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30)


“당신 누군데 이 집에 있습니까.”

“아, 저…….”

보랏빛 포도알들이 처절하게 신발장 근처를 나뒹굴었다. 마치 지금 나루의 심정처럼 말이다.

규연의 집 문을 당당히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의 친형인 규성이었다. 유규성. 나루도 얼핏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규연의 카페에 갔을 때 분명 본 것 같은데, 이렇게 마주치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니, 새롭다 못해 심장이 벌벌 떨렸다.

규성이 딱딱한 말투로 나루의 정체를 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나루가 규연의 집에 침범한 범죄자로 보일 수 있었다.

나루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규성의 말에 곧장 대답해야 의심을 피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나루가 어벙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일수록 규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손은 이미 경찰에 전화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해?

혼란 속에서 열심히 눈알을 굴리던 나루가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규연이랑 같이 살고 있어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같이 산다고? 유규연이랑?”

“네…….”

나루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같이 산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는데, 분위기상 얼굴을 똑바로 들고 있기가 어려웠다.

규성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루를 훑어보았다. 자신의 동생인 규연은 꼴에 콧대가 높아서 아무나 집에 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약한 결벽증도 있어서 다른 사람과 한 공간을 공유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애가 누군가와 한집에 살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심지어 옷도 후줄근하고, 한 손에는 포도송이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물기가 축축하게 묻어 있고,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이런 남자와 대체 어떻게…….

규성의 눈빛이 의심스럽게 변하자, 나루가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누군가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받는 건 언제나 씁쓸했다.

“당신이 대체 왜, 아니, 일단 이것부터 묻죠. 뭐 하는 사람입니까.”

“저, 저요?”

“그래요, 그쪽.”

“…송나루입니다.”

“그게 답니까?”

“아, 그게, 아직은…….”

곤란한 질문이었다. 뭐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이 이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나. 나루는 할 말이 없어 제 이름 석 자만 말해 주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이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규성은 황당스러운 대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송나루. 이름 석 자가 다라니. 뭔가 직업이 있을 테고, 하다못해 규연과 어떤 사이인지 말할 수도 있는데 고작 저렇게만 대답하는 게 영 의심스러웠다.

나루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당당히 제 소개를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했다.

나루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시무룩하게 있자, 규성이 더 질문하려다가 말을 아꼈다. 더 건드렸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그냥 두기로 한 것이다.

“규연이는 어디 갔습니까.”

“…출장 갔어요.”

“하…….”

출장 갔다는 대답에 한숨을 내쉰 규성이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걸 보니 규연에게 연락을 하는 모양이었다. 중간중간 곁눈질로 나루를 쳐다보며 신호음을 기다리던 그는 규연이 전화를 받자마자 제 할 말부터 시작했다.

“유규연, 너 어디야.”

-형? 나 지금 출장 왔어. 바쁘니까 끊,

“올라오면 바로 나부터 봐.”

-형, 나 바쁘다니까.

“지금 너희 집이고, 같이 사는 사람 마주쳤어.”

규성의 전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나루는 반가운 목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깨를 덜덜 떨어댔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자꾸만 전화 너머에 있는 규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규성이 같이 사는 사람을 마주쳤다고 말하자마자 정적이 맴돌았다. 규연 또한 당황한 듯했다. 나루는 약 5초 동안 숨 막히는 정적을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알겠어, 나랑 얘기해. 형, 지금은 아무 소리 말고 집에서 나와 줘라.

“너 이 새끼 진짜, 하, 알겠어. 올라오는 대로 연락해.”

다행히 규연이 대충 상황을 정리시켰다. 나와 달라고 부탁하는 목소리에 온갖 감정이 다 섞여 있었다. 나루는 어서 규연이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규성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짧은 전화가 끝나고, 규성은 별말 하지 않은 채 뒤돌았다. 나루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여전했지만, 애써 참는다는 얼굴로 다시 현관문을 열었다.

덜컥.

그렇게 문이 닫혔다. 규성은 규연의 부탁대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집에서 나와 줬다. 나루는 규성이 나간 후에도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눈만 깜박였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뭐가 지나간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도저히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지잉. 지잉.

그때, 나루의 핸드폰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나루는 규연의 이름을 확인하고 초록색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귀에 가만히 핸드폰을 가져다 대니 규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하면서도, 최대한 침착하고 있는 차분한 목소리가.

-송나루, 여보세요? 나루야.

“응, 규연아.”

-형이 방금 집에, 아니, 그러니까. 많이 놀랐지.

규연이는 다정하다. 겉으로는 까칠하게 굴어도, 누구보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다.

