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30)


진지하게 가라앉은 톤으로 규연의 이름을 부른 나루가 제 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울상이 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나 배고파.”

“…….”

까악. 까악. 까악.

규연의 머릿속에 까마귀들이 날아다녔다. 살짝 긴장하기까지 했는데 돌아온 말은 배고프다는 거였다. 이건 뭐, 다시 고백을 이어가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 이게 송나루지. 이래야 송나루지.

허탈하게 웃던 규연이 부엌으로 향했다. 하기야 소리도 지르고 하느라 감정 소모가 많이 됐을 텐데 배가 안 고픈 게 이상했다. 나루는 규연의 뒤를 따라 들어와 요리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지켜봤다.

고작 며칠 만인데 몇 달 만에 평화로워진 기분이었다. 나루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냥 같이 요리를 하고, 밥을 먹는 사소한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할래요.”

“마음대로 해.”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 채소를 다지던 규연이 나루에게 칼을 넘겨줬다. 익숙하게 프라이팬을 꺼내던 규연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방금 나한테 존댓말을 썼었지.

나루는 항상 존댓말과 반말을 오가며 사용했다. 무슨 기준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무언가 부탁할 땐 존댓말을 했고,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말을 곧잘 사용했다. 아무튼 규연이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나루의 진짜 나이였다. 아까는 무거운 가족사를 듣느라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는데, 나루의 진짜 나이가 궁금해졌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던 규연은 채소 썰기에 열중하고 있는 나루를 힐끔거렸다.

딱 봐서는 이제 스무 살, 아니면 스물하나 정도일 거 같은데.

“아까 차마 못 물어본 게 있는데.”

“응?”

“너 몇 살이야.”

“나이?”

칼을 내려놓고 규연과 시선을 마주한 나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군가에게 나이를 말해 본 적이 없어서 이런 질문을 받는 게 조금 쑥스러웠다.

“나 스물한 살.”

수줍은 태도를 보이던 나루가 제 나이를 밝혔다. 규연이 예상한 것과 똑같은 나이였다. 이제 막 사회초년생이 된 앳된 얼굴이 딱 그 나이대에 어울렸다.

자기소개를 한 게 꽤 마음에 들었던 걸까. 나루는 규연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규연이는?”

“스물다섯.”

드디어 서로의 자기소개가 오갔다. 나루는 뿌듯했다. TV에서 보면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제 소개를 하며 악수를 하곤 했는데, 그게 멋있어 보여서 언젠가는 꼭 흉내 내 보리라 다짐했기 때문이다.

규연과 나루는 정확히 네 살 차이가 났다. 한두 살 차이도 아니고 네 살 차이라니. 규연이 훨씬 형이었다. 하지만 나루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규연을 편하게 이름으로 불렀다.

뭐, 처음부터 그랬으니 굳이 호칭을 바꿀 필요는 없었지만, 규연은 일부러 나루를 놀려 줬다.

“내가 형이네.”

“응.”

“형이라고 불러 봐.”

“안 돼.”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이 꽤 매정했다. 사실 밤쯤 장난이었는데, 나루가 이렇게 나오자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든 형 소리를 듣고 말겠다 다짐하며, 규연이 눈을 빛냈다.

“왜 안 돼.”

“형은 형 같은 사람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거야.”

“…….”

나루는 차분한 말투로 규연의 양심을 후려쳤다. ‘형 같은 사람한테’라니. 규연은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형이라고 불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결국 규연은 그냥 형 소리 듣기를 포기해 버렸다.

“그래, 뭐 내가 그 소리 들을 만한 정도는 아니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규연이 아무렇지 않게 다져진 채소를 가져가 볶았다. 듣고 싶어 하는 것 같더니, 이럴 땐 또 빠르게 수긍하는 게 의외이기도 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루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규연은 스스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나루는 마냥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 주인은 제 무지막지한 행동을 반성할 줄도 몰랐고, 오히려 나루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래서 나루가 계속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규연은 전 주인과 확연히 달랐다. 제 행동에 대해 반성할 줄 알고, 자존심이 그렇게 세면서도 잘못한 건 정확히 잘못했다고 인정할 줄 알았다. 게다가 나루에게 직접 사과까지 했다.

규연이는 그 사람이랑 달라. 성숙해. 생각이 깊어.

나루가 속으로 규연의 칭찬을 늘어놓는 사이, 어느새 볶음밥이 완성됐다. 규연은 식탁 위에 접시 두 개를 올려놓고, 나루가 마실 물까지 떠다 두었다.

“앉아.”

“맛있겠다…….”

나루가 들뜬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규연은 이 기회를 빌려 아까 하려던 이야기를 슬쩍 이어 가고 싶었다. 지금 이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연스레 고백하면 딱 좋을 듯했다.

그렇게 계속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나루와 눈이 마주쳤다. 규연은 이때다 싶어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루가 더 빨랐다.

“만들어 줘서 고마워.”

“어…….”

“형.”

“…….”

규연은 이제 나루가 의심스러웠다. 얘 진짜 나보다 더 능숙한 것 같은데. 뭐 이런 타이밍에 저 호칭을…….

