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30)


[오늘 일 늦게 끝날 것 같아. 바로 집으로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집 가는 길 알지. 헷갈리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

[(사진)]

일이 늦게 끝날 것 같다며 메시지를 보낸 규연이 집까지 가는 지도를 캡처해 보내주었다. 세 시 즈음에 규성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메시지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양심이 콕콕 쑤시는 게 못된 짓을 벌이는 아이 같았다.

[응!]

간단히 답장을 보낸 나루가 벽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두 시 반. 일이 끝나려면 삼십 분 정도 남았다. 늦어도 세 시 반에 규성에게 연락이 온다고 치면, 으음…….

최대 네 시 반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들어가면 시간이 딱 괜찮을 것 같았다.

나루는 완전 범죄를 꿈꾸며 규연에게 다시 메시지를 전송했다.

[몇시에와??]

[한 여섯 시.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들어가라.]

규연은 꼭 이럴 때만 눈치가 빨랐다. 아무튼 여섯 시에 도착한다니 그전에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루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일을 재개했다.

“나루 씨, 수고했어요. 내일은 도민 씨도 오니까 일이 좀 수월할 거예요.”

“아, 네에.”

“그럼 내일 또 봐요!”

삼십 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갈 수 있는 시간이었던가. 손님 대여섯 명을 응대했을 뿐인데 어느덧 퇴근 시간이었다. 서연은 세 시가 되자마자 수고했다며 칼퇴근을 시켜 주었다. 본인은 가끔 더 남아서 일할 때도 있으면서, 나루만큼은 일찍 보내주려는 마음씨가 따사로웠다.

도민이라는 이름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나루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지금은 도민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유니폼으로 입었던 앞치마와 베레모를 정리하고 나오니 십여 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나루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그사이에 도착한 연락을 확인했다.

[유규성입니다. 3시 20분까지 카페 앞으로 갈게요.]

규성의 메시지가 세 시 정각에 도착해 있었다. 딱 봐도 빈틈없는 성격인 듯한데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칼 같은 게 신기했다. 나루는 시간을 확인하고 카페 앞에 멀뚱히 서서 규성을 기다렸다.

그런데 나랑 무슨 얘기를 하려고 부르는 거지.

나루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뒤늦게 깨달았다. 거의 초면이라 할 말도 없을 텐데 굳이 얘기 좀 하자고 불러내는 게 의심스러웠다. 둘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규연과 관련된 이야기뿐이었다.

나루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혹시라도 규성이 제게 해코지를 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카운터 앞에서 잠깐 대화를 나눴을 땐 꽤 정중해 보였는데, 설마 태도를 확 바꾸지는 않겠지. 최근에 막장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지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었다.

“미리 나와 있었네요. 일단 자리를 좀 옮기죠.”

“어, 네.”

“아, 이름이 뭡니까.”

“…송나루요.”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한 규성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자연스레 자리를 옮기자며 나루를 이끌었다. 와중에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송나루, 송나루. 두어 번 이름을 곱씹어 보던 규성이 조수석 문을 대신 열어 주었다. 얼떨결에 차까지 얻어 탄 나루는 신기한 눈으로 내부를 둘러봤다. 시트도 폭신하고 깔끔한 게 규연의 차와 비슷했다.

규성은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게 5분 정도를 달렸을까. 얼마 가지 않아 차가 멈춰 섰다. 창문 밖으로 익숙한 거리를 구경하던 나루는 어리둥절하게 내려 눈앞의 카페를 바라봤다.

이전에 규연이 핸드폰을 줬을 때,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던 그 카페였다. 규성은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음료를 주문했다.

“뭐 먹을래요.”

“어, 저는, 그냥 같은 걸로…….”

소심하게 대답한 나루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였다. 규성은 양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돌아와 나루 쪽으로 유리컵 하나를 밀어주었다.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새카만 커피. 조심스레 빨대를 문 나루가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늘 달달한 음료만 마시다가 커피를 마시려니 써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우리 저번에도 한 번 마주쳤었죠. 규연이 집에서.”

“아, 네.”

“그 녀석이 원래 아무나 집에 들이지 않는데, 많이 놀랐습니다. 워낙 귀하게 컸거든요.”

음료에 손도 대지 않던 규성이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많이 바빠 보였다.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며 입을 연 규성은 은근슬쩍 가시 담긴 말을 내뱉었다. ‘아무나’ 집에 들이지 않는다거나, 워낙 귀하게 컸다는 등 눈치를 주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나루는 이런 쪽으로 둔했다. 돌려 말하는 것보다, 직설적으로 말해야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번에도 규성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나루의 태연한 얼굴에 잠시 뜸을 들이던 규성은 단번에 성격을 파악해 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못 알아듣는 거 같으니 직설적으로 말할게요. 규연이 옆에서 적당히 있다가 비켜 줬으면 합니다.”

