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진짜 나빠. 난 아무것도 몰라. 네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른단 말이야. 그냥 네가 날 데려와서 좋았고, 평생 같이 잘 지내고 싶었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나루는 굴하지 않고 제 심정을 솔직히 이야기했다. 중간중간 튀어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느라 억눌린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난 잘못한 거 없어. 네가 잘못한 건데, 왜 내가 더 상처받아야 해?”
- 네 말대로 내가 잘못한 거 맞아. 그러니까 제발 얼굴 보고 사과하게 해 줘.
아니라고 박박 우길 줄 알았던 규연이 쉽게 인정했다. 심지어 얼굴을 보고 직접 사과하겠다며 수그리기까지 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나루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라고 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는 뭐 어떻게 하는 거지. 고민하던 나루는 생각했던 말만 무작정 뱉고 봤다.
“사과하면 뭐. 네가 다시 나 좋아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누군가의 마음만 바라보면서 갇혀 지내는 거, 이제 진짜 싫거든. 호구같이 안 당할 거야.”
이번에는 규연의 목소리가 재깍 들려오지 않았다. 나루는 대답을 기다리며 손을 벌벌 떨었다.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처음이라, 가슴이 쿵덕거리다 못해 숨이 멎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핸드폰 너머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규연이 답답함을 삼킬 때마다 내는 소리였다. 나루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규연이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좋아하고 싶어.
“…어?”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 그러니까 지금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 줘.
폭탄 같은 말이 눈 깜빡할 사이에 쿵, 하고 떨어졌다. 나루는 규연의 말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좋아하고 싶어.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
좋아하고 싶다는 건, 그러니까, 다시 좋아해 주겠다는 말인가. 멍하게 있는 사이 규연의 목소리가 두어 번 더 들려왔다. 여보세요? 따위의 말들이었다.
허망한 눈으로 밭을 바라보던 나루가 고개를 살살 끄덕였다. 규연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꼭 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 말 듣고 있어?
“응…….”
-지금 데리러 갈게.
“어, 아, 아니야. 안 돼.”
-왜 안 돼. 내 얼굴 보기 싫어?
나루는 곤란했다. 규연이 지금 당장 데리러 온다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일 아침부터 다시 감자를 캐야 하는데. 아직 농장주에게 그만둔다는 말도 못 했는데…….
속상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묻던 규연이 나루의 답을 기다렸다. 대체 어떤 이유로 안 된다고 하는 건지 착잡한 모양이었다.
“아침에 감자 캐러 가야 해.”
-뭐……?
“나 아침에 일해. 그런데 아저씨한테 말하면 빨리 끝날 수도 있고…….”
핸드폰 너머로 규연의 황당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감자를 캐러 간다는 말이 왜 나온 걸까.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규연의 걱정이 배로 불어났다.
성실한 농장 알바생이 된 나루는 눈앞의 문제보다 감자 캐기를 더 중요시하고 있었다. 처음 구한 일자리인데 새벽 사이에 무단으로 도망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농장주 아저씨도 나름 잘 대해 줬고, 그리 마음에 들지 않지만 건후라는 친구도 생겨서 마음대로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침에 데리러 와.”
-하아, 잘 곳은 있는 거고?
“응. 밥도 먹었어.”
-주소만 미리 보내줘. 내일 아침에 바로 데리러 갈게.
“…응!”
먼저 전화를 끊은 나루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영부영 전화를 이어가긴 했지만, 규연이 했던 말이 아직도 꿈 같아서 믿기지 않았다.
좋아하고 싶다니, 좋아하고 싶다니!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유규연이 날 좋아해.
농장 입구까지 달려간 나루가 도로명 주소판을 찍어 규연에게 전송했다. 단호하던 표정은 어느새 솜사탕마냥 몽글몽글하게 풀려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루는 규연이 좋았다. 내일 아침에 규연의 얼굴을 보면 아까와 같이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리라 다짐했지만, 아무도 없는 지금은 마음껏 행복해하고 싶었다.
드디어, 드디어 규연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듣고도 단호함을 유지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예상컨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지잉.
나루가 주소를 보내자 규연에게서 곧장 답장이 도착했다.
[내일 봐. 잘 자고.]
심플하지만 걱정이 듬뿍 담긴 메시지였다. 나루는 답장을 보내는 대신 홀드키를 누르고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일손이 부족하지 않도록 감자를 캐 놓고, 농장주와 건후에게 작별 인사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캄캄한 방으로 돌아온 나루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늘 편하게 자지 못해서 몸이 예민했는데, 같은 환경인데도 이상하게 오늘따라 잠이 잘 왔다.
* * *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다섯 시. 풀 내음과 새 소리에 눈을 뜬 나루가 세수를 마치고 나왔다. 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나오니 저 멀리 농장주와 그의 부인이 보였다. 나루는 후다다닥, 뛰어가 농장주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도 일찍 일어났네. 역시 제일 성실해.”
“저, 오늘까지만 일해야 해요.”
서론도 없이 본론부터 꺼내놓은 나루가 멋쩍게 웃었다. 잠시 당황스러워하던 농장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루의 등을 토닥여 줬다. 단기 아르바이트이기도 했고, 나루처럼 젊은 사람이 이만큼 버틴 게 대단했다.
