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30)


이제 정말 말해야 할 때인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던 나루가 규연의 눈치를 살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믿음직스러웠지만, 과거 이야기를 나눈 후에도 저 눈빛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지 걱정됐다.

“혹시 강아지 좋아해……?”

“갑자기 그건 왜.”

“좋아해?”

“그냥 그런데.”

쿠궁. 나루의 마음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얹어졌다. 강아지 수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전에 규연의 마음을 살짝 떠볼 생각이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 돌아와서 당황스러웠다.

규연은 나루의 뜬금없는 질문에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과거사를 듣고 싶었을 뿐인데 갑자기 강아지를 좋아하냐니. 나루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규연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이유를 덧붙여 설명했다. 긴장한 나루는 몸을 빳빳하게 굳힌 채 눈동자만 굴리는 중이었다.

“털 날리는 게 별로인데, 보고 있으면 귀엽긴 하지.”

“아, 그, 그래?”

“그나저나 네 얘기 좀 하라니까 웬 강아지 얘기야.”

그야, 내 정체가 강아지 수인이니까…….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한 나루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규연의 반응을 보면 강아지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듯한데,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결국, 나루는 자기가 강아지 수인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했다. 규연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건 과거사였으니 굳이 이 얘기를 먼저 꺼낼 필요는 없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킨 나루가 손을 괜히 쥐었다 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긴장한 탓에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와 미끄덩거릴 정도였다.

나루는 누군가에게 제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게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갇혀 지내왔기에 제 사정을 말할 사람도 없었고, 가족도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한참이나 뜸을 들여가며 망설이던 나루는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센 뒤에야 입술을 떼었다.

“나, 어렸을 때 가족들을 다 잃었어. 이사 가던 중에 사고가 나서, 엄마랑 막내는 죽고, 다른 형제들은 놀라서 어디로 막 뛰어가 버리고, 나는 엄마랑 막내를 지키다가 이상한 사람들한테 잡혀서 팔려 가게 됐어.”

차분한 톤으로 말을 이어 나갔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렵사리 제 이야기를 꺼낸 나루는 규연의 반응부터 살피기 바빴다.

규연은 지나치게 놀란 상태였다. 나루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충격적인 말을 들어 버린 순간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이사 가던 중 사고가 났는데, 어째서 다른 형제들이 도망을 간 걸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신고부터 하고, 가족들을 구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게다가 나루는 그 자리에 남아 있다가 이상한 사람들에게 잡혀서 팔려 갔다고 말했다. 이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세상에 온갖 범죄가 벌어진다지만, 사고 현장에서 피해자를 잡아다가 파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우선 나루가 힘겹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들어 보긴 해야 했다. 규연은 애써 놀란 표정을 숨기며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전 주인을 처음 만났을 땐 엄청 무서웠어. 그래도 잘해 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나루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전 주인’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인상을 찌푸리던 규연은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나루의 표정이나 말하는 뉘앙스를 보았을 때, 그리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조금 크고 나서는 갑자기 지하실에 가둬서,”

“뭐?”

“지, 지하실에 가둬서 계속 거기에서 지냈어. 도망치려고 해 봤는데 항상 잡혀 와서…….”

들으면 들을수록 상상을 초월하는 얘기들이었다. 규연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지 몇 번이고 의심했다. 장난이겠지, 싶어 나루의 표정을 살펴보던 그는 어둡게 가라앉은 낯빛을 확인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그냥 어렵게 산 정도가 아니었다. 전 주인이라고 칭하는 인간은 명백한 범죄자였고, 나루는 피해자였다.

규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하자 나루가 황급히 이야기를 수습했다.

“나한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어. 그, 그래도 도망쳤고! 도망치던 중에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

“잡혀 왔을 땐 처음 그랬던 것처럼 팔려 온 줄 알았거든,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거였어….”

이제야 어긋났던 퍼즐이 좀 맞춰지는 것 같았다.

연속으로 충격을 받은 규연은 멍하니 앉아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전 주인이라는 인간한테서 도망치던 와중에 나를 만났고, 송나루는 또 팔려 온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 이건가.

