 봐 바른대로 털어놓은 거였다. 나루의 솔직한 대답을 들은 규연은 못 말린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와, 미친 송나루. 여태껏 내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고?
“잘 보이긴 누구한테 잘 보여. 나한테나 잘 보여라, 어?”
“씨…….”
“당분간 핸드폰 압수야.”
“유규연 짜증 나. 내 핸드폰인데…….”
결국, 나루의 핸드폰은 규연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심통이 난 눈으로 규연을 노려보던 나루는 일부러 발을 세게 구르며 삐친 티를 냈다. 보통 이렇게 하면 규연이 원하는 바를 곧잘 들어주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규연이 절대 돌려주지 않겠다는 태도로 핸드폰을 제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나루의 표정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딸랑.
그때, 누군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