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30)


“형?”

“마침 있었네.”

익숙하지만 익숙하고 싶지 않은 손님이었다. 깔끔한 수트 차림으로 나타난 남자는 다름 아닌 규연의 형, 유규성이었다. 규연은 규성의 예고치 않은 방문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규성은 지나가던 길에 디저트를 구매하러 들른 참이었다. 야근을 계속 이어갈 직원들에게 선물할 당 보충용 간식이었다.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규성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었지만 깐깐하고도 기품있는 시선이 가게 내부 진열대와 직원들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규연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요즘 열심히 출근하네.”

“당연하지, 내 가게인데.”

“선물할 거니까 디저트 좀 적당히 포장해 줘.”

규성의 주문에 넋 놓고 있던 서연이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뉴스 기사에서 간혹 보이던 사람을 막상 눈앞에서 보니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규연과 다른 분위기로 잘생겨서 더더욱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가게를 좀 더 키우는 건 어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니까.”

“너, 요즘도 밤새워 놀러 다니는 건 아니겠지.”

“형, 나 어린 애 아니거든.”

규성은 규연을 볼 때마다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막내가 본가를 나가서 망나니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늘 걱정인 규성은 매번 이렇게 철저히 규연을 관리했다.

규연은 독립한 뒤로 본가에 잘 들르지 않았다. 부모님이 그렇게 사랑으로 키웠건만, 배은망덕하게 연락도 잘 안 했다. 악의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었고, 순전히 규연의 성격 탓이었다. 그러니 형인 규성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규연의 말을 대충 넘겨 들은 규성이 이번에는 테이블 쪽을 쳐다봤다. 홀에 손님은 얼마나 있는지 습관적으로 확인하던 그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나루와 눈이 마주쳤다.

20대 남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은가 보네.

음료를 마시던 나루는 규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빼입은 수트도, 지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안경도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규성의 얼굴은 규연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규연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데 친밀해 보이기도 했다.

그냥 자주 오던 손님인가?

고개를 돌린 나루가 대수롭지 않게 음료를 마저 들이켰다. 지금은 저 사람보다 일 구하는 방법을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여기. 다음에 올 때는 미리 연락 좀 해.”

“웃기고 있다. 나한테 찾아올 땐 연락도 안 하고 무작정 쳐들어오는 놈이.”

쇼핑백 여러 개를 건네주던 규연이 핀잔을 주었다. 아무렴 규연이 할 말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 규성은 잘 포장된 쇼핑백들을 꼼꼼히 확인하고 서연에게 눈인사를 해 주었다.

볼일이 끝난 규성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는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성격이 규연과 달리 칼 같았다.

“나중에는 집으로 찾아갈 거니까 나돌아다니지 마.”

“끝까지 애 취급이시네, 우리 형.”

“간다.”

간단하게 인사를 남긴 규성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카운터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서연은 뒷모습마저 완벽한 규성을 대놓고 훔쳐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완벽한 수트 핏 하며, 지적인 이미지가 딱 서연의 이상형에 적합했다. 뉴스 기사 사진으로 볼 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카메라가 얼굴을 다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사장님, 유전자 정말 부럽네요. 실물은 처음인데 너무 잘생기셨….”

“얘 또 이러네. 주접 그만 떨고 일이나 해.”

“주접 안 떨게 생겼어요? 와, 진짜 잘생기셨다. 완전 제 이상형.”

서연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던 규연이 혀를 쯧쯧, 차 줬다. 서연은 싸가지 없는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규성의 찬양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런 순간에도 규연의 관심은 나루에게 쏠려 있었다. 허리를 숙이고 앉아서 열심히 핸드폰을 쳐다보는데 평소답지 않게 집중한 얼굴이 귀여웠다. 규연은 티 나지 않게 웃으며 나루의 옆으로 다가갔다.

“뭐 해.”

“검색 중. 그런데 아까 그 사람 누구야?”

“누구? 아, 그거 우리 형.”

궁금하지 않은 척 핸드폰에 집중하던 나루가 규연을 보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역시 그 집착 어디 가지 않는다. 규연은 친절하게 제 형이라며 규성을 대충 소개했다. 친형제를 모두 잃은 나루는 형이라는 말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내 형도 정말 착했는데. 규연이네 형은 어떨까. 형 보고 싶다. 동생들도, 엄마도.

생각 없이 형 이야기를 하던 규연은 무언가를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루의 가족사를 뻔히 아는데 눈치 없이 자랑한 꼴이 되어 버려서 민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루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규연이는 막내야?”

“어, 뭐. 그렇지.”

“막내구나. 귀여워라.”

막내라는 말에 흐뭇하게 웃던 나루가 규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줬다. 손바닥만 한 제 막냇동생이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규연을 아기처럼 취급한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쓰다듬을 받던 규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루의 손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멀리서 서연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너까지 애 취급이냐.”

“응?”

“뭐 하고 있었는지나 알려줘.”

