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30)


차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막혀왔다. 일부러 창문을 연 규연은 나루의 눈치를 보며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며칠 사이에 본 나루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농장에서 고생을 꽤 했는지 볼이 홀쭉해져 있는 게 안쓰러웠다.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간혹 규연이 질문을 던졌으나 돌아오는 답은 평소 같지 않았다.

“아침은 먹고 나왔어?”

“아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없어.”

나루는 일부러 쌀쌀맞게 대답했다. 규연이를 봐서 좋긴 했지만, 바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면 만만히 보일까 봐 참고 있는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규연의 품에 안겨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창문만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거리가 눈에 보였다. 나루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여기야.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야.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심호흡하는 동안 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벌써 규연의 집에 도착한 것이다. 나루는 규연이 내리기도 전에 먼저 문을 열고 내려 높은 건물을 쳐다보았다.

“들어와.”

“응!”

“…….”

“아, 응.”

저도 모르게 힘껏 대답한 나루가 다시 목소리를 다운시켰다. 조금만 방심해도 본심이 튀어나오려는 게 위험했다.

새침한 표정으로 규연을 지나쳐 간 나루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버튼을 누르고 가만히 기다리니 엘리베이터가 소리 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덜컥.

드디어 집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나루는 냄새부터 맡았다. 입구부터 느껴지는 규연의 향이 나루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일단 옷부터 편하게 갈아입어.”

“이거 아침에 갈아입은 거야.”

“네 옷 아니잖아.”

규연이 옷을 갈아입고 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집으로 오는 동안 계속 신경 쓰였던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나루의 옷이었다. 규연은 나루에게 저런 옷을 사 준 적이 없었다. 어디서 얻어 입은 건지 상의가 나루의 몸보다 두 배는 더 컸다.

디자인을 봐서는 규연 또래의 젊은 사람이 빌려준 듯한데, 그게 영 못마땅했다. 이 와중에 옷 하나로 질투하는 자신이 어이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루도 규연이 질투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걸까. 얌전히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주었다.

규연은 나루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디저트를 꺼내 왔다. 형형색색의 마카롱과 케이크들을 접시에 예쁘게 담은 뒤 탁자 위에 올려놓자, 타이밍 좋게 나루가 나왔다.

“앉아. 우리 얘기해야 하잖아.”

“…….”

나루가 아무 말 없이 앉아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연보라색 마카롱이 몇 개나 나루의 뱃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규연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답답함을 느낀 나루는 어서 말하라는 듯 미간을 좁혔다. 계속 앉혀놓고 있어 봤자 인내심만 바닥나는 거였다.

“그날, 무턱대고 화내서 미안해. 원래 내가 찾던 졸부가 있었어. 뒤에서 내 소문을 거지 같이 내고 다녔거든. 나는 걔를 찾으려고 했던 건데, 자료 조사가 부족해서 애먼 너를 붙잡아오게 된 거야.”

규연이 여태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루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이게 다 무슨 일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졸부? 소문? 자료 조사가 부족해? 모두 나루가 모르는 얘기였다.

“난 네가 뭐라고 반항도 안 하길래 맞게 잡아 온 줄 알았어. 중간부터는 이상한 걸 깨달았지만 기본적인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다고 생각했고. 그날, 너한테 화를 낸 이유는 네가 이 사실을 다 알면서 상황을 이용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어.”

죄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루는 규연이 불같이 화를 냈던 이유를 이제야 처음 알았고, 상황 따위 이용한 적 없었다. 애초에 규연이 찾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더라면 주인 대하듯 들이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루의 표정이 돌에 맞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좋아하고 싶다는 규연의 말에 들떠서 온 건데, 막상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을 들으니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속내가 점점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건후의 말대로 모두 규연이 착각한 거였다. 그 착각으로 인해 나루는 상처받았고, 집에서 도망쳐 나와 세상이 이렇게 험하다는 걸 몸소 깨닫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규연이 보고 싶어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는데, 그랬는데…….

“나도 그날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앞뒤 생각 못 하고 너한테 상처를 줬어. 미안하다.”

“…네가 다 오해한 거야? 나 잘못한 거 없어?”

“어, 너 잘못 없어. 내가 다 잘못한 거야. 미안해.”

유규연 이 나쁜 또라이.

나루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여태껏 당했던 일들이 억울해졌다. 규연이 쌀쌀맞게 대했던 게 다 오해 때문이었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규연의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나를 그 졸부라고 생각해서 좋아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구나.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혼자만 들떠서 좋아하고, 규연을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자가 나타났다며 행복해한 거 같아서. 뭐랄까, 현실을 받아들이니 진짜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규연이가 보던 게 내가 아니었어.

“내가 너한테 옷도 받고, 밥도 얻어먹고, 집도 신세 졌지만, 나는 그냥 네가 진짜 날 택한 줄로만 알았어. 그래서 처음으로 대가 없이 받는 줄 알았단 말이야.”

