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의 몸은 어느새 돌처럼 굳어 있었다. 방금까지는 출근할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막상 규연과 떨어져야 한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부터 들었다.
규연은 제 등에 매달린 나루를 자연스레 떼어내고 아침을 준비하기 바빴다. 규연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서운해진 나루는 시무룩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바쁜 뒷모습을 구경했다.
규연이는 나랑 모르는 사람처럼 있어도 괜찮은가 봐.
포크를 짓씹던 나루가 김빠진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은 다시 원상태로 가라앉아 있었다.
“멍하게 있지 말고 먹어.”
“그러든가…….”
“뭐가 그러든가야.”
최근에 TV에서 배운 말을 써먹은 나루가 깨작거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대놓고 아쉽다는 티를 내는 게 얼마나 웃기던지, 규연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아침 식사를 마쳤다.
시간은 꼭 이럴 때만 빠르게 흘러갔다. 식사를 끝내고 뒷정리까지 깔끔히 한 규연은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던 나루는 드레스룸에서 나온 규연을 발견하고 입을 떡 벌렸다.
늘 캐주얼한 재킷만 입고 다니던 규연이 오늘은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나루는 곧바로 뛰쳐나와 규연의 몸을 세세히 훑어보았다. 큰 키에 다부진 몸매를 가져서 그런지 코트 핏이 꽤 좋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출근하게 나와.”
“나, 나 안아주면 안 돼?”
“아침부터 또 왜 이래. 뭐에 꽂힌 거야.”
“한 번만 안아줘, 한 번만, 으억…….”
흑심을 품은 나루가 한 번만 안아달라며 달려들자 규연이 가볍게 이마를 밀쳐냈다. 좋아하는 마음은 있으면서, 들러붙을 때마다 밀어내는 건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아침부터 밀당 스킬에 당한 나루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규연의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운전석에 앉던 규연이 자연스레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사적인 발언 금지.”
“조금도 안 돼?”
“어, 안 돼.”
“둘만 있을 때는?”
“안 돼.”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충고한 규연이 단호하게 사적인 감정을 잘라냈다. 아직 카페에 도착하기 전인데 벌써 선을 긋는 게 서운할 만도 했다. 나루는 미련이 남은 눈으로 규연을 한참 쳐다보다가 고개를 훽 돌려 버렸다.
“그러든가.”
한때는 ‘어쩌라고’를 습관처럼 쓰더니, 이제는 ‘그러든가’로 갈아탄 모양이었다. 제법 앙칼진 말투였으나 나루가 사용하니 작은 투정같이 느껴졌다.
조수석을 힐끔거리며 운전하던 규연은 이번에도 소리 없이 웃음을 삼켰다. 창문에 비친 나루의 얼굴이 꼭 심통 난 강아지 같아서 귀여웠기 때문이다.
“친한 척도 못 하게 할 거면서 옷은 왜 멋있게 입고 나오는 거야…….”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대놓고 중얼거리던 나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뗐다. 뜻밖의 웃음 참기 챌린지를 하며 운전을 하던 규연은 카페 앞에 차를 세우고 나루를 먼저 내려 주었다.
카페 데스티니.
늘 규연을 따라오던 곳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분위기가 조금 색달라 보였다. 카페 앞에서 간판을 한참 바라보던 나루는 문을 힘껏 열고 발을 딛었다.
딸랑, 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달콤한 디저트 향이 나루를 반겼다. 오늘 오픈은 규연이 한다고 해서 사람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파티시에들이 벌써 출근해 디저트를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침 갓 구워진 크로와상을 오븐에서 빼내던 정수가 나루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 왔어요?”
“안녕하세요…….”
소심하게 인사를 한 나루가 눈동자를 굴리며 주방을 훔쳐봤다. 안에는 정수를 비롯한 세 명의 파티시에들이 있었는데 다들 디저트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카페는 아침 일찍부터 바쁘구나.
