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입은 왜,”
“고마워.”
대뜸 입을 맞추더니 이번에는 고맙다는 감사 인사였다. 규연은 나루의 뜬금없는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비록 지금은 사이가 좋아졌지만, 처음에는 납치당해 와서 많이 당황스러웠을 텐데 뒤늦게라도 원망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규연이 벌인 짓은 나루의 전 주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나루는 오히려 고맙다며 웃고 있었다. 규연은 그 말에 쉬이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멍한 얼굴로 나루의 말간 얼굴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규연이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한테 머무를 곳도 주고, 마음도 주고, 밥도 주고, 지금은 일자리까지 소개해 줬잖아.”
“그건 내가 멋대로 잡아 왔으니까 당연히 해준 거였고…….”
머무를 집, 따스한 밥, 일자리, 모두 나루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첫 시작은 삐걱거렸을지 모르겠지만, 지나온 과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루는 규연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고개를 저으며 규연의 말을 부정한 나루가 손을 꼭 붙잡았다. 방금까지 굳어 있던 표정은 어느새 환하게 풀어져 있었다. 규연은 해맑은 미소에 정신을 빼앗긴 듯 입을 살짝 벌렸다.
“나한테 너는 천사야. 나 구해 준 천사 같은 거.”
“어?”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네가 너무 잘해 줘서 천국에 온 줄 알았어.”
납치당해 왔을 당시에 저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튀어나오려는 말을 급히 삼켜낸 규연이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졸부를 잡겠다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던 자신,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고분고분하게 굴던 나루.
“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무슨 말을 해도 태연하게 굴어서 속이 터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당시에 송나루는 이런 감정이었구나.
그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나루는 특유의 해맑은 얼굴을 유지하며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너무나도 맑아서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너한테 와서 다행이야.”
순간, 규연은 심장이 철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봄도 아닌데 봄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거 같은 착각까지 일었다. 순정만화나 로맨스 드라마에서나 보던 연출을 실제로 겪을 줄이야.
오늘따라 나루의 모습이 더 환하게 보였다. 누군가에게 반하면 그 사람만 보인다던데, 틀린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규연이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자 지루해진 나루는 반응 보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졸려.”
졸리다는 핑계로 자리를 벗어난 나루가 빈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하지만 넋이 나간 규연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내일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나루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규연의 반응이 생각한 것보다 더 딱딱해서 걱정되긴 했지만, 드디어 일자리가 생겼다는 사실에 들떠 마음이 몽글거렸다.
덜컥.
내일은 규연이가 원상태로 돌아오길 바라며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당연히 규연이었다.
나루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 굳어 있었으면서 왜 따라 들어왔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어…….”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들어온 규연은 곧장 무릎을 굽혀 앉아 나루를 품에 껴안고 봤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나루가 몸을 움찔거리자 상체를 조금 더 가까이 붙인 규연이 등을 토닥여 주기 시작했다.
“규연아, 나 갑자기 왜 안아줘?”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여 준 규연이 슬그머니 안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수고했다는 말에 위로받은 나루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규연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엄청난 힘에 밀려 뒤로 넘어진 규연이 헛웃음을 쳤다.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다가오는 나루가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때다 싶어 규연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은 나루는 만족스럽다는 듯 볼을 비비적거렸다. 어두운 과거 이야기를 해도 따스하게 감싸 주려는 규연이 정말 천사 같아서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출근은 언제부터 할래.”
“당장 내일이라도 좋아!”
“그럼 내일 계약서 쓰는 걸로 하자.”
“응!”
출근을 이렇게 반기는 사람이 나루 말고 또 있을까. 계약서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신이 난 나루가 방방 뛰어대며 가까이 붙어왔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애교가 담뿍 섞여 있었다.
“으움!”
“……윽.”
이번에도 예고 없이 입술이 닿아왔다. 이건 뽀뽀가 아니라 거친 입술 박치기에 가까웠다. 나루는 신이 날 때마다 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해 과격하게 굴곤 했다. 자그마한 앞니로 규연의 입술을 따끔하게 공격한 나루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연한 얼굴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계약서, 계약서, 노래를 부르던 나루가 그 자리에 규연을 버려두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빨리 자야 내일이 빨리 오니까 잠을 방해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
어린아이 같은 발상에 고개를 젓던 규연이 조심스레 방 불을 꺼주고 나왔다. 평소였다면 뭘 벌써부터 자는 거냐며 말렸을 텐데, 오늘은 혼자 생각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 방으로 들어온 규연은 침대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까는 믿지 못할 이야기들이 막 밀려들어서 정신이 없었는데,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아야 할 듯했다.
“송나루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참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건데.
