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30)


규연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배신당했다는 눈빛은 덤이었다. 나루의 요망한 행동에 제대로 당한 그는 애써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 두 사람의 아기자기한 감정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사람은 서연뿐이었다. 저번부터 둘 사이가 심상치 않더라니, 안 보던 사이에 전세가 역전된 것 같아 재미있었다. 더구나, 규연이 당하는 모습은 보기 드물었기 때문이다.

“잡담하지 말고 가서 일해.”

“네에.”

굳어진 목소리에 키득거리던 나루가 일부러 얄밉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서연은 이때다 싶어 나루에게 동참하며 규연을 놀려댔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일을 배우다 보니 어느덧 오픈 시간이었다. 서연은 손님 응대가 처음인 나루를 토닥여 주며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응원까지 해주었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규연은 꼴값을 떤다며 콧방귀를 꼈다.

딸랑, 작은 종소리가 들리고 카페 문이 열렸다. 첫 손님은 아침마다 빵을 사 가는 단골이었다.

“어서 오세요, 카페 데스티니입니다. 어, 오늘은 크루아상이 갓 나와서 맛있어요.”

“그래요? 그나저나 못 보던 얼굴이 있네. 참하게도 생겼다.”

“저희 새 직원이에요. 진짜 귀엽게 생기셨죠?”

손님과 익숙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서연이 자연스레 나루를 소개했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성은 뽀얀 나루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참하게 생겼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칭찬을 듣는 건 기쁜 일이었다. 나루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빼먹지 않았다.

이 손님을 시작으로 들어오는 사람마다 모두 나루를 한 번씩 힐끔거리고 지나쳤다. 어느 카페에서는 일부러 잘생긴 알바생을 뽑는다던데, 이런 광경을 보니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루의 예쁘장한 외모 덕분에 오늘따라 손님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게다가 사장인 규연까지 버티고 있으니 매장 분위기가 한층 더 밝아졌다.

“저, 오빠. 언제 언제 일하시는 거예요?”

소문은 언제나 빠르게 퍼져나갔다. 근처 학교에 나루에 대한 소문이 벌써 퍼졌는지 오후가 되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다 기어코 누구 한 명이 나루에게 말을 걸고 말았다.

익숙하지 않은 ‘오빠’라는 호칭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나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 사람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낯선 얼굴이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얼굴을 붉히던 학생은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옆에서 빵을 포장하던 서연은 나루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고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나루 씨 인기 많네요.”

“아, 그런 거 아닌데…….”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던 나루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포장을 기다리며 나루에게 질문을 던진 학생은 어서 답이 돌아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결국, 나루는 솔직하게 제 스케줄을 읊어 주었다.

“저,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 오후에 일하는,”

“너 잠깐 이리 와 봐.”

“어……?”

나긋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무참히 끊겨 버렸다. 어느새 나루의 앞까지 다가온 규연은 팔을 붙잡고 무작정 자리를 옮겼다. 얼떨결에 끌려 나온 나루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규연을 쳐다볼 뿐, 무어라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규연은 끝내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먼저 공과 사를 확실히 하자고 한 건 규연인데, 본인이 제일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꼴이었다.

“저런 말에 일일이 답해 주지 마.”

“난 그냥 물어봐서 대답해 준 건데.”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누가 번호 달라고 해도 절대 주지 마. 알겠어?”

“…….”

“왜 대답을 안 해.”

그래, 사장으로서 이 정도 충고는 할 수 있지.

멋대로 생각한 규연이 나루를 붙잡아 두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충고는 무슨, 내뱉는 말마다 질투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루는 대답 대신 침묵을 유지했다. 언제는 사장님처럼 대하라더니, 자꾸 사심을 담아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하는 게 짜증 났다.

유규연 어이없어. 사적인 거 금지랬으면서, 자기는 하고, 나는 못 하게 하고.

나루의 유순한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화난 눈썹은 삐죽 올라가고, 동그란 눈이 앙칼지게 뜨였다. 어디 이것뿐일까. 야무지게 말아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리기까지 했다.

“송나루, 대답해.”

“유규연 개짜증.”

“개, 뭐……?”

“개짜증 나. 개새끼.”

“…….”

요새 조용하다 싶더니, 방심한 사이에 또 당했다. 개짜증에 이어 졸지에 개새끼까지 된 규연이 황당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이런 욕은 또 어디서 배운 건지, 쓸데없는 부분에서 습득력이 좋은 나루가 원망스러웠다.

퍽!

“아윽, 야, 송나루, 너 미쳤어……?”

욕설로 끝이 아니었다. 가만히 서서 씩씩거리던 나루가 대뜸 규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힘 조절 따위는 하지 않았다. 욕먹은 걸로도 모자라 정강이까지 맞은 규연은 아예 넋이 빠진 상태였다.

규연이 넋을 놓거나 말거나, 나루는 제 감정이 제일 중요했다. 안아달라고 해도 안 안아주고, 규연이를 규연이라고도 못 부르게 하면서, 자기는 질투를 해? 아주 괘씸했다.

