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 도착해 차를 세우던 규연이 입구 근처에 서 있는 규성을 발견하고 눈을 번뜩였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이 왜 이 시간까지 자신을 기다렸는지, 손이 다 떨렸다.
입구에 서서 규연이 오기만 기다리던 규성은 팔짱을 낀 채 잘빠진 외제 차를 노려보았다. 저만 한 차를 끌고 다닐 인물은 규연밖에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시동을 끄고 내린 규연이 성큼성큼 걸어 규성의 앞까지 다가갔다. 짜증스러운 시선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규성이 표정을 죽이라는 듯 눈치를 주자, 규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쁜 사람이 왜 여기서 나를 기다려.”
“왜겠어. 유규연, 너 집에 저 남자 누구야. 여태 집에는 안 들이더니 이제 막 나가냐.”
“무슨 소리야. 다 사정이 있으니까 형은 일단 신경 끄고,”
“유규연. 똑바로 말해.”
규연이 대충 상황을 넘기려 하자 규성이 말을 끊어먹었다. 오늘 어떻게든 대답을 듣고 가겠다는 각오가 두 눈동자에 박혀 있었다.
설명해도 믿어 주기나 할까. 규연은 답답한 마음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선 규성은 대답을 기다리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칼 같은 태도가 꽤 단호했다.
“내가 데리고 온 거야.”
“그러니까 대체 왜.”
“사정 설명하자면 복잡해, 형.”
“그럼 줄여서라도 얘기해.”
거의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규연이 방패를 들 때마다 규성은 더욱 날카로운 창으로 찔러대며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지는 건 방패였다.
“내가 쟤 좋아해서, 그래서 같이 사는 거야.”
“…….”
“대답이 됐어?”
“…풀어서 얘기해 봐, 뭐라고? 유규연, 네가 진짜 집에 있는 저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규성은 규연을 오래 봐 와서 그 성격을 잘 알았다. 어디 성격만 잘 알까. 규연의 사소한 취향까지도 잘 알았다. 하지만 집에 있는 저 사람은 어딜 봐도 규연의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자였다. 예쁘장하게 생겼어도 남자였다는 거다.
규성이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자, 규연이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쳤다. 진짜 풀어서 설명하자니 이야기가 길어지고, 사실만 얘기하자니 믿어 주지 않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쟤를 데리고 왔고, 오해가 생기면서 부딪히는 일이 많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생겼어. 여기서 더 풀어서 설명하면 길어져.”
규성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규연이 거짓말을 하는 건지 잘 살펴보는 거였다. 말하는 어투나 표정을 봐서는 거짓이 아닌 거 같은데, 참 이상했다. 대체 왜 저런 애랑 마음이 통한 건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난 이해하기 힘들다, 규연아. 독립하더니 이게 갑자기 무슨, 부모님도 걱정하셔.”
“걔 내 애인이야.”
“…….”
“그러니까 괜히 건드렸다가 나랑 사이 틀어질 일 만들지 말라고. 형, 부탁할게.”
규연이 기어코 폭탄을 터뜨렸다. 좋아한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애인 사이라니. 규성이 미친 거 아니냐는 눈으로 규연을 쳐다보았다. 벌어진 입술은 그대로 굳어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침 막장 드라마에서나 보던 전개가 현실에서 벌어질 줄이야. 어처구니없는 규성의 표정과 달리 규연은 진지해 보였다. 그래서 더 골때렸다. 저 두 눈이 지나치게 진심이라서.
결국, 규성은 한발 물러나 주기로 했다. 물론 영영 물러나 주는 건 아니었다. 이마를 짚은 그가 한숨을 섞어가며 경고 아닌 경고를 남겼다.
“진심인 것 같으니까 지금은 그냥 둘게. 그래도 난 허락 못 하고,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반대하실 거야. 그러니까 그냥 평소처럼 적당히 놀다가 그만둬.”
지금 규성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규연은 이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고 대답을 아꼈다. 규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규성이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주고 옆을 지나쳐갔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어이가 없어서. 일단 형 간다.”
어이없다는 말을 두어 번 정도 중얼거리던 규성이 제 차를 끌고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규연은 서둘러 집까지 올라갔다. 혼자 있을 나루가 걱정돼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이 초조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느껴졌다. 층수가 하나씩 높아질 때마다 규연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졌다.
상냥한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쏜살같이 튀어나온 규연이 황급히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0.5초도 되지 않아 문을 연 그는 엉망이 된 신발장을 내려다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신발장에는 나루의 간식으로 사 줬던 포도알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평소였다면 하나씩 주우며 들어왔을 테지만, 규연은 그러지 않고 곧바로 신발장을 지나쳐 거실로 들어왔다.
“송나루.”
“규연이?”
“괜찮아? 형이 너한테 뭐 해코지라도 했어?”
“아니.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갔어.”
멍하니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던 나루는 규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상태로 묻는 말에 대답했다.