규연의 다정한 물음에 나루가 마음을 다잡았다. 굳이 여기서 축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출장을 떠난 규연이 내내 불편한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전화 너머로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목을 가다듬은 나루가 평소와 같이 해맑은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나 안 놀랐어!”

-안 놀라긴 무슨. 나 금방 일 끝내고 갈 테니까 집에 잘 붙어있어.

“천천히 와도 돼. 나 괜찮은데.”

-나는 안 괜찮아. 불안해. 형 때문에 놀라서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집에 있어. 알겠지.

“응…….”

규연이 뜬금없이 도망갈 생각하지 말라며 경고했다. 지난번에 나루가 도망갔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희미하게 미소 짓던 나루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집안에 적막이 맴돌았다. 나루는 소파에 앉아 두 무릎을 감싸 안았다. 아까의 일을 떠올릴수록 가슴이 콕콕 쑤시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공허한 눈과 달리 손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핸드폰을 붙잡고 검색창에 ‘일자리 구하는 법’을 끊임없이 검색해 보던 나루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공고를 봐도 자격 조건이 모두 고졸 이상이거나, 대졸 이상이었다. 나루는 태어나서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사람답게 산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하지…….”

제 머리를 주먹으로 아프게 쥐어박던 나루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럽고 한심했다.

나이도 성인인데,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수인이라는 이유로, 지하실에 갇혀 지냈다는 이유로 바보같이 지내야만 하는 게 억울하기까지 했다.

여태까지는 단순히 규연의 옆에 붙어있고 싶어서 일하고 싶었지만, 규성을 마주친 후로 나루에게 확실한 목적이 생겼다.

규연이 옆에 있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한 직업을 가져서 자신 있게 나를 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 뒤, 처음으로 가지게 된 인생 목표였다.

한편, 지방으로 출장을 간 규연은 집에 혼자 있을 나루를 걱정하며 머리를 싸매는 중이었다. 그냥 떠나올 때도 마음이 불안했는데, 형인 규성의 전화를 받고 난 후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복잡했다.

나루에게 전화를 해서 목소리를 들어 보았을 땐 나름 괜찮아 보였었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는 이상은 어떨지 모르는 거였다.

“그냥 카페는 나중에 돌고, 오늘은 농장만 보고 가자.”

“네에? 어차피 카페 보려면 또 여기까지 와야 하잖아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 정 귀찮으면 그땐 나 혼자 올게.”

“사장님 진짜 급한 일 있으시구나…….”

농장으로 들어가던 규연이 통보식으로 이야기하자 서연이 의외라는 눈으로 규연을 쳐다보았다. 두 번 일하는 걸 제일 싫어하는 규연이 일을 미루고, 심지어 귀찮을 일을 혼자 떠맡겠다고 하다니. 여간 급한 게 아닌 듯했다.

서연과 같이 따라온 정수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살다가 별걸 다 본다는 눈빛들이었다. 규연은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농장을 둘러보기 바빴다. 어서 일을 다 끝내고 집으로 올라갈 생각뿐이었다.

이날, 규연은 처음으로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도 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했었는데, 이번만큼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서연도 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지 규연을 최대한 배려하며 일에 집중했다. 정수도 마찬가지였다.

“거래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농장도 그렇고, 블루베리 상태도 아주 좋아요.”

“응, 아무래도 그렇지.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블루베리를 먹어 보던 정수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해도 괜찮겠다며 규연의 의사를 물었으나 단번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정수가 한 번 더 물으려고 하자, 서연이 옆에서 티 나지 않게 허리를 콕콕 찔렀다.

반 박자 늦게 대답한 규연은 농장 주인과 급히 서류를 주고받았다. 서연과 정수가 함께 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정신없이 일을 끝낸 규연이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서연은 따라 타려는 정수를 황급히 잡아챘다.

“사장님, 저희는 따로 갈게요. 먼저 가세요.”

“태워 줄게, 뭐 타고 오려고.”

“아! 카페 저희가 돌고 가면 되겠다. 사진 찍어서 보여드릴게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아 얼른 가세요. 그럼, 서울 올라가서 뵐게요. 그때까지 정신 차리고 있으세요!”

운전석 문을 대신 닫아 준 서연이 어서 출발하라는 듯 창문을 두드렸다. 그답지 않게 미안한 얼굴로 서연과 정수를 쳐다보던 규연이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액셀을 밟았다.

직원들이 배려해 줬으니,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형을 만나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도 수습해야 했다.

무엇보다 나루를 챙기는 게 제일 먼저였다. 착잡해진 규연이 액셀을 더 세게 밟아 속도를 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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