나루의 사정을 듣고 나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오해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규연도 나루를 납치해 온 입장이었다. 전 주인이라는 쓰레기와 별다를 게 없었다는 거다.

착잡한 마음이 들어 마른세수를 하던 규연은 나루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지금은 저 두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 좋은 세상에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고, 나루가 부당한 일을 다 참아내며 살아왔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규연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갇혀 있는 동안 신고는 왜 안 한 거야.”

“신고할 수단이 없어서,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해도 안 도와주니까…….”

“안 도와준다니, 경찰이 모르는 척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신고할 수단이 없었다는 건 그렇다 쳐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납치에 감금 그리고 폭행까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는 일에 경찰이 나서지 않는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반쯤 체념한 나루의 얼굴이 안쓰럽다 못해 답답했다. 규연이 속상하다는 톤으로 대꾸하자 기회를 보던 나루가 조심스레 화제를 돌렸다.

“만약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면?”

“무슨…….”

“규연이는 믿어져? 다른 세상에서는 이런 일을 당해도 경찰이 안 도와줄 수 있는 거잖아.”

“아니, 안 믿어져.”

나루의 말에 규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이런 건 판타지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설정이었다. 지금 규연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판타지 소설 속이 아닌 현실이었다.

나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을 넘어 현실 세계로 넘어온 자신도 처음에는 쉽게 믿지 못했는데,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규연이 단번에 이해해줄 리가 없었다.

나루는 오히려 규연이 믿어 주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믿지 않는 거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 놓고 털어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믿지 말고 들어줘.”

“…….”

“나 사실 강아지 수인이야. 강아지로 변할 수 있는 사람 같은 거. 수인은 일반 사람보다 덜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어서 취급이 안 좋아. 그래서 납치를 당해도, 누구한테 팔려 가도, 아무도 안 도와줘.”

믿기 어려운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규연은 다른 세상 따위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루의 말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아무리 나루가 엉뚱한 소리를 자주 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지는 않을 듯해서였다.

강아지 수인이라. 강아지로 변할 수 있는 사람…….

나루의 말을 곱씹어 보던 규연이 여태 있었던 일을 찬찬히 떠올렸다. 접시에 머리를 처박고 시리얼을 먹던 모습이라던가, 미용실을 무서워하던 모습, 평범한 성인보다 한참 떨어지는 상식 수준까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강아지 수인이었다고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의 엉성한 행동들이 이해가 가긴 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루를 바라보던 규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 같아서 괴로웠다.

“네가 진짜 강아지, 뭐, 그런 거라고……?”

“응.”

“그럼 증명해 봐.”

그래, 직접 눈으로 보면 저절로 믿음이 가겠지.

증명해 보라며 부추기는 규연의 목소리에 나루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현실 세계로 넘어오면서 귀도 꼬리도 사라져서 수인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 머리와 엉덩이를 더듬거려 보던 나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귀랑 꼬리가 사라졌어. 강아지로 변할 수도 없게 됐고.”

“…….”

나루의 말에 규연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얼떨결에 의심받게 된 나루는 허겁지겁 얘기를 덧붙였다.

“그래도 어, 얼마 전에 귀랑 꼬리가 막 갑자기 나오긴 했어! 내가 도망쳤을 때, 그때 안 나오던 꼬리랑 귀가 나와서, 정말 무서웠었는데, 그랬는데.”

언제는 믿지 말고 들어달라더니, 어느새 진심이 된 나루가 최선을 다해 변명했다. 규연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변한 모습을 봤어도 며칠은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루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대화가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자 말을 더 이으려던 나루가 입만 뻐끔거릴 뿐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규연의 눈치를 보던 나루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작은 소리에도 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나루는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분위기가 될까 봐 일부러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상황이 예상한 것처럼 흘러가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규연아.”

“…….”

규연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생각에 빠진 규연은 대답하지 못한 채 먼 산만 응시하는 중이었다.

이런 모습에 심통이 난 나루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가지런히 있던 눈썹도 잔뜩 찌푸려지고 말았다.

한숨을 삼킨 나루는 규연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려다 말고 상체를 기울였다.

“……!”

나루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있던 규연은 말캉한 촉감에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멍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짧게 입 맞추고 떨어진 나루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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