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왔을 때, 둘 사이는 이미 유하게 풀어져 있었다. 나루의 화가 확실히 풀려서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갈 수 있을 듯했다. 규연은 나루를 소파에 앉혀 놓고 따듯한 밀크티를 타 왔다.
깔끔히 청소된 주변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나루가 건네진 밀크티를 받아 바로 마시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다 칼칼했다.
밀크티를 무슨 사이다 마시듯 넘긴 나루가 캬,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뜨거웠는지 목을 두 손으로 붙잡기까지 했다. 규연은 그런 나루를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우리 더 할 얘기 있잖아.”
차를 마실 때까지 기다려 준 규연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둘 사이 분위기가 풀렸을지는 몰라도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많았다. 예를 들어 나루의 진짜 정체라든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와 같은 것들.
나루가 답지 않게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당당한 태도를 보이더니, 갑자기 불안해하는 게 무언가 이상했다.
나루는 자신의 성장 배경을 규연에게 밝히는 게 두려웠다. 그러니까, 규연은 좋은 집에서 태어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입고 자랐는데, 나루는 애초에 강아지 수인이라는 종족으로 태어나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자랐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곳은 강아지 수인이 없는 세계였다. 과연 규연이 나루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해 줄까. 말해서 문제 될 게 참 많았다.
“여태 나는 널 계속 다른 사람이라고 오해했잖아.”
“…응.”
“이제 아닌 걸 알았으니까, 진짜 널 알고 싶은데.”
“왜?”
규연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돌아온 나루의 반응이 영 시큰둥했기 때문이다. 이미 좋아한다는 마음도 밝혔고, 오해도 풀렸으니 진실을 알아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나루는 규연의 시선만 요리조리 피할 뿐 도통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왜냐니, 좋아하니까.”
“…….”
규연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거부할 수 없게 되잖아. 왜 갑자기 착해지고 그래.
속으로 대꾸하던 나루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규연의 담백한 고백에 마음이 둥실거렸지만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였다.
만약, 자란 배경이 다르다고 해서 나를 내치면 어떡하지. 내가 강아지 수인인 걸 밝히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그전에 규연이가 내 말을 믿어주긴 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나루가 손가락을 꼼질거리자, 지켜보던 규연이 평소보다 더 부드러운 톤으로 말을 걸어왔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말해. 난 그냥 진짜 너를 알고 싶은 것뿐이니까.”
“진짜, 나? 후회 안 해……?”
“뭐?”
규연은 혼란스러웠다. 나루의 두 동공이 흐릿해진 상태로 떨리고 있었다. 진짜 너를 알고 싶다고 말한 게 전부인데, 왜 갑자기 저런 눈을 하는지 갑자기 불안해졌다. 게다가 나루는 후회하지 않겠냐며 마음의 준비까지 시켰다.
뭐, 설마, 범죄자라는 미친 소리를 하지는 않을 테고. 뭐야 대체?
덩달아 긴장한 규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후회하지 않겠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나루가 무언가 마음먹은 듯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나 너랑 많이 다르게 자랐어.”
“어, 보통 사람들은 다 그래.”
“……그래?”
“아마도.”
재수 없는 발언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다 그런다니. 뭐,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규연은 막강한 YK의 막내아들이었으니 말이다.
의아한 얼굴로 되묻던 나루는 보통 다 그렇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했다. 여태 왜 이렇게 걱정했는지 모르겠다. 규연의 말뜻을 잘못 이해한 나루는 부담감을 덜어내고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나, 가족이 없어.”
“어?”
“형들이랑 동생들은 어디로 갔는지 몰라. 막내는 엄마랑 같이 차에 치여서 죽었어.”
“…….”
보통이라기엔 조금 무거운 가족사였다. 규연은 상상치도 못한 말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정작 나루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이걸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눈앞이 캄캄한 기분이었다.
규연이 멍하니 있는 사이, 나루가 계속해서 제 사정을 이야기했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가족사를 전하는 모습이 평소와 달리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반대로 어딘가 텅 비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죽은 거였어. 나는, 그, 그러니까, 그때 안 좋은 일까지 겹쳐서 엄마랑 동생 마지막 배웅도 못 해 줬어. 아직도 어떻게 됐는지 몰라.”
수인 불법 판매자들에게 잡혀갔던 일을 단순히 ‘안 좋은 일’로 포장한 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랜만에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마음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규연의 마음은 더 무거웠다. 많이 다르게 자랐다는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다고 얘기했는데, 막상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던 게 미안해졌다.
분위기가 조금씩 다운되자, 나루가 자신의 인생을 압축해 말해 주고 황급히 이야기를 마무리해 버렸다.
“그 뒤로는 쓰레기처럼 살았어. 쓰레기는 막 까마귀가 와서 쪼아대잖아. 나는 그런 쓰레기였어. 쪼아대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감정 없는 쓰레기.”
“네가 왜 쓰레기야.”
“내 인생은 더럽혀졌으니까. 그래서 쓰레기야.”