나루가 텅 빈 진열대를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을 때 즈음, 주차를 마치고 온 규연이 카페 문을 열었다. 직원들과 익숙하게 아침 인사를 나눈 그는 오픈 준비를 시작하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카운터를 세팅하고, 꺼져 있던 매장 안의 조명들을 환하게 켜고, 진열대를 쭉 돌며 자잘한 것들까지 완벽히 정리하는 모습이 프로다웠다.
나루는 규연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오픈 준비하는 걸 도왔다. 그래 봤자 테이블을 닦는 게 전부였지만, 깨끗해진 매장에 뿌듯함까지 느꼈다.
삼십 분 동안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오픈 준비를 마친 규연은 계약서 두 장을 들고 돌아왔다. 어느새 정수에게 아이스티 한 잔을 받은 나루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빨대를 쪽쪽 흡입하고 있었다.
“근무 시간은 아홉 시부터 세 시. 처음이니까 오전 조부터 맡아.”
“이 시간에 규연이도 있어?”
“사장님.”
“이 시간에 사장도 있어?”
“…….”
계약서에 적힌 조항들을 간단히 설명하던 규연이 가장 중요한 부분에 형광펜을 칠했다. 나루는 궁금한 점을 곧바로 물어봤다. 근무 시간이 어쨌든, 규연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건지가 제일 중요했나 보다.
익숙한 호칭에 미간을 좁히던 규연이 호칭을 바로잡아 줬다. 계약서를 쓰는 상황이기도 하니 지금부터는 유규연이 아닌 사장이어야만 했다. 나루는 굳이 사장님에서 ‘님’ 자를 빼먹고 다시 질문을 내던졌다. 덕분에 규연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떤 직원이 대놓고 사장이라는 호칭을 막 부르며 거만을 떨까.
시작부터 반쯤 포기한 규연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러자 나루가 만족했다는 듯 손뼉을 쳤다. 참 단순한 행동이었다.
“여기에 네 정보 적고, 여기에는 사인 해.”
“주, 민등, 록, 번호…….”
펜을 야무지게 쥔 나루가 주민등록번호를 적는 칸에서 망설였다. 분명 아기 때 엄마가 외워 두라며 무슨 번호들을 일러준 기억은 있는데, 애를 써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루의 머릿속에 정확히 기억된 번호는 팔려 가기 직전에 받았던 구분 번호가 다였다.
D14-00
앞번호는 수인의 등급과 들어온 순서대로 부여된 숫자였고, 뒷번호는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체크하는 용도의 숫자였다.
나루가 이상한 숫자를 적어 넣자 종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규연이 펜을 뺏어 들었다. 주민등록번호를 적으라니까 웬 출처 모를 번호를 적는 게 이상해서였다.
“주민등록번호 적으라니까 뭘 적고 있는 거야.”
“이거, 내 번호. 잡혀갔을 때 거기서 나한테 준 번호랬는데.”
“…….”
“아니야?”
“됐어. 그냥 사인이나 해.”
잡혀갔을 때 준 번호. 나루가 장난치는 줄로만 알고 신경질을 내려던 규연이 입을 꼭 다물었다. 그는 사인이나 하라며 펜을 다시 쥐여주고는 서명란을 손가락으로 콕 집어 주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나루는 불법체류자가 되는 건데, 문제가 컸다. 속으로 고민하던 규연은 조만간 작은 형이나 친한 비서 형에게 부탁해 나루의 신분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결정 내렸다.
빽빽하게 적힌 글씨들을 빠짐없이 확인한 나루는 서명란에서 펜을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사인이라니, 여태까지 사인 같은 걸 만들어 본 적이 없는데 하려니까 왠지 민망스러웠다.
결국, 나루는 사인 대신 제 이름 석 자를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피식, 하고 바람 새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을 흘린 건 다름 아닌 규연이었다.
‘송 나 루’
동글동글하면서도 마구 날아가는 글씨체가 딱 나루다웠다. 계약서 한 장을 나루에게 보관하라고 넘긴 규연은 남은 계약서를 카운터 밑 서랍에 고이 넣어 두었다.
