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연의 바람과 달리 아침 해가 쨍하게 떴다. 행복해야 할 주말 아침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나루는 규연의 마음도 모르고 아침부터 날뛰는 중이었다.
들뜬 발소리에 체념한 규연이 거실로 나오자, 캐리어를 끌며 돌아다니던 나루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줬다.
“아침부터 뭐 해.”
“이 가방 신기해서.”
“바퀴 더러우니까 끌고 다니지 마.”
“아 더러워?”
나루가 새카만 바퀴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규연의 말대로 캐리어에 달린 바퀴는 더러웠다. 현관 앞에 얌전히 캐리어를 가져다 둔 나루는 의아한 눈으로 규연을 쳐다보았다.
저 더러운 걸 거실 곳곳까지 끌고 다녔는데, 왜 화를 내지 않는 거지. 평소라면 바로 날아들었어야 할 규연의 잔소리가 오늘따라 잠잠했다. 표정은 분명 썩어 있는데, 이상했다.
“앉아 있어. 샌드위치 만들어 줄게.”
부엌으로 들어간 규연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까칠한 듯 다정한 태도에 머리를 싸매던 나루는 눈치를 보며 그 옆으로 다가가 얼쩡거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기분을 꼭 풀어 주고 싶었다.
종종걸음으로 규연의 뒤를 쫓아다니던 나루가 자연스레 조수 역할을 했다. 규연이 채소를 짚으려 하면 대신 건네주고, 입으로 필요한 재료를 중얼거리면 잽싸게 나서서 가지고 왔다. 하여간 이럴 때만 눈치가 빨랐다.
규연은 나루의 눈치 빠른 행동에 헛웃음을 쳤다. 이런 애 앞에서 질투한 자신이 바보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규연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명랑한 나루 덕분이었다. 그는 나루가 건네주는 재료들을 예쁘게 손질해 잘 구워진 빵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재료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비주얼이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아침은 이걸로 먹고, 냉장고에 간식 많아. 어제 만들어 둔 음식도 있으니까 챙겨 먹어.”
“응.”
“사고 치지 말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규연아, 나 애 아니라니까.”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한 나루가 규연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괜찮으니 어서 준비나 하라며 떠미는 손짓에 어리광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떨떠름하게 욕실 안으로 들어온 규연은 일부러 찬물을 틀어 샤워했다. 어제부터 자꾸만 알 수 없는 서운한 감정들이 밀려들어서 머리를 식혀야 할 것 같았다.
뭐 때문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거지. 단순히 송나루가 나를 붙잡지 않아서? 아니면, 어제 송나루가 했던 건후 이야기가 떠올라서? 둘 다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챙김 받지 않으려는 나루의 모습이 낯설어서. 그래, 이 이유가 맞는 듯했다.
하는 행동이 서툴고 엉뚱해도 나루는 다 큰 성인이었다. 굳이 규연이 하나하나 챙겨 주지 않아도 되는 성인.
전까지는 안전벨트까지 직접 해달라고 할 정도로 챙김 받는 걸 좋아했는데, 최근 들어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여주는 게 낯설었다. 귀찮다고는 하지만 나름 나루를 잘 챙겨 주던 규연은 저도 모르게 서운한 감정을 느낀 모양이다.
유규연, 뭐 이런 걸로 서운해하고 있냐. 쟤 성인이잖아. 정신 좀 차려라.
물을 더 강하게 튼 규연이 떨어지는 찬물을 맞으며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멀쩡히 잘 있는 나루 걱정은 말고, 지금부터는 출장에 신경 써야 했다.
욕실에서 나온 규연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일부러 느리게 일어났더니 시간이 촉박했다.
나루는 분주하게 준비하는 규연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구경했다. 하루 못 보는 만큼 규연의 얼굴을 눈에 담아 놓는 거였다. 그 눈빛이 얼마나 맑던지, 하마터면 출장을 취소할 뻔했다.
“다녀올게. 집 잘 보고 있어.”
“응, 나 집 지키는 거 잘해.”
“뭘 또 잘한다고까지…….”
현관문 앞에 선 규연이 쿨한 척 인사를 건넸다. 나루는 규연이 어떤 심정인지도 모르고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 지키는 건 강아지의 기본 소양이지, 라는 생각까지 하며 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규연은 괜히 나루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애틋한 눈빛에 나루에 대한 마음이 섞여 있었다.
“규연아, 얼른 가. 지금 안 가면 늦는다고 했잖아.”
“나한테 더 할 말 없냐.”
“잘 가?”
“그거 말고. 보고 싶다던가, 그런 말 같은 거.”
멋쩍은 톤으로 말한 규연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매달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던 나루는 규연의 말에 고삐가 풀려 달려들었다.
넓은 품에 얼굴을 묻은 나루가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소중한 사람과 떨어져 있는 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었다. 애 같지 않은 어른이 되려면 이런 헤어짐 따위 참아야 했지만, 나루에게는 아직 조금 어려웠다.
포옥, 하고 안겨드는 자그마한 몸에 규연의 입꼬리가 빙글 올라갔다. 어른스러운 나루도 좋지만, 이렇게 애교 부리는 모습을 볼 때가 제일 행복했다. 그는 나루의 등을 작게 토닥여 주며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보고 싶을 것 같아.”
“어, 나도.”
