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냐. 급하게 출장이 잡혀서…….”
“출장?”
다음 달 메뉴 테마는 블루베리였다. 규연은 신선한 블루베리를 사용하고 싶어 했고, 주말을 이용해 블루베리 농장들을 직접 방문해 볼 예정이었다. 이미 전화도 다 끝내놓은 상태였고 말이다.
그런데 방금 막 블루베리 농장 쪽에서 전화가 왔다. 농장을 운영하는 부부는 주말에 급히 입원한 아들을 보러 가야 하니, 미안하지만 내일 와 줄 수 있냐는 연락이었다. 규연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고, 함께 가기로 한 직원들과 일정을 조율하는 중이었다.
나루는 출장이 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지냈을 시절, 나루는 전 주인이 출장을 간다고 할 때마다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었다. 출장을 간다고 하는 날이면 집에 들어오지 않아 잠시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출장이라는 말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규연과 온종일 붙어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게 되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규연은 나루를 데리고 갈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금방 접어 버렸다. 농장 쪽에서 병원 이야기를 꺼낸 이상 여유롭게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나루를 데리고 가면 집중력이 떨어질 것이고, 짧은 시간 안에 농장을 깐깐히 둘러보지 못할 듯했다.
“일단 두 사람 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내일 출장 갈 준비해서 아침 일찍 보는 걸로.”
“네.”
“네.”
황급히 이야기를 끝낸 규연이 나루의 손을 잡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다이어리까지 챙긴 걸 봐서는 집으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얌전히 규연의 뒤를 따라 걷던 나루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직 카페 일을 제대로 도운 게 없는데 이대로 집에 가는 게 아쉬웠다.
규연은 다른 걸 걱정하고 있었다. 출장을 가게 되면 하루 정도 집을 비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부터 주말까지는 일정이 쉴 새 없이 빽빽했다.
급하게 연락이 온 블루베리 농장에 들렀다가, 근처 카페들을 돌고 나면 저녁 시간이어서 어쩔 수 없이 하루 자고 와야 했다. 그러니까, 나루를 하루 동안 혼자 둬야 한다는 말이었다.
애도 아니고, 괜찮겠지.
“나 내일 출장 가면 집에 너 혼자일 텐데. 괜찮겠냐.”
“…….”
“왜 대답을 안 해.”
“응. 괜찮아.”
조수석 문을 대신 열어주던 규연이 혼자 있어도 괜찮겠냐는 동의를 구했다. 한 박자 느리게 대답한 나루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주고 차에 올라탔다.
의외로 쉽게 돌아온 대답에 규연의 표정이 오묘하게 물들었다. 운전석으로 돌아와 핸들을 붙잡은 그가 옆에 앉은 나루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바라는 게 있다는 것처럼.
“나랑 떨어지는데 괜찮다고?”
“응. 영영 떨어지는 거 아니잖아.”
“너 나…….”
너 나 되게 좋아하잖아.
무심결에 튀어나오려던 말을 겨우 참아냈다. 하마터면 질투에 눈이 먼 남자가 될 뻔했다. 규연은 말을 삼키는 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루가 아무렇지 않아 하니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규연의 씁쓸한 심정과 달리 나루의 속마음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떨어지기 싫어. 유규연 어디 가. 유규연 못 가. 나랑 계속 있으면 안 돼? 안 가면 안 돼?
속으로만 규연의 발목을 열심히 붙잡던 나루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계속 보고 있으면 진짜로 붙잡아 버릴 것 같아서 아예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붙잡는 건 애 같은 행동이야.
아닌 척했지만, 나루는 아까 도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신경 쓰고 있었다. 강아지 수인인 티 내지 마라, 이쪽에서는 애새끼나 그렇게 행동한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었다.
나루는 제 행동을 천천히 고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규연에게 기대는 것도 조금 자제하고, 도민이 말하는 애새끼 같은 행동도 줄여 나갈 생각이었다.
이런 행동으로 규연이 서운해할 거라는 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아니 뭐, 아니다.”
“응.”
“나랑 떨어지는데 아쉽지도 않냐.”
“…….”
툭 내뱉어진 말에 나루의 입꼬리가 빙글 올라갔다. 까칠하지만 애정이 담긴 말투. 규연은 지금 나루와 떨어지는 걸 그 누구보다 아쉬워하고 있었다. 나루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거다.
규연의 반응에 신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나루가 일부러 헛기침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규연은 나루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 채 열심히 운전 중이었다.
그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나루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쉽지 않기는 무슨, 엄청 아쉬웠다.
“아쉬워.”
“…….”
“규연이가 없으면 밥해 줄 사람이 없잖아.”
“저게 진짜…….”
민망한 분위기에 장난을 던진 나루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규연은 그런 나루를 얄밉게 쳐다보다가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어이없어서 웃은 거였다.
집에 가면 먹을 것 좀 많이 만들어 둬야겠다.
고작 하루인데, 나루가 굶을까 봐 걱정됐던 규연은 머릿속으로 음식 메뉴들을 떠올렸다. 아침은 바로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로 하고, 점심은 간단히 데워 먹을 수 있는 걸로…….
장난스레 던진 말이었으나 규연은 나루의 모든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으면 또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루가 말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요리에 재능이 없는 애니까.