“…네? 왜요?”

“내 생각에 당신은 규연이와 맞지 않는 것 같거든요.”

또 이 소리였다. 나루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넌 유규연과 맞지 않는다.’라는 말을 내뱉곤 했다. 규성도 마찬가지였다. 규연과 맞지 않으니 적당히 있다가 비켜 달라는 말을 당당히 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어쨌든 나루를 깔보고 있는 거였다. 나루가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이 정도 눈치는 있는데 상처 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이 미웠다.

규성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웅크려 있던 나루가 어깨를 반듯이 펴고 앉았다. 자신을 깔보는 사람에게 굳이 저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었다.

“저를 어떻게 보신 거예요?”

“직업도 마땅치 않고, 가정사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

규연이네 가족들은 다 규연이처럼 싸가지가 없는 걸까.

진지하게 생각하던 나루가 표정을 싸하게 굳혔다. 여태 생각 없이 놀긴 했지만 일도 시작했고, 가정사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이런 부분을 콕 집어 얘기하는 규성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그때, 나루의 머릿속에 규연이 해주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원래 인생은 바보처럼 살면 손해 보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싸가지 없게 굴더라도, 남한테 절대 쉽게 보이지 마라. 한마디로 바보처럼 살지 말라는 말.

순간 나루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규연의 말이 맞았다. 괜히 바보처럼 굴었다가 남한테 쉽게 보여서 손해나 보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요, 가정사 안 좋은 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저희 엄마랑 형제들을 다 사고로 잃었는데, 이거 제가 잘못한 건가요…?”

차분하지만 일정한 톤이었다. 나루의 말에 침묵하던 규성은 미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일도 구했고, 나중에는 더 큰 곳으로 가서 일할 거예요.”

나루는 계속해서 제 이야기를 이어갔다. 거짓 하나 없이 내뱉어진 말들이 규성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아무도 저한테 기회를 주지 않았는데, 규연이 한 사람만 유일하게 손 내밀어 줬어요. 저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그래서, 절대 못 떨어지겠어요.”

“…….”

“그러니까, 적당히 있다가 안 비킬 거라고요. 평생 같이 있을 거예요.”

한층 단단해진 목소리가 굳건해 보였다. 나루는 규연의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어중간하게 굴려서 얘기했다가 오해 살 일을 미리 피하는 거였다. 규연이 이 상황을 봤다면 잘했다며 뿌듯해했을지도 모른다.

규성은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몇 분 전까지 소심하게 굴던 나루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하게 얘기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만만하게만 봤는데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난 내 동생이 걱정돼서 그래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지만, 마음을 바꿔 줬으면 좋겠는데.”

“그, 죄송하지만 싫은데…….”

“…….”

“저도 동생이 있어 봐서 그 심정은 알아요. 그래도 저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까 밉게 보지 마세요.”

나루가 규성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아까부터 규성이 반존대를 사용하는 게 느껴져서 본인도 똑같이 말끝을 잘라먹어 줬다. 규성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 나루의 기가 생각보다 세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깔끔히 마무리한 나루는 규성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더 앉아 있다가는 상처만 받을 것 같아서 일찍이 자리를 뜨려는 모양이었다.

나루가 의자를 끌고 일어서자 규성이 황급히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같은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정말 마음 바꿀 생각 없어요?”

“네, 없어요!”

해맑은 대답에 규성이 한 걸음 물러났다. 일단 지금은 물러서고 보는 게 좋을 듯했다.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하는 나루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던 규성은 이만 가 봐도 좋다며 손을 휘저었다.

뭐, 일단은 잘 넘긴 건가?

규성의 허망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나루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혼자서 어떻게 상황을 잘 넘기긴 했지만, 오늘 일은 규연에게 평생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카페 유리창으로 나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규성은 기가 차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규연이 늘 재미없는 인간들만 골라 사귄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상대가 꽤 흥미로워 보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루는 방 안을 샅샅이 뒤지며 규연을 찾았다. 다행히 늦지 않은 건지 집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씻고 나와서 홀로 규연을 기다리던 나루는 적적함에 TV를 틀었다.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던 나루는 재방송되고 있는 아침 드라마에 꽂혀 눈을 반짝였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드라마였지만 나루에게는 이 흔하고 재미없는 내용이 유용하게 다가왔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제가 이만큼 성장했다는 걸 보여드리려고 왔습니다. 제발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드라마 속의 남자는 여주인공의 아버지를 찾아가 준비해 온 서류들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따님을 달라며 무릎까지 꿇었다. 

마음이 통한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게 저렇게 어려운 일인 건가. 애초에 가족들이 반대하는 것 자체가 이해 안 돼. 그래도 저 사람은 여주인공의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한 거구나…….

가만히 생각해 보던 나루가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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