“너도? 규연이 너도?”
“응, 그러니까 최대한 일찍 올게.”
“올 때 맛있는 거 사 와야 해.”
나루다운 대답에 규연의 표정이 무장해제 되었다. 딱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루는 일부러 더 애교를 부려 주고 떨어졌다. 규연이 출장 가 있는 사이에 제 생각만 했으면 했다.
“진짜 갈게.”
“안녕.”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규연이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고 현관문을 열었다. 나루는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두 손을 열심히도 흔들어댔다.
철컥.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루는 현관문에 귀를 가까이 붙이고 서서 규연의 발소리를 확인했다.
평소보다 조금 느린 발소리.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한 턴 기다렸다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소리. 마지막으로 1층에 도착했다는 소리까지 들은 후에야 현관문을 벗어났다.
거실로 돌아온 나루는 텅 빈 집을 천천히 둘러봤다. 규연이 없는 집은 매우 조용했다. 잔소리하는 목소리도 안 들리고, 부엌에서 뚱땅거리는 소리도 안 들리고. 이전에 규연이 자신을 집에 방치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통창 앞으로 다가간 나루는 유리에 볼을 찰딱 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익숙한 차 한 대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외제 차는 분명 규연의 것이었다.
“규연이 간다…….”
아쉬운 눈으로 차를 바라보던 나루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고, 지금부터는 나루의 시간이었다.
부엌으로 들어온 나루는 냉장고와 선반을 먼저 확인했다. 냉장고에는 규연이 직접 만들어 놓은 점심밥과 어제 사 온 포도, 그리고 간식으로 먹을 만한 유제품이 잔뜩 들어 있었다. 선반에는 시리얼이 종류별로 늘어져 있었고, 과자와 빵도 함께 쌓여 있었다.
그 앞을 서성이던 나루는 시리얼을 덥석 집었다. 예전에 사료 먹듯 먹었던 그 시리얼이었다.
“나루, 이성을 지키자. 나는 사람이야.”
시리얼을 접시에 부은 나루가 우유도 없이 숟가락을 챙겨 들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시리얼은 역시 우유 없이 먹는 게 제일 맛있었다. 사실 이렇게 먹어야 사료 먹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으로 사료를 퍼먹던 나루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숟가락으로 일일이 떠먹고 있자니 답답해서였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처박고 싶었지만, 규연의 얼굴을 떠올리고 겨우 충동을 참아냈다.
찹찹찹!
는 무슨, 나루의 이성은 5초도 못 버티고 본능에 져 버렸다. 어느새 접시에 고개를 처박은 나루가 찹찹거리는 소리를 내며 시리얼을 씹어 삼켰다. 중간중간 규연에게 들킬까 봐 눈치를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캬…….”
시리얼을 다 먹고 뒤늦게 우유를 따라 마신 나루가 입가를 손으로 닦아냈다. 뿌듯한 얼굴은 덤이었다.
오랜만에 강아지처럼 행동하니 없던 스트레스마저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루는 흐름을 타서 물장난까지 시도했다.
욕실로 와다다, 달려간 나루가 샤워기를 틀고 욕실 이곳저곳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옷이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장난을 치던 나루는 제풀에 지쳐 숨을 몰아쉬었다.
“아, 목마르다.”
마지막으로 수돗물을 마신 나루가 샤워기를 제자리에 걸어두고 나왔다. 몸을 활발하게 움직여서 배가 금세 고파졌다. 아까 먹은 시리얼은 어느새 다 소화된 뒤였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대던 나루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번에 그가 꺼내 든 것은 포도 한 송이였다.
잘 씻은 포도를 한 손에 든 나루가 입으로 동그란 포도알을 하나씩 떼어먹었다. 규연이 있었다면 접시에 포도를 놓고 손으로 떼어 먹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됐다.
포도를 먹으며 집 안을 누비고 다니던 나루는 오늘 하루 동안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직 아침이고, 밤이 오려면 한참 멀었는데 할 게 없어서 금방 심심해졌다.
뭐 재미있는 거 없나.
소파에서 일어나 규연의 방으로 향하던 나루가 그 자리에 멈칫, 멈춰 섰다.
현관문 가까이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출장에 간 규연이 다시 돌아왔을 리는 없고, 단순히 경비가 돌아다니는 걸까.
귀를 바짝 세운 나루가 현관문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가니 확실히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도둑?
이를 드러낸 나루가 짖을 준비를 마쳤다. 강아지도 아닌 사람 상태에서 짖으면 상대가 당황할 게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규연의 집을 안전하게 지키는 게 더 먼저였다.
비밀번호를 모를 거고,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막 돌릴 거야. 그러면 그때 나가서 물어 버리면…….
삑, 삑삑삑, 띠리릭.
어라?
문고리가 거칠게 돌아가지 않았다. 밖에 있던 사람은 규연의 집 비밀번호를 실패 없이 누르고 들어왔다.
덜컥.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신발장에 발을 들였다. 놀라서 짖지도 못하고 털썩, 엎어진 나루가 손에 쥔 포도를 떨어뜨렸다. 떨어진 포도는 알알이 떨어져 나가 신발장에 하나둘씩 굴러다니고 있었다.
“유규연, 더럽게 이게 무슨…….”
“…….”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남자가 제 발치까지 굴러온 포도알을 발견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루는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