대가 없이 받는 것. 그래, 나루는 대가 없이 받는다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이제 진짜 정상적인 주인을 만난 줄 알고 마냥 좋아했다.

“그런데 네 말대로라면 나는 모르는 사람한테 빌붙어서, 나를 좋아한다는 착각까지 하고, 바보처럼 굴었다는 거네?”

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럴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대화가 안 좋게 흘러가고 있어 당황스러웠다. 나루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모두 사실인 듯 사실이 아니었다.

처음은 모르는 사람이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고, 좋아한다는 착각도 지금 좋아하고 있으니 마냥 착각이 아니었다.

나루의 말에 규연이 고개를 저었다. 원망이 더 깊어지기 전에 현재 마음을 말해줘야 할 거 같았다.

“송나루,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상처받았어!”

“잠, 아악!”

“유규연 X발, 멍청아!”

결국, 나루의 화가 폭발해 버렸다. 서툰 욕설과 함께 흙 묻은 감자가 규연에게 날아들었다. 나루가 농장에서 받아 온 감자를 무기 삼아 던진 것이다. 그것도 아주 힘껏.

퍽!

얼떨결에 생감자에 처맞은 규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뭐가 지나간 거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감자 하나가 더 날아와 가슴팍에 맞고 떨어졌다. 동시에 질척한 흙이 옷에 묻어 얼룩을 남겼다.

“야, 송나루, 잠깐 진정 좀…!”

“어쩌라고! 어쩌라고!”

봉투 안에 가득 담겨 있던 감자는 모두 규연을 공격하는 데 쓰였다. 거실은 어느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감자들이 바닥에 마구 굴러다니고, 흙이 떨어져 대리석 위가 더럽혀져 있었다.

규연이 나루의 팔을 붙잡자 이번에는 반대쪽 팔이 날아왔다. 망설임 없이 머리를 내려치는 주먹이 다부졌다. 퍽, 퍽 소리가 나도록 때리던 나루는 제풀에 지쳐 숨을 씩씩거렸다.

“나 진짜 억울해.”

“송나루, 어디 가.”

“친구 만날 거야.”

“네가 친구가 어디 있다고 나가.”

“나도 친구 있거든! 지금은 너 안 볼 거야.”

던질 감자가 남아있지 않자, 나루가 벌떡 일어서서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규연이 황급히 뒤를 따랐으나, 나루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뜸 친구를 만나겠다며 신발을 신은 나루는 현관문을 거세게 닫고 나가 버렸다.

쿵!

규연의 얼굴이 또다시 멍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상황 파악을 뒷전으로 넘긴 규연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 나루의 손을 붙잡았다. 겨우 집까지 데리고 왔는데 또 이렇게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 있어, 응?”

“마음 진정시키고 올 거야, 이거 놔!”

“내 방에서 진정시켜, 굳이 밖으로 갈 필요 없잖아. 너 또, 윽!”

나루 좀 붙잡아 보려다가 봉변을 당했다. 규연이 쉽게 보내주지 않자 나루가 손을 깨물어 버린 것이다. 일부러 송곳니를 세워 깨물었더니 규연의 엄지손가락 위에 자그마한 상처가 남았다.

순간 마음이 약해질 뻔한 나루는 벙찐 규연을 그대로 두고 달아나 버렸다. 집에 다시 들어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까지 야무지게 남기고서 말이다.

복잡한 눈으로 나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규연이 포기한 채 집으로 들어왔다. 넓은 거실에 규연의 한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체 친구가 어디 있다고 나간 거야…….”

거실에 난 통창으로 바깥을 살펴보던 규연이 나루의 동그란 뒤통수를 발견했다. 화났다는 걸 티 내며 어깨를 들썩거리던 나루는 아파트 단지 안,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

놀이터 옆, 구석진 사각지대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나루는 잔디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누군가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진짜 누가 있는 건가.

의아한 눈으로 나루를 자세히 살펴보던 규연은 잠시 후 등장한 친구의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나루의 곁으로 다가와 앉은 건, 다름 아닌 길강아지였다.

“쟤 지금 뭐 해……?”

차라리 보이는 곳에 있어서 다행인가. 아니, 그걸 떠나서 길강아지랑 저게 뭐 하는 거지.

5분 동안 나루를 지켜보던 규연은 시선을 떼고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저 상태라면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어질러진 바닥을 쓸고 닦고, 감자까지 모두 주워 담으니 20분이 지나 있었다.

규연은 다시 창문 너머로 나루를 바라봤다. 잠깐 사이에 길강아지가 두 마리 더 늘어 있었다. 강아지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는 나루는 무어라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설마, 저 길강아지들한테 나랑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친구가 길강아지일 수 있는 걸까.

규연이 없는 사이 나루가 확실히 힘들긴 했나 보다. 아니면 잠을 못 잤다거나. 그렇지 않은 이상 저런 이상한 짓을 할 리 없었다.

병원부터 데려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규연이 나루를 데려오기 위해 집을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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