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왕왕!
강아지 울음소리가 단지 내에 울렸다.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은 대낮에 웬 개소리가 이렇게 들리냐며 나루가 앉아 있는 곳을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갔다. 정작 나루는 자기가 주목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길강아지들과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그래서 내가 막 이렇게 감자를 던졌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아까 규연과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해 준 나루가 눈썹을 ‘ㅅ’ 모양으로 만들며 울상을 지었다. 말하면서도 화가 났는지 가슴팍과 어깨가 작게 들썩이고 있었다.
하나둘씩 모여든 길강아지들은 최선을 다해 나루를 위로해 줬다. 전부 초면인 강아지들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좋아해 주는 거 아니야? 이거 하나는 잘됐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들어주던 강아지가 나루의 손바닥을 핥아 주었다. 나름 축하해주는 거였다. 단순한 나루는 ‘좋아해 준다’라는 말에 표정을 사르르 풀었다.
“송나루.”
호다다닥.
규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길강아지들이 급히 도망쳐 버렸다. 얼마나 빠르게 도망쳤는지, 가만히 서 있던 규연이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황당한 시선으로 도망치는 강아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쪼그려 앉은 나루를 허망하게 쳐다봤다.
뒷담화를 들켰다는 기분에 민망해진 나루가 규연의 시선을 피했다. 찾으러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나온 이유가 뭐지. 괜히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졌다.
“일어나, 춥지도 않아?”
“안 추워. 크응.”
“안 춥다는 애가 코를 먹냐.”
“…크응.”
규연이 손을 내밀자 나루가 고개를 휙 돌렸다. 사실 규연이 와 준 게 좋으면서, 빨리 마음을 푸는 건 또 싫은 모양이었다. 새침한 대답에 헛웃음을 친 규연이 어서 잡으라는 듯 손을 가까이 내밀었다.
지금 나루의 옷차림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긴소매 티셔츠 하나만 입어서 추울 만했다. 늦가을이라 바람이 꽤 쌀쌀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출처 모를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서 감기라도 걸릴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이 상태로 나루를 계속 밖에 둘 수는 없었다.
규연이 나루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기다려 주다가는 밤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듯해서였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주는 척 굽혔던 무릎을 편 나루가 멀뚱히 서서 고집을 부렸다. 일어나는 것까지는 해 줘도 집에 순순히 들어가지 않겠다, 이거였다. 하는 짓이 꼭 청개구리 같았다.
“들어가자.”
“싫어.”
“…내 얼굴 보기 싫어?”
단호한 대답에 풀 죽은 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내 얼굴이 보기 싫냐고.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였다. 만약, 나루가 진심으로 보기 싫다고 하면 집을 나가 있을 의향도 있었다.
보기 드문 모습에 당황한 나루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얼굴이 보기 싫다는 건 또 아니라니, 규연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함부로 하면 또 화를 낼 것 같고. 마냥 기다려 주기에는 바깥 공기가 쌀쌀해서 신경이 쓰였다. 결국, 규연이 다시 한번 손을 이끌었다.
“싫은 거 아니면 들어가자.”
“…….”
“안 가?”
“응.”
나루의 이상한 고집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루는 여기서 따라 들어가면 쉬운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목석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은 것인데, 규연이 이런 나루의 속마음을 눈치챌 리가 없었다.
규연은 결국,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여태껏 한 번도 쓰지 않던 스킬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르지만 일단 던져 보기로 했다. 반쯤 도박이었다.
매정한 태도로 나루의 손을 놓은 그가 뒤돌아섰다. 순간 나루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갑작스러운 밀어내기에 당황해하고 있는 얼굴이 온순하니 귀여웠다.
“알겠어, 그럼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와.”
“……?”
“넌 여기에 있어. 나는 갈 거야.”
“……!”
부모님들이 마트에서 흔히들 사용하는 스킬. 너는 여기에 있어, 엄마 아빠는 갈 거야. 장난감 코너에서 특히 많이 들을 수 있는 이 말은 신기하게도 효과가 뛰어났다.
규연이 걸음을 떼자 조마조마해진 나루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걸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사이 수백 가지의 생각들이 나루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규연은 나루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게 바로 이 스킬의 요점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는 척할 것.
눈썹까지 찌푸려가며 고민하던 나루는 5초도 지나지 않아 규연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착잡해져서 일단 따라가고 본 것이다.
잘 오고 있나.
슬쩍 뒤돌아본 규연은 고개를 바로 돌려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나루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러면서 따라오지 않은 척 급하게 딴청을 피우는 게 우스웠다.
“큽…….”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낸 규연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나루는 그렇게 따라오지 않는 척 규연의 뒤를 계속 쫓아왔다. 길가에서 만난 새끼 고양이를 길들이는 기분이었다.
입구로 들어서려던 규연이 불시에 뒤를 돌아봤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루의 반응이 귀여워서 놀려 주고 싶어졌다. 화들짝 놀란 나루는 곧바로 구석에 쪼그려 앉아 개미를 구경하는 척했다.
“개, 개미다.”