네 인생은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쓰레기다. 나루의 전 주인이 밥 먹듯이 하던 말이었다. 들을 때마다 설움이 복받쳐 오르고 억울하기까지 했지만, 짜증스럽게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가족도 없고, 갈 곳도 없고, 돈도 없고, 정말 쓰레기 같은 인생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규연의 집에서 나오면 이전과 같은 생활을 반복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루는 제 처지를 깨닫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내 인생은 쓰레기야.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했다. 무시당해도 억울하지 않고, 서러운 마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쓰레기라서, 내 인생이 쓰레기라서 이런 취급을 당하나 보다. 이렇게 살면 편했다.
규연은 속상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 정도 수준의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지 못한 소리를 들어 버려서 착잡했다.
사실 충격도 적잖게 받았다. 나루가 저렇게 차분하게 말하는 게 꼭 체념한 사람 같아서 충격적이었다. 늘 해맑게 뛰어다니던 애가 저런 표정을 다 짓다니. 가슴이 아렸다.
“이제 그만 말해도 돼.”
“궁금한 거 아니었어?”
“충분히 들었어.”
규연이 대화를 차단해 버렸다. 아픈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는 황급히 다른 주제를 던지며 말을 돌렸다.
“멋대로 붙잡아온 건 미안해. 내 생각이 어려서 하면 안 되는 짓을 했어.”
“응, 나 핸드폰으로 봤는데 그런 행동 미친놈이래. 규연이 미쳤어.”
“…….”
“그런데 나한테는 미친놈 아니었어. 머무를 곳이 생겨서 좋았어.”
검색창에 ‘갑자기 잡혀 왔어요’를 검색해 본 나루는 규연이 한 행동이 미친 짓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농장에 있을 때 잠이 안 와서 검색해 봤던 건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당황스러웠었다.
어쨌든 나루는 규연의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인해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맛보았다. 단순하게 보았을 때 용서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으나, 나루는 계속 자기가 팔려 왔다고 생각했고 역으로 좋은 영향까지 끼쳤기에 용서하기로 했다.
규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루는 가끔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굴다가도, 어떨 땐 또 어른스럽게 굴었다. 묘하게 조금씩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그랬다니 다행, 이네…….”
“응.”
“나랑 계속 같이 살래?”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규연이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건 바로 이거였다. 계속 같이 살겠냐는 질문. 이제는 제대로 제안하고, 나루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규연의 질문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나루가 쉬이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규연은 그답지 않게 마음을 졸였다. 혹시라도 나루가 같이 살지 않겠다고 대답할까 봐 불안했다.
나루는 규연과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같이 사는 동안 규연은 나루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쉽게 짜증을 냈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하나하나 잘 챙겨 줬지만, 계속 규연의 속을 답답하게 만들어도 되는 건지 고민이 됐다. 말간 낯으로 규연을 쳐다보던 나루가 은근슬쩍 물었다.
“나 안 쫓아내는 거야?”
“내가 널 왜 쫓아내.”
눈치를 보는 듯한 나루의 눈동자에 한숨을 삼키던 규연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해 주었다. 이걸 시작으로 나루의 질문이 폭탄처럼 쏟아졌다.
“내가 집을 어질러도?”
“어.”
“시리얼 입으로 먹어도?”
“…어.”
“규연이가 마음에 안 들 때 막 때려도?”
“야.”
얌전히 대답하던 규연이 평소처럼 눈썹을 찌푸렸다. 나루는 이제야 표정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 역시, 친절하기만 한 규연은 영 별로였다. 이렇게 짜증도 부려 주고, 틱틱대는 게 더 잘 어울렸다.
나루가 웃자, 규연도 작게 웃음을 흘렸다. 방금까지 굳어 있던 얼굴이 화사하게 풀어지니 훨씬 보기 좋았다. 나루가 계속 이렇게 웃기만 했으면, 하는 생각이 규연의 머릿속 한구석에 떠올랐다.
다시 원래 기운을 되찾은 나루가 힘차게 대답했다.
“응, 내가 같이 살아 줄게!”
특별히 같이 살아 준다는 뉘앙스의 말투였다. 다른 사람이 하면 기분 나쁠 법한 말인데도 나루가 하니까 마냥 당돌한 게 얄밉지 않았다. 뭐랄까, 오히려 길고양이나 강아지한테 간택 당한 느낌이었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 줘야 하냐.”
“응. 인사해. 인사는 뽀뽀로 해.”
“틈만 나면 수작이야 이게.”
나루의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던 규연이 싫은 척하며 입을 맞춰 줬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진 입술에 놀란 나루가 귀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먼저 해달라고 할 땐 언제고, 막상 해주니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웠다.
자연스레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던 규연은 마지막 하나 남은 주제를 꺼내기 위해 뜸을 들였다. 같이 살기로 결정했으니 남은 건 나루와 규연의 사이였다.
보통 스킨십이 오가고 난 후로는 암묵적으로 연인 사이라는 게 확실해지지만, 나루는 말로 해주지 않으면 모를 것 같았다. 규연은 또 오해가 생기기 전에 이 애매한 사이를 연인 사이로 확정 짓고 싶었다.
“우리 이제,”
“유규연.”
규연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나루가 선수를 쳐 규연의 이름 석 자를 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