“나 이제 사장 말 안 들어.”

“이게 진짜…….”

“유규연 삐, 사장 탈락. 약속한 말 안 지켰어.”

“…….”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효과음과 대사를 그대로 따라 한 나루가 팔로 엑스자를 그렸다. 단단히 화났다는 표정이 귀여우면서도 단호했다.

규연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휙, 뒤돌아선 나루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건 뭐,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고 복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카운터로 돌아온 나루는 곧바로 서연을 도와 디저트를 포장했다. 이전보다 움직이는 게 더 가볍고 발랄해 보였다. 손님의 눈치를 살피며 디저트를 포장하던 서연은 나루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대화 잘 하고 왔어요?”

“네, 퇴치했어요.”

“푸흡, 퇴치…….”

퇴치라는 단어에 웃음보가 터진 서연이 막 들어오고 있는 규연을 힐끔거렸다. 나루는 규연의 시선을 외면해 버리고 일에 집중했다. 새침떼기 같은 표정이 압도적이었다.

나루의 돌발 욕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규연이 이마를 짚으며 앉아 있던 테이블을 정리했다. 나루가 적응하지 못할까 봐 일부러 매장에 앉아 있던 거였는데, 이 정도면 적응하고도 남은 것 같았다.

다이어리를 펼쳐 일정을 확인하던 규연이 카운터를 두어 번 두드렸다. 똑똑, 소리에 고개를 든 서연과 나루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채 규연을 쳐다보았다.

“나 잠깐 다른 일 좀 하고 올 테니까 매장 잘 보고 있어.”

“네, 다녀오세요.”

“하, 송나루 씨는 대답 안 해요?”

“네에, 그러든가요.”

저 망할 버르장머리 진짜. 송나루 저걸 어떻게 하지. 가면 갈수록 아주…….

순순히 대답하는 서연과 달리 나루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규연이 일부러 존댓말까지 써 가며 대답을 강요하자 그제야 건방진 대답을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질 뻔한 서연은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슬픈 생각을 반복했다.

체념한 시선으로 나루를 한 번 쳐다본 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간단한 짐을 챙겨 카페를 벗어났다. 서연은 나가는 규연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나루 씨, 잠깐 카운터 좀 보고 있을래요? 저 홀 좀 둘러보고 올게요.”

“아, 네!”

행주 하나와 소독제를 챙긴 서연이 나루에게 카운터를 맡긴 채 홀로 나왔다. 아무래도 돌아다니며 테이블을 닦을 모양새였다. 힘차게 대답한 나루는 카운터 앞에 서서 눈을 똘망똘망 뜨고 있었다.

서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새로 온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가만히 있기 민망해서 괜히 포스기를 만져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타이밍 좋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손님을 향해 밝게 인사를 건네던 나루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헉, 소리를 내며 놀랐다. 막 들어온 손님은 진열대를 둘러보지 않고, 곧장 카운터로 다가왔다.

나루보다 두 뼘이나 큰 키에 규연과 오묘하게 닮아 잘생긴 얼굴. 거기다 잘 차려입은 수트까지. 낯설지 않은 손님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규연의 형, 규성이었다.

하필이면 규연이 없을 시간에 규성이 방문할 게 뭐람. 당황한 나루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규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였다.

카운터로 다가오던 규성은 마찬가지로 낯설지만 익숙한 나루의 얼굴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나루는 계속해서 당황하고 있었으나 규성은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쪽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어, 저,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어서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못 보던 얼굴인데…….”

나루는 소심하지만 당당한 태도로 이곳의 직원임을 밝혔다. 규성은 눈치도 빠르고 눈썰미도 좋았다. 분명 저번에 들렀을 때까지만 해도 직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직원이라며 카운터에 서 있는 나루가 의심스럽다는 듯 뜸을 들였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규성은 오히려 잘됐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규연이 친형 유규성입니다. 잠깐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요?”

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던 규성이 나루에게 시간을 내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횡설수설하던 나루는 홀에서 열심히 테이블을 닦고 있는 서연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카운터에 있어야 해서 안 돼요.”

“배려가 부족했네요. 그럼 번호부터 교환하고 이후에 약속을 잡죠.”

“어, 네…….”

번호를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규연의 목소리가 나루의 머릿속에 윙윙 울렸다. 잠시 고민하던 나루는 규성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아 제 번호를 찍어 주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규연의 친형인데 번호를 안 주기가 참 애매했다.

나루의 번호로 전화 한 통을 건 규성이 저장하라는 말을 남기고 핸드폰을 품에 집어넣었다. 얼떨결에 규성의 번호를 저장한 나루는 땀범벅이 된 손바닥을 앞치마에 몰래 문질러 닦았다.

“일 언제 끝납니까.”

“그, 세 시에 끝나요.”

“그럼 그때 문자로 장소 적어 보낼게요. 이따 봅시다.”

규연을 보러 와서 뜻밖의 수확을 건진 규성이 미련 없이 뒤돌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나루는 뒤늦게서야 정신을 되찾았다.

지잉.

나루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나루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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