쟤 진짜 왜 저래. X발, 진지한 상황에 왜 저렇게 귀엽냐고.
규연이 아파트 현관 입구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자, 차마 따라 들어오지 못한 나루가 닫히는 자동문을 절망스럽게 쳐다보았다.
투명한 자동문 너머로 나루의 뾰로통한 얼굴이 보였다. 평평한 유리에 나루의 볼이 호떡처럼 눌렸다. 자동문에 얼굴을 딱 붙이고 규연을 바라보던 나루가 볼을 부풀렸다. 들어가고 싶으니까 당장 문을 열라고 명령하는 눈빛이었다.
규연은 순순히 다가가 자동문을 열어주었다. 나루는 민망함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규연의 옆에 꼭 달라붙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조용한 복도에 나루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미세하게 울렸다. 숨소리마저 귀여운 게 미칠 지경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두 사람이 안에 올라탔다. 버튼이 눌리자마자 문이 느릿하게 닫혔다. 나루는 올라가는 동안 규연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까 이야기를 들어주던 길강아지가 ‘이제는 좋아해 주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던 게 떠올랐다.
그래, 그렇다. 규연은 분명 나루에게 좋아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나루는 전화가 아닌 면전에서 직접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어느새 화난 마음은 저 아래로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엘리베이터가 끝 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침을 꼴깍, 삼키며 눈치를 살피던 나루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규연의 몸을 복도 쪽 벽으로 밀어붙였다.
“어, 야, 잠깐, 왜 이래!”
“나, 나 진짜 좋아할 거야? 좋아하고 싶어?”
또 나왔다. 급발진으로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행동.
나루의 눈에 묘한 광기가 차올랐다. 규연은 가끔 나루가 이럴 때마다 살이 떨리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뭐랄까, 잘못 대답하면 어떤 짓을 벌일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기는 집이 아닌 복도였다. 물론 한 층을 규연 혼자 다 사용하긴 했지만, 이런 대화를 굳이 밖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루는 어디서 말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규연이 몸을 비틀려고 하자, 다리를 앞으로 뻗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온 건지 기가 막혔다.
“들어가서 얘기해.”
“대답해.”
덜커덩. 스윽.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비상구 쪽에서 소음이 들리는 걸로 보아하니, 아래층 사람이 무언가를 하고 있거나 경비가 온 듯했다. 규연은 초조함에 이마를 짚었다.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낸 규연이 나루를 살살 타이르기 시작했다.
“나루야, 제발 들어가서 얘기하자.”
“대답해, 미친놈.”
“너 진짜…….”
저놈의 욕. 다 내 잘못이지. 내가 입을 함부로 털고 다닌 잘못이다. 그래.
규연은 체념했다. 나루는 절대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불안하게 찌푸려진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규연이 나루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잡아끌어 귓속말했다. 낮게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더 달았다.
“어, 좋아하고 싶어.”
“…….”
“대답이 됐어?”
다정한 대답에 나루의 얼굴과 귀가 새빨갛게 익었다.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이었는데, 막상 들으니 심장이 쿵쿵 뛰는 게 이상했다. 의외로 망설이던 규연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의 올곧은 표정이 나루의 마음을 더 살랑이게 만들었다.
뭐에 단단히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나루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손이 꼼지락거리고,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규연은 고개를 살짝 숙여 나루의 안색을 살폈다. 방금까지 또박또박 잘도 말하던 애가 조용해져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싶어 살펴본 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나루를 더 부끄럽게 했다.
“송나루, 갑자기 왜 그래.”
“너!”
대뜸 소리를 내지른 나루가 규연을 벽으로 더 밀어붙였다. 하여간 방심할 틈을 안 줬다. 조용히 놀란 규연이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섰다.
뭘 하려는 거지.
나루의 표정이 점점 비장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규연이 앞으로의 행동을 추측하고 있을 때 즈음, 나루가 발꿈치를 들며 폴짝 점프했다.
“으윽……!”
자신만만하게 뛰어오른 나루가 규연에게 입술 박치기를 시전했다. 자기 딴에는 설레는 입맞춤이었지만, 규연에게는 거의 입술 폭행 수준이었다. 입술이 나루의 앞니에 찍혀 고통스러웠음은 물론이고 핏방울까지 맺혔기 때문이다.
나루는 규연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제 할 말만 이어갔다.
“네가 처음부터 오해했었다는 건 정말 화나는데, 나 좋아해 준다고 하니까 참는 거야.”
“…….”
“이번만 넘어가는 거야. 알겠지?”
피가 줄줄 흐르는 입술을 손으로 틀어막던 규연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나루가 목이라도 조를 것 같았다.
규연의 대답에 뿌듯함을 느낀 나루가 다시 한번 점프했다. 힘이라도 조절해 가면서 달려들면 상관없는데, 나루는 전력으로 안겨들었다. 게다가 피가 터진 곳에 또 한 번 입술 박치기를 해 왔다.
이제는 입술이 따끔거리다 못해 쓰라렸다. 그래도 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앞에서 배시시 미소 짓고 있는 나루의 얼굴이 눈부시게 맑고 예뻐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