규연이 일부러 말을 돌리자, 나루가 보고 있던 화면을 얼굴 앞에 들이댔다. 검색창에는 나루가 열심히 검색한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일 구하는 방법]

[카페에서 일하고 싶아요]

[카페 직원 되기]

검색어가 온통 일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중간중간 규연에게 나도 일해 보고 싶다는 등의 말을 던지긴 했지만, 전혀 진심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꽤 의외였다.

“일하고 싶어? 뭐 이런 걸 검색했어.”

“…나만 아무것도 안 해. 다 일하는데.”

“다들 일하고 싶지 않아 하는데 특이하네.”

평소 회사에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집에 있거나 규연의 옆에만 붙어 다니는 나루는 역으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우선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무조건 돈이 필요했고, 규연의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서연과 도민처럼 이곳에서 함께 일한다면 참 좋을 텐데.

“나도 여기서 일하면 안 돼?”

“음, 그건 생각 좀 해 보고.”

“왜?”

“직원을 막 뽑을 수는 없으니까.”

현실적인 대답에 나루가 절망했다. 규연은 공과 사를 잘 구분했다. 나루를 좋아하긴 하지만, 직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랐다. 아직 디저트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별다른 자격증도 없으니 받아줄 수가 없었다.

다만, 간단한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한다면 고려해 볼 수도 있었다. 자격증이 없어도 카운터 일을 조금 가르쳐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특유의 반짝이는 눈빛으로 규연을 바라보던 나루가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라는 듯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마다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드는 게 보통 약은 게 아니었다. 규연의 마음이 약해진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거였다.

“나도 직원…….”

“직원은 안 돼. 대신, 조금씩 도와주는 아르바이트는 가능해. 가끔이라면.”

“아리바이타?”

“아르바이트. 알바라고.”

“아아, 그거.”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루가 인터넷에서 본 단어를 떠올리고 손뼉을 쳤다. 규연은 대답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지 여러 번 의심했다. 사회생활이 서툰 나루가 혹여 일에 어려움을 겪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남들 다 하는 일 똑같이 해 보긴 해야겠지. 쟤도 멀쩡한 성인인데.

규연이 카운터 쪽을 향해 손짓하자, 디저트를 진열하던 서연이 달려왔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는 걸 눈치채고 부리나케 뛰어온 티가 났다.

“오늘은 얘가 조금씩 도와줄 거니까, 예전에 알바한테 시키던 일들 좀 알려줘.”

“정말요? 어머, 세상에.”

“힘든 일은 웬만하면 피해서 시켜.”

“흐흥, 네.”

세상에 어떤 사장이 아르바이트생을 이렇게나 편애할까. 둘 사이에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서연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나루를 끌고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루는 그저 해맑게 웃으며 서연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중이었다.

규연은 민망함에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힘든 일은 웬만하면 피해서 시키라니. 제가 뱉은 말이지만 팔불출 같았다.

카운터 뒤쪽에서 바닐라라떼를 만들던 도민은 나루가 들어오는 걸 목격하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번부터 테이블에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더니, 기어코 카운터 안쪽까지 들어온 게 못마땅한 듯했다.

서연은 어떤 일을 알려줘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규연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루에게 험한 일을 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머리까지 싸매며 가장 쉬운 일을 찾던 서연이 시선 끝에 걸린 쓰레기봉투를 발견하고 밝게 웃었다.

“나루 씨가 도와줄 일은, 이걸 버려 주는 거예요. 카페 뒤쪽에 쓰레기 모아두는 곳이 있어요. 저 문 열고 나가면 바로 보이니까 어렵지 않으실 거예요.”

서연이 시킨 일은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것이었다. 가장 간단한 일이었다. 나루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는 제 다리까지 오는 쓰레기봉투를 힘껏 집어 들었다.

나도 이제 보통 사람들처럼 일하는 거야!

뒤뚱거리며 걸어가던 나루가 카페 뒤쪽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작은 공터처럼 생긴 공간에는 다른 가게에서 내놓은 쓰레기봉투들이 한쪽에 잘 쌓여 있었다. 나루는 그 끝에 제가 들고 온 쓰레기봉투를 내려놓고 뿌듯한 마음으로 뒤돌아섰다.

“어…….”

서연에게 자랑하기 위해 어서 달려가려는데, 어느새 따라 나온 도민이 나루의 앞을 막아섰다. 달갑지 않은 얼굴에 곧바로 미간을 찌푸린 나루가 비키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도민은 비켜 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번부터 왜 이러는 걸까. 나루와 도민은 처음 봤을 때처럼 신경전을 벌였다. 꼭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말이다.

“비켜.”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왜 반말이야.”

먼저 반말을 사용한 나루가 적반하장으로 굴며 도민의 태도를 지적했다. 골때리는 말에 헛웃음을 친 도민은 나루를 슬슬 벽 쪽으로 밀어붙이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나루는 그런 도민에게 절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노려보며 기선제압을 시도했다. 이윽고 한참 말없이 신경전을 펼치던 도민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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