집에 도착하기 전, 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규연이 식재료를 잔뜩 사 들고 돌아왔다. 나루는 봉투 안에서 바나나 하나를 꺼내 먹으며 규연을 구경했다. 뒷좌석에 봉투를 두고, 다시 차를 출발시킨 규연이 집까지 액셀을 세게 밟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로는 더 바빴다. 뭐가 그리 급한지, 규연은 사 온 식재료들을 꺼내 냉장고를 채웠다. 나루는 식탁 의자에 앉아 간식을 주워 먹으며 혀를 찼다.
유규연 바보. 나 그냥 장난친 거였는데…….
“정말 내 밥해 주는 거야?”
“어.”
“왜?”
“혼자 두면 또 접시에 머리 처박고 시리얼 먹을까 봐.”
“…이제 안 그러는데.”
규연이 예전 일을 들먹이며 나루를 걱정했다. 이쪽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언젠가 한 번 접시에 머리를 박고 시리얼을 정신없이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시리얼이 사료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개 같은 짓이었다. 멍멍 개.
그때의 일이 규연에게 큰 충격이었던 걸까. 그는 나루가 또 잘못된 방식으로 시리얼을 먹지 않을까 걱정하며 카레를 만들어 주었다.
“내일 배고프면 이거 데워 먹어.”
“응.”
“받아.”
“뭐야? 이거 돈이잖아.”
“저녁은 이걸로 사 먹으라고. 배달시켜 먹어.”
나루의 손에 카드가 쥐어졌다. 아침은 샌드위치, 점심은 카레, 저녁은 원하는 걸 사 먹으라니. 천국이었다. 규연이 만든 음식이라면 세 끼 내내 같은 메뉴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해 주니 감격스러웠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루가 대뜸 규연에게 달려들었다. 감사 표시를 과격하게도 했다. 뒤에서 규연의 등을 꼭 껴안자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또 이런다.”
“그런데 내일 어디 가는 거야?”
“블루베리 농장.”
“농장에서 일해?”
“아니, 일하는 건 아니고 보러 가는 거.”
농장이라는 단어가 나루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블루베리 농장이라. 내가 감자를 캐던 그런 농장과 비슷한 건가. 잠깐이었으나 농장에서 일하던 때를 떠올리던 나루가 흐뭇하게 웃었다.
힘들긴 했어도 괜찮았었는데. 건후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왜 웃어, 송나루.”
“나 농장에서 일했을 때 친구 생겼었다. 이름은 건후야.”
“그 얘기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
“규연이가 농장 얘기해서, 건후가 갑자기 생각났어.”
규연은 서운했다. 그것도 엄청 무척 서운했다. 출장 간다고 밝혔을 때부터 반응이 영 별로더니, 이제는 다른 남자 이야기까지 하는 나루가 얄미워 보였다.
나루의 입술을 붙잡고 아프지 않게 흔들던 규연이 질투심을 그대로 내비쳤다.
“건후인지 뭔지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풉…….”
“어? 비웃어? 비웃냐?”
“규연이가 더 중요해.”
반강제로 얻어낸 대답이었다. 왜 저렇게 당연한 걸 묻는 거지. 웃음을 터뜨리던 나루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입을 붙잡고 있던 손이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나루의 쓸데없는 친구 자랑 덕분에 규연의 근심이 늘어났다. 혹여나 집에 혼자 두면 밖으로 튀어 나가서 그 친구를 만나지는 않을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미리 주의하는 건데.”
“응?”
“사고 치지 말고 있어 줘. 제발.”
“나 사고 안 쳐.”
퍽이나 그러겠다. 나루는 꼭 사고 치지 않는다고 말할 때마다 대형 사고를 쳤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무슨 똥강아지도 아니고 집안을 개판 쳐 놓는 게 수준급이기까지 했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루를 바라보던 규연이 됐다며 고개를 돌렸다. 끝까지 반박하지 못한 나루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딴청을 피웠다. 솔직히 자기가 생각해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강아지 같은 행동을 눌러 참고 있지만, 방심하면 자꾸 버릇이 튀어나왔다.
아니야, 그래도 참자. 나는 여기서 그냥 사람이잖아. 사람!
규연이가 없는 동안 참을 수 있을까? 정말?
나루가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규연이가 집에 없다면…….
물장난치기 가능. 사료처럼 시리얼 먹기 가능. 휴지 뽑기 가능. 벌레 손으로 때려잡기 가능.
꼴깍.
슬슬 규연의 눈치를 살피던 나루가 마른침을 삼켰다.
오, 어쩌면 좋을지도 모르겠는데. 나 혼자 있을 땐 괜찮지 않나. 혼자라면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보니까…….
생각을 마친 나루가 규연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한 손은 좌우로 경쾌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잘 다녀와, 규연아!”
나루가 의도치 않게 밀당을 했다. 이번 건 늘 하는 것처럼 당기는 게 아닌 밀어내기였다. 그것도 아주 매정하게 밀어내기.
붙어 있지 못하는 건 슬펐지만,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얼떨결에 밀려난 규연은 혼이 쏙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얘 오늘따라 진짜 왜 이러지. 나 출장 가니까 뭐 후회해라, 이건가.
“야 송나루, 나 가기 전에 뽀,”
“내일 샌드위치 맛있게 만들어 주고 가야 해.”
“…어, 그래. X발.”
뽀뽀는 무슨, 말까지 씹혀 버렸다. 아예 체념해 버린 규연이 텅 빈 눈으로 대답했다. 출장 가는 게 이렇게 싫었던 적은 또 처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