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30)


나루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충전시켜 놓았던 핸드폰이 진동음을 시끄럽게 울려댔다. 옷을 챙기던 건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나루의 핸드폰을 슬쩍 훔쳐봤다.

잠금 화면 위로 누군가의 연락이 무수히 쌓여 있었다. 문자는 물론이고 앱 메시지, 전화까지 쉴 새 없이 걸어댄 모양이었다.

나루는 처음부터 쭉 이상했다. 어영부영 농장 가는 차에 탄 것도,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마지막으로 밤마다 혼자 빠져나가는 것도.

무언가 사연이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사정이 더 안 좋은 듯했다. 

밀려드는 문자와 전화는 모두 사채업자에게서 온 것일 테다. 사채업자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끈질기게 연락을 한단 말인가.

“뭐 해?”

“깜짝이야.”

“내 핸드폰 충전 다 됐어?”

“아니, 아직 안 됐어. 그러니까 그전까지 얘기 좀 하자.”

씻고 나온 나루가 젖은 머리를 탈탈 털었다.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머리를 터는 게 꼭 강아지 같았다. 상쾌하게 씻어서 그런지 들어가기 전보다 기분이 좀 괜찮아 보였다.

건후는 맛있는 걸 사 준다는 핑계로 나루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건후를 쳐다보던 나루는 맛있는 거란 말에 순순히 뒤를 쫓아 나왔다.

숙소 앞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둘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건후는 냉장고에서 미리 꺼내 온 보리차를 종이컵에 따라 건넸다. 코를 킁킁거리던 나루는 고소한 냄새에 눈을 반짝이며 보리차를 원샷해 버렸다.

“캬아.”

“그걸 한꺼번에 다 마시냐, 너는…….”

“뭐.”

“아니야, 아니다.”

종이컵 끝을 잘근잘근 씹던 나루가 눈을 부라렸다. 아저씨들 앞에서는 눈치를 살살 보며 피하더니, 건후에게는 가차 없이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보리차를 한 잔 더 따라 준 건후가 타이밍을 보기 시작했다. 그 핸드폰을 봤는데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꼭 물어보고 싶었다.

나루가 보리차 두 잔을 원샷할 때 즈음, 건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야,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그래서 여기 온 거지?”

“…….”

“왜 대답을 안 해.”

“왜 캐물어?”

순진하게 생겨서 의심이 왜 저리 많은지. 어디 가서 당하고 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루는 건후를 경계하며 한 걸음 물러나 앉았다. 순순히 대답하지 않겠다는 무언가의 의지였다.

하지만 건후도 집념이 대단했다. 그는 나루에게서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제 비밀도 하나 까기로 마음먹었다.

“궁금하니까. 내 비밀 하나 깔게, 대신 너도 알려줘.”

“…안 궁금한데.”

“비밀이 안 궁금해? 안 궁금하다고?”

“알겠어, 말해.”

반강제적으로 비밀 이야기가 시작됐다. 나루는 건후의 비밀이 딱히 궁금하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둘 사이의 공기가 잠시나마 묵직해졌다. 늘 장난스러운 말투로 틱틱거리던 건후가 목소리 톤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눈동자는 어느새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부모가 있긴 있는데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니, 없는 거지 거의.”

“…….”

“놀랐냐?”

“아니, 나도 없어. 우리 엄마는 동생이랑 차에 치여 죽었어.”

누가 누가 더 불행한지 대결하는 것 같았다. 나루는 평온한 얼굴로 제 가족사를 밝혔다. 건후는 상상치도 못한 말에 두 눈을 멍하니 깜박거렸다.

돌아온 대답이 너무나도 처참해서 할 말을 잃은 건후와는 달리, 정작 나루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건후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 당황스럽네. 그렇구나.”

“응. 이제 내 비밀 얘기하면 돼? 네가 아까 물어봤던 거.”

“아, 어. 어 그래…….”

이미 서로 비밀 얘기를 주고받은 것 같은데, 나루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것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은 나루에게 있어 비밀 이야기가 되지 못한 걸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건후가 불안한 눈으로 나루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또 어떤 말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지 두렵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나루는 요 며칠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 놓았다. 모두 규연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버려졌어.”

“버려졌다고?”

“응.”

조금 더 묵직한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버려졌다니. 차이고 차고 하는 건 연인 사이에서 충분히 있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도 흔히들 겪었다. 그런데 나루는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나루에게는 규연이 제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잘해 줬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건후가 이런 자세한 사정까지 알 리 만무했다.

“왜 버려졌는데.”

“걔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아니었어.”

“너 혼자 착각한 거라고?”

“…응. 분명 걔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았어. 그런데 걔가 찾던 게 내가 아니었대.”