아무래도 농장이다 보니, 돈에 혹해 온 젊은이들은 차라리 그 돈 안 받고 말겠다며 다시 돌아가곤 했다. 반복 작업이라고 해도 농사라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루는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감자를 캐고, 동네 강아지들 밥까지 챙겨 줄 때도 있었다.
이런 나루를 좋게 본 농장주는 그만둔다는 말에 웃으며 보내주고, 심지어는 감자까지 가지고 가라며 챙겨주었다.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챙겨준 감자를 한쪽 구석에 놓은 나루가 호미를 들고 밭으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태도가 기특해 예뻐 보일 정도였다.
이른 새벽부터 감자를 캐던 나루가 하나둘씩 모여드는 아저씨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심한 인사에 대충 손을 흔들어주던 아저씨들이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처음에는 그렇게 텃세를 부리더니, 마냥 떠난다니까 아쉬운 모양이었다.
“흐아암, 너 또 일찍 나왔어?”
“응. 너처럼 게으름뱅이 아니야.”
하품을 하며 나온 건후에게 핀잔을 주듯 대꾸한 나루가 장난스레 웃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건후는 무언가 알아챈 표정을 지었다.
유독 해맑은 웃음, 걱정 따위 사라진 얼굴. 하루 사이에 나루의 안색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너 어제 그 사람이랑 전화했지.”
“어떻게 알았어?”
“네 얼굴만 봐도 알겠다. 그래서, 오늘 떠난다고?”
“그건 또 어떻게 알아?”
“모르는 게 이상하지. 얼굴이 활짝 폈는데.”
건후는 나루의 생각보다 더 눈치가 빨랐다. 나루가 멍때리는 사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간 건후가 제 번호를 꾹꾹 누르고 저장시켰다.
<짱친 건후>
핸드폰을 건네받은 나루가 화면에 적힌 글자를 빤히 응시했다. 짱친 건후. 나루는 건후가 설정한 이름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조용히 발음해보았는데 어감이 나쁘지 않았다.
“짱친이 뭐야.”
“진짜 친하다는 뜻.”
“…….”
“푸핫! 야, 너 표정 겁나 웃겨.”
나루의 표정이 오묘하게 썩어들어갔다. 건후는 그런 나루의 표정을 한껏 비웃어 줬다. 진짜 친한 친구 사이처럼 말이다.
나루에게 친구라는 개념은 조금 생소했다. 규연이는 친구라고 하기엔 조금 더 가까웠고, 서연은 조금 더 먼 느낌이었다. 하지만 건후는 정말 친구 같았다. 편한 얘기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사이.
“감자를 얼마나 열심히 캔 거래. 숙소 가서 씻고 나와. 너 그러고 그 사람 만나게?”
“왜?”
“꼬질꼬질해.”
“옷 빌려줘.”
마지막까지 건후에게 옷을 빌린 나루가 숙소 샤워실로 들어와 몸을 씻어냈다. 건후의 하늘색 반소매 티셔츠는 나루에게 많이 컸다. 그래도 뽀얀 피부에 연하늘색 티셔츠를 입혀 놓으니 분위기가 부들부들한 게 잘 어울렸다.
말끔한 차림으로 나온 나루가 한 손에 감자를 챙겨 들었다. 농장주가 기껏 생각해서 챙겨준 감자라 보물처럼 여겼다. 밭 가운데에 껄렁한 자세로 걸터앉은 건후는 농장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나루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쟤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으려나. 괜히 궁금하네.
감자를 캐는 척하며 농장 입구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중, 차 한 대가 근처에 멈춰 섰다. 이런 곳과 어울리지 않는 외제 차였다.
“송나루.”
운전석에서 내린 건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그것도 빼어나게 잘생긴 남자. 키도 크고, 얼굴도 곱상하니 잘생긴 게 안 좋아할 수가 없는 외모였다.
감자가 든 봉투를 들고 서 있던 나루는 제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규연에게 다가갔다. 조금만 방심해도 발걸음이 들떠서 꼬일 것 같았다.
평소와 달리 꾸미고 오지 않은 규연은 전보다 초췌해 보였다. 살이 빠져서 턱선은 더 날카로워졌고, 눈 밑은 묘하게 퀭했다. 대충 입고 온 차림인데도 후줄근해 보이지 않는 게 신기했다.
넓게 펼쳐진 밭을 한 번 둘러보던 규연이 이마를 짚었다. 설마 나루가 이런 곳까지 왔을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일단 가자, 타.”
“안녕히 계세요!”
농장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나루가 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보고 있을 건후에게 인사를 하는 거였다. 규연은 나루의 어깨를 감싼 채 조수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수석 문이 닫히고,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은 규연이 천천히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돌렸다. 농장 한 편에 서 있던 외제 차가 빠져나가자 입구가 휑해졌다.
멀리서나마 규연의 얼굴을 구경하던 건후는 찝찝한 기분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랄까. 규연을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었다.
보기 드문 얼굴이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저 얼굴은 어디서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내가 저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분명 봤는데…….”
한참 생각하던 건후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헉, 소리를 냈다.
“저거, 설마 규연이 형?”
건후는 규연을 알고 있었다. 친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YK전자의 막내아들. 제멋대로 사는 자유인.
주요 키워드를 떠올리니 머릿속에 규연의 얼굴이 확실히 그려졌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쩌다 만났고,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어버린 걸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에라이. 잡생각을 떨쳐버린 건후가 호미질을 힘차게 이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