멍해진 규연이 나루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가끔은 저 맑은 눈망울이 거짓인가, 싶을 정도로 나루의 행동이 의심쩍었다. 연애에 익숙하지 않은 애가 저렇게 자연스럽게 사람을 꼬실 수 있는 건가.

규연의 마음에 핵폭탄을 던져 놓은 나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굴며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또 애가 타는 건 규연이었다.

“송나루, 너 솔직히 말해. 연애 몇 번 해 봤어.”

“연애? 안 해 봤는데.”

일방적으로 옳지 않은 사랑을 강요당한 적은 있어도, 알콩달콩한 연애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예쁘게 연애해 보는 건 나루의 수많은 꿈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무심한 대답에 체념한 규연이 알겠다며 대답하고는 접시를 더 가까이 밀어줬다. 나루는 규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밥을 먹기 바빴다.

규연은 깨작거리며 나루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순진한 듯 안 순진하고, 멍청한 듯 안 멍청하고. 나루의 성격은 완벽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규연이 뭐 하나를 예상하면 꼭 그 예상을 뛰어넘으니,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속 관심이 가는 건가.

아예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루를 구경하기 시작한 그가 피실, 웃음을 지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웃음을 짓게 될 줄 몰랐는데, 나루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게 신기했다.

규연의 가족들이 본다면 깜짝 놀랄 만한 변화였다. 밤마다 놀러 다니지도 않고, 집에 진득하니 붙어있거나 제 일만 열심히 하는 게 아버지나 형의 귀에 들어가면 눈에 띄게 좋아할 듯했다.

아, 이걸 잊고 있었네.

가족, 특히 첫째 형인 규성을 떠올리던 규연이 나루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나중에라도 형이 송나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좋게 봐줄까.

* * *

나루가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규연은 다시 평범한 일상을 되찾았다. 며칠 동안 사람답지 않게 살았는데, 오래간만에 말끔한 차림으로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루가 규연의 옆에 착 붙어 섰다. 함께 출근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씻고, 예쁜 옷까지 골라 입었다. 예전 같았으면 따라오냐 마냐로 입씨름을 했을 텐데, 오늘은 조용했다.

“가자.”

차 키를 챙긴 규연이 현관문을 열었다. 나루도 당연히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같이 외출하는 거라 그런지 나루의 마음에 꽃이 활짝 피었다.

덜컥.

차에 탄 규연이 나루의 안전벨트를 먼저 채워 주고 시동을 걸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안전벨트를 해주었다. 나루를 생각해서 해준 거면서, 그렇지 않은 척 무심하게 구는 게 매력적이었다.

카페까지는 2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나루는 익숙한 건물과 간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카페 데스티니입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카운터에 서서 인사를 하던 서연이 나루를 발견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며칠 내내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나타나서 놀란 모양이었다. 멋쩍게 인사를 건네며 들어간 나루는 향긋한 빵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음, 역시 여기 냄새가 제일 좋아.

세상 행복한 얼굴로 냄새를 맡던 나루가 돌연 표정을 굳혀 버렸다.

“…….”

“…….”

시선 끝에는 도민이 있었다. 어느새 카페 일에 익숙해졌는지 디저트를 진열하던 그가 나루를 발견하고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아, 내가 쟤를 잊고 있었네?

나루의 눈이 번쩍였다. 여태 여러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도민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딘가 수상한 게 얄미운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마주치니 더 느낌이 이상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어, 안녕. 이따 잠깐 나 좀 보자.”

“네? 제가 뭐 잘못했나요?”

“아니, 직원용 명찰이랑 뱃지가 이제 도착해서.”

나루를 외면하고 다가온 도민이 규연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인사를 받아 준 규연은 바로 용건부터 늘어놓았다. 직원용 뱃지와 명찰이 도착했으니 이따 받아 가라는 소리였다.

알 수 없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나루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늘 이 카페에 놀러 오지만 나루는 정말 손님 취급만 받았지, 규연에게 저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나루는 이 카페의 직원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도 여기서 일하면 규연이랑 저런 얘기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던 나루가 서연이 건네준 버블티를 쪽, 빨아 마셨다. 한 번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맛있는 음료도 내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거고? 뭔가, 멋있다…….

생각해보니 여기서 제대로 된 직업이 없는 건 나루뿐이었다. 서연도, 도민도, 안쪽에 있는 파티시에들도 다 이 카페의 직원이었다. 규연은 사장으로서 카페를 잘 이끌어 나가고 있고.

나루는 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다.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은데, 할 수 있는 일은 또 없고. 속이 답답해졌다.

“표정이 왜 그래.”

“그냥…….”

나루의 안색을 살피던 규연이 걱정스레 물었다. 손으로는 달달한 마카롱 하나를 건네주고 있었다. 나루는 연하늘색 마카롱을 받아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딸랑.

규연이 나루를 살살 달래고 있을 때 즈음, 카페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서연의 밝은 목소리가 손님을 반겼다. 무의식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던 규연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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