“신입 교육 담당은 서연 씨가 하는데, 아직 출근 안 했으니까 그전까지 내가 알려줄게.”
“규연이 최고.”
“사장님.”
“사장 최고.”
얘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루를 쳐다보던 규연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까부터 자꾸 사장, 사장, 하며 건방진 호칭을 사용하는 게 거슬렸는데 막상 저 해맑은 얼굴을 보니 쓴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루를 끌고 카운터로 온 규연은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부터 알려주었다. 아직 일에 익숙하지 않은 나루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디저트는 이 상자에 포장하고, 계산은 이렇게.”
카운터에서 하는 일이 제일 쉽다고 생각했는데 은근 할 일이 많아서 복잡스러웠다. 나루는 규연이 알려주는 사항들을 모두 머릿속에 꼼꼼히 입력하고 실수하지 않도록 여러 번 생각했다.
규연은 진지한 나루의 모습에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사고나 칠 줄 알았더니, 알려주는 걸 찰떡같이 기억하고 쉽게 해내는 게 대단했다.
“이 정도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나 잘하지?”
“존댓말 써.”
“…….”
다 좋은데 딱 하나, 사장에게 반말 까는 태도만큼은 고쳐지지 않았다.
나루의 코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린 규연이 존댓말을 쓰라며 혼냈다. 다른 직원이었으면 이미 규연에게 욕을 들어먹었겠지만, 나루라서 이렇게 넘어가는 거였다. 서연이 봤다면 오두방정을 떨 만한 광경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이게 무슨 상황이래요?”
“마침 왔네.”
타이밍 좋게 서연이 등장했다. 입을 틀어막고 두 사람을 쳐다보던 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딱 보아하니 규연이 나루에게 무언가 일을 알려주고 있는 듯한데…….
“헐 설마, 나루 씨도 여기에서 일하는 거예요?”
“잘 좀 알려줘. 기본적인 건 내가 가르쳐 놨으니까 세부적인 것만 알려주면 될 거야.”
“어머, 유니폼 너무 잘 어울린다. 앞치마 리본 뭐야, 큐티해…….”
규연의 말을 보기 좋게 씹어 버린 서연이 호다닥, 달려와 나루의 유니폼 차림을 칭찬했다. 아이보리색의 앞치마에 끈까지 예쁜 리본으로 묶어 놔서 어찌나 귀엽던지, 서연은 정신을 못 차리고 나루를 구경하기 바빴다.
철저히 소외당한 규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연을 떼어 놓았다.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는데, 둘이 사이 좋게 붙어있는 모습을 보니 묘하게 심기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당황해서 가만히 서 있던 나루는 규연의 표정을 슬쩍 스캔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카페에서는 유규연이 아닌 사장님이라고 했으면서, 서연에게 질투하는 모습이 모순적이었다.
“저 이거 봐요, 모자도 썼어요.”
“어머, 어머, 나루 씨. 베레모 쓴 거 너무 귀여워요. 사진 찍어도 돼요?”
“네에.”
연갈색 베레모를 보며 연달아 손뼉을 치던 서연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나루는 해맑게 웃으며 카메라를 쳐다봐 주었다. 팬 서비스 하는 아이돌처럼 말이다.
그 능청스러운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규연이 헛웃음을 쳤다. 그는 나루의 팔을 확 붙잡아 끌었다. 더 이상 서연과 붙어있지 말라는 무언가의 신호였다.
방금까지 고분고분하게 굴던 나루는 잡힌 손을 매정하게 쳐내 버렸다. 찰싹, 하고 손이 내쳐지자 규연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여기서는 규연이 아니고 사장님이잖아요. 사장님.”
매정한 태도와 달리 헤실헤실 웃음을 걸치고 있던 나루는 얄미운 말을 내뱉어 규연의 속을 죄다 뒤집어 놓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