잠깐의 대화였으나 나루가 내뱉은 말에는 안타깝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어려서 가족을 잃은 것도 그렇고, 팔려 가서 지하실에 갇혀 지냈다는 게 안쓰러웠다.
“아니 그런데 그 미친 새끼는 뭔데 애를 지하실에 가둬.”
나루를 안쓰럽게 보는 것도 잠시, 규연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전 주인이라는 놈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받았다. 힘도 없는 비실비실한 애를 데려다가 지하실에 가둔 걸로도 모자라 폭력까지 일삼다니. 당장이라도 찾아내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 주인 놈한테 학대를 당해서 그렇게 위축되어 있었던 건가.
나루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던 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의 나루는 말대꾸도 곧잘 하고 제 의사도 잘 밝힐 줄 알지만, 처음 봤을 땐 지나치게 주눅 든 모습을 보였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존댓말까지 꼬박 쓰기도 했고 말이다.
나루가 소심하게 굴었던 게 모두 전 주인 탓이라고 생각하니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깐, 이게 다 사실이면 그 새끼가 지금쯤 송나루를 찾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러고 보니 나루는 도망치던 와중에 규연을 만났다고 했지, 도망에 성공했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전 주인이라는 놈이 지금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나루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신경 쓸 게 한 가지 더 늘어나 버렸다. 우선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건 형인 규성이었고, 다음은 나루의 전 주인 놈이었다.
지잉.
착잡한 마음에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데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규연은 의도치 않게 웃음을 터뜨렸다.
[잘 자 규여나]
나루의 메시지 하나에 온갖 근심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똑같이 잘 자라는 답장을 보내 주니 이번에는 이모티콘 하나가 날아왔다. 물렁하게 생긴 강아지 캐릭터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눈을 감는 이모티콘이었다.
이런 건 또 누가 알려준 거야.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규연이 자연스레 화면을 캡처했다. 남이 보면 뭐 별것도 아닌 걸로 캡처까지 하냐며 핀잔을 줬겠지만, 규연의 눈에는 저 물렁한 강아지가 치명적일 정도로 귀엽게 느껴졌다.
한참 화면을 바라보던 규연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꾹 감았다. 다시 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잠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에게 폭풍 같았던 하루가 지나갔다.
* * *
이른 아침, 일찍이 깬 나루는 배고픈 것도 모르고 씻기 바빴다. 말끔히 씻고 난 후에는 이전에 규연이 사 주었던 옷을 입고, 머리카락까지 가지런히 빗었다.
나루에게 오늘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준비를 마친 나루는 규연의 방 앞까지 오도도도, 달려가 문을 살짝 열었다.
“일어나, 규연아.”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나루가 일어나라며 규연을 깨웠다. 자그마한 목소리에 잠이 깬 규연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정리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야…….”
“네 시!”
뜨이지 않는 눈을 가볍게 비비던 규연이 나루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새벽 여섯 시부터 눈이 말똥말똥한 나루가 신기했다. 게다가 씻고 옷까지 잘 차려입은 모습이 골때렸다.
디저트 카페의 오픈 시간은 정확히 아홉 시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보다 더 일찍 열어야 할 거 같았다. 원래 오픈 담당은 서연이지만, 오늘만큼은 규연이 오픈을 담당하기로 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서연에게 스케줄 변경 메시지를 보낸 규연이 욕실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나루가 먼저 씻고 나온 욕실은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었다.
자기 딴에는 정리를 한다고 하는데 규연의 눈에는 그게 정리 같지 않았다. 뭐랄까, 잘 정돈된 쓰레기장 느낌이랄까.
나루의 흔적을 하나씩 정리하며 씻고 나온 규연은 옷을 갈아입기 전에 부엌으로 향했다. 안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나루가 또 뭔가를 만지고 있는 듯했다.
“나와, 내가 할게.”
싱크대 위에는 모닝빵이 담긴 봉지가 올라와 있었다. 간단히 아침을 차리려고 했던 걸까. 건성으로 나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 규연이 제가 하겠다며 얇은 몸을 밀어냈다.
어제는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느라 둘 사이의 공기가 조금 어색했는데, 오늘은 평소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규연에게 아침을 맡기고 물러난 나루는 편안해진 분위기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규연의 등에 매달려 코알라처럼 안겼다.
킁킁. 킁.
규연이 냄새 좋다.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향기에 안정감을 느낀 나루가 헤실거리며 눈을 감았다. 규연은 귀찮은 척 몸을 틀다가도 그런 나루를 가만히 두었다.
“출근하면 나한테 못 들러붙을 텐데 어쩌냐.”
“…….”
행복함에 취해 있던 나루의 표정이 순식간에 절망에 빠져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