나루가 손을 뻗어 규연의 팔을 만지작거리자, 무릎을 굽혀 앉은 규연이 나루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형이 사람을 함부로 때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습관적으로 확인해 보는 거였다.
나루는 규연의 다정한 행동에도 방방 뛰지 않았다. 원래라면 나를 걱정해 주는 거냐며 해맑게 웃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분위기가 지하까지 가라앉은 게 시무룩해 보였다. 규연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형이 심한 말 했어?”
“아니. 안 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시무룩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규연이 하나하나 캐묻기 시작하자 나루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다 대답해주면 속상한 마음을 모조리 터뜨려 버릴 것 같아서 애써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거였다.
규연은 이거 하나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는 일단 나루가 안심할 수 있도록 물은 말에 대답부터 해 줬다.
“너 걱정돼서 일찍 왔어.”
“…….”
“넌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형이 뭐라고 한 거면 나한테 말해 줘.”
특유의 까칠한 말투를 꽁꽁 숨기며 다정함으로 겉을 둘러싼 규연이 부드럽게 대답을 유도했다.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나루는 규연의 태도에 경계를 조금씩 풀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는 게 처음 마주쳤던 날 보았던 모습과 비슷해서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나루는 뜨거워진 제 핸드폰을 소파 위에 살포시 내려놓고 규연의 눈을 마주쳤다. 두 눈동자에는 물기가 살짝 서려 있었다. 티 나지 않았지만, 규연은 작은 변화도 쉽게 눈치챘다.
“사실 조금 놀랐는데, 괜찮았어.”
“…….”
“그냥 내가 너무 무능해서, 그게 속상해서…….”
나루의 입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규연은 무능해서 속상했다는 말에 고장 난 사람처럼 입술만 뻐끔거렸다.
한 번 입을 연 나루는 규연이 없는 사이 자기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다른 사람한테 당당하게 내 소개를 못 해. 이름 말고는 말할 게 없어.”
“…….”
“그래서, 일하고 싶어서 열심히 알아봤는데 다 학교를 나와야 한대. 나는 사정이 있어서 학교에 못 다녔는데. 이러면 어떡해?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
“…….”
“나는, 나도 네 옆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단 말이야.”
나루의 말에 규연의 마음이 쿵, 하고 가라앉았다.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나루의 말이 안타깝고 속상해서, 그래서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여태 나루를 감싸고 돌기만 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규연은 나루가 제 카페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가볍게 대꾸하고 넘겼었다. 그리 진심 같지 않아서 무시하기 바빴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자신이 했던 행동들 하나하나가 후회스러워졌다.
규연에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들이, 나루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거다.
나루가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해서 굳이 물어보지 않고 있었는데, 규연은 이제 나루의 개인사가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 카페에서 일해 줘.”
“응?”
“가벼운 마음으로 권하는 건 아니니까 잘 생각해 봐.”
“아니야, 나 때문에 안 그래도,”
“야, 이거 내가 너 스카웃 하는 거야. 너 때문에 일부러 자리 만드는 게 아니라.”
나루가 거절하려 하자 규연이 먼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너 때문에 일부러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스카웃 하는 거라고. 스카웃이 뭔지 모르는 나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뜻을 유추해 보는 중이었다.
와중에 그 모습이 귀여워 슬며시 웃던 규연이 표정을 엄하게 굳히고 뜻을 설명해 주었다. 실력이 뛰어나거나 우수한 사람을 회사로 데리고 오는 거라고. 최대한 쉽게 설명해 주니 나루의 표정이 환하게 풀어졌다.
같이 따라 웃을 뻔한 규연이 재빨리 얼굴을 굳히고 말을 덧붙였다.
“대신, 네가 진짜 직원으로 일하게 되면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할 거야.”
“…….”
“네가 못하면 내가 진심으로 혼낼 수도 있어. 일할 땐 나를 규연이라고 못 불러, 호칭은 무조건 사장님. 이래도 괜찮으면 계약해.”
칼 같은 규칙에 당황하던 나루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일하는 동안 규연이를 규연이라 부르지 못하고 사장님이라 불러야 하고,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야 한다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이런 것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규연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드디어 첫 직장이 생긴 나루는 뿌듯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잘 생각했어. 여기서 일하면 나중에 다른 카페에도 쉽게 취업할 수 있으니까 많이 배워 놔.”
“응!”
“그리고, 이제는 네 얘기를 좀 해줬으면 하는데.”
“어……?”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규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루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라면, 무슨 얘기를 해달라는 거지.
무슨 얘기인지 짐작이 갔지만, 아니라고 믿고 또 믿었다. 나루는 규연이 제 과거를 받아들여 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규연은 달랐다. 나루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놀라지 않고 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올곧은 눈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네 얘기, 듣고 싶다고. 과거 얘기. 이제는 해줄 때도 됐잖아.”
“…….”
“알고 싶어.”
나루의 동공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