그래서 쫓겨났어.

이야기의 끝이 서글프긴 했다. 쫓겨났다니. 건후는 대충 나루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달았다. 그 사람과 동거하며 마음을 키웠고, 잘못 어긋나서 쫓겨난 뒤로 갈 곳을 잃은 듯했다.

나루는 안쓰러운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니 규연이 더 보고 싶어져서 괴로웠다. 건후는 나루를 빤히 쳐다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그런데 그 인간도 제정신 아니네.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여지를 줘?”

“내가 계속 좋아해 달라고 졸랐으니까.”

“너도 참 특이하다. 아무튼, 네 잘못은 없는 거잖아. 그 사람이 찾는 게 네가 아니었다며. 그럼 그 사람 잘못이지, 왜 네가 뛰쳐나와.”

맞는 말이었다. 애초부터 규연이 나루를 송나운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루 혼자 이 세상에 잘 적응해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순간 나루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쫓겨나온 뒤로 그저 세상 사는 게 힘들어서 규연이 보고 싶었는데,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려 보니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당장 앞에 닥친 일이 무서워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잘못은 내가 아니라 규연이가 한 거였지.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쫓겨난 거잖아.

물렁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단단해졌다. 나루의 두 눈이 다시 단호해지자, 지켜보던 건후가 장난스레 웃었다.

“너 호구 될 뻔한 거 내가 살렸다.”

“나 호구 아니야.”

“그 사람한테 전화하려고 핸드폰 켰으면서, 웃기시네.”

“그, 그건 맞지만.”

나루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까까지 규연에게 전화하지 못해 안달이었으면서, 애써 쿨한 척 고개를 돌리는 꼴이 귀여우면서도 웃겼다. 킥킥거리며 나루를 놀려대던 건후는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충고해 줬다.

“먼저 사과할 때까지 받아 주지 마.”

“으, 응.”

“이거 벌써 글렀네. 절대 먼저 전화하지도 말고.”

“…왜?”

먼저 전화하려고 했던 나루가 찔려서 되물었다. 건후는 답답한 숨을 내뱉으며 가슴께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네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은데, 이 세상에 또라이들 많아. 특히 연인 사이에서는 더 많다고. 네가 먼저 전화한다고 치자. 만약, 그 사람이 너한테 왜 전화했냐고 화내면 어쩔 건데.”

쿠궁. 말만 들었을 뿐인데 나루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여태 규연이 자신을 찾아 줄 거라고 다짐하기만 했지, 화를 낼 거라는 생각은 안 했었다. 어쩌다 보니 제 좋을 대로 생각한 거다.

진짜 그렇네. 나만 보고 싶은 거면 어떡하지…….

“너 진짜 호구 되고 싶냐?”

“아니.”

“그럼 내 말대로 해. 먼저 전화하지 말라고, 엉?”

나루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호구 소리를 듣는 게 진심으로 싫은 모양이었다. 짧은 비밀 이야기를 끝낸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일이 있어서 충분히 자 둬야 했다.

피곤했던 건후는 씻고 나와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나루도 그 옆에 누워 최대한 몸을 말았다. 언제 봐도 불편해 보이는 자세였다. 건후는 나루가 편히 누울 수 있도록 공간을 벌려 주고, 충전된 핸드폰을 머리맡에 슬쩍 놓아 두었다.

나루는 켜진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잠금 화면은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규연이 자기를 찾지 않았을까 봐 무서워서 화면을 볼 수가 없었다.

“잘 자라.”

“응.”

이불 속으로 파고든 나루가 제 엉덩이와 머리를 더듬거렸다. 다행히 오늘은 꼬리와 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제발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라.

지잉.

속으로 기도하며 잠들려고 할 때 즈음, 머리맡에서 진동이 울렸다. 0.1초 만에 반응한 나루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화면에는 규연의 이름이 떠 있었다. 메시지인 줄 알았더니, 전화였다. 나루는 고민했다. 이 전화를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먼저 걸지 않았으니 받아도 되는 거 아닐까.

땀이 배어난 손으로 핸드폰을 쥐었다 폈다 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를 빠져나왔다. 전화 진동음은 여전히 끊기지 않고 울려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차린 나루가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천천히 귓가에 가져다 대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여보세요, 송나루?

3초의 정적이 흐른 뒤, 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보다 조금 더 갈라지고 낮아진 목소리였다.

-듣고 있는 거 맞지. 너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전화도 안 받고.

“…네가 나 거부했어. 내가 뛰쳐나온 게 아니라, 네가 쫓아낸 거야.”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한 나루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참기 위해서다. 단호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은 규연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루는 이때다 싶어 마음에 쌓아두었던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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