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거지 같았다. 핸드폰도 안 되고, 지내는 곳은 지하실을 떠올리게끔 하고, 아저씨들은 무섭고. 감자를 캘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나루는 금세 규연을 그리워했다.
미운데 안 밉고, 짜증 나는데 보고 싶고. 누가 봐도 사랑이었다.
건후를 떼어내고 샤워실로 들어온 나루가 찬물을 맞았다. 늘 따듯한 물로 씻다가 찬물로 씻으려니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래도 찝찝한 몸을 좀 씻어내니 상태가 전보다 쾌적해졌다.
조명이 깜빡이는 샤워실에서 위태롭게 씻고 나온 나루가 다시 더러운 옷을 껴입었다. 옷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 입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제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던 건후는 나루를 발견하자마자 경악했다. 기껏 씻어 놓고 다시 흙 묻은 옷을 입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야, 너 옷 안 가지고 왔어?”
“응.”
“와, 심각하다. 그렇다고 그걸 다시 껴입냐.”
“…….”
나루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건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방으로 들어가 제 옷 한 벌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무런 무늬도 그림도 없는 흰색 반소매 티셔츠였다.
조심스레 옷을 받아 든 나루가 고개를 까딱였다. 나름 감사 인사를 하는 거였다. 샤워실로 들어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건후의 표정이 그제야 평온해졌다.
나루의 행색을 훑어보던 그는 다시금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너 그 바지는 좀 벗어라. 어차피 남자들끼리 있는데.”
“시, 싫어.”
“아니, 그 더러운 걸 입고 자겠다고? 바지는 못 빌려줘.”
“싫다고!”
“고집 졸라 세네.”
티셔츠는 깔끔해졌으나 바지는 여전히 더러웠다. 저 옷을 입고 이불에 들어갔다가는 아저씨들에게 욕을 처먹을 게 뻔했다. 건후보다 덩치가 한참 작은 나루에게 티셔츠는 무척이나 컸다. 바지를 벗어도 속옷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싫다고 말하며 고개를 젓던 나루가 뒷걸음질 쳤다. 건후는 악의 없이 다가가 바지를 빼앗으려고 했다.
“아 좀 벗으라니까? 더럽다고.”
“싫어, 비켜!”
팽팽한 신경전이 시작됐다. 나루는 벗지 않으려고 애썼고, 건후는 어떻게든 벗기려고 했다. 한참 그렇게 실랑이하던 중, 두 사람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서 뭣들 하냐. 건후 이 자식아, 왜 애를 괴롭혀.”
“아저씨는 신경 끄시지. 괴롭히는 게 아니라 도와주려는 거라니까.”
“도와주긴, 쯧. 저놈 얼굴 좀 봐라, 퍼렇게 질린 거 안 보이냐.”
뒤늦게 나루의 낯빛을 확인한 건후가 미안해하며 떨어졌다.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이성적으로 보니 상황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머쓱한 태도로 목 언저리를 긁적이던 건후가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으나, 나루는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는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건후까지 씻고 나오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아저씨들은 냄새나는 이불을 바닥에 펼쳐 놓고 하나둘씩 누워 자기 시작했다. 물론 나루도 그사이에 섞여 있었다.
늘 담요의 포근한 냄새에 취해 잠들었는데, 쉰내 나는 곳에서 자려니 힘들었다.
나루의 옆자리에 베개를 던진 건후가 긴 다리를 뻗고 누웠다. 구석에 박혀 있던 나루는 더 깊숙이 들어가 몸을 말았다. 단체 생활은 정말이지 고단했다.
“내가 뭐 잡아먹냐?”
“…….”
“야, 거기 벌레 기어간다. 이리 오는 게 좋을,”
퍽!
나루의 등을 쳐다보며 웃던 건후가 기어가는 벌레를 발견했다. 낡아서 그런지 바닥이나 벽에 벌레 몇 마리가 보였다. 겁주는 식으로 경고하던 건후는 이어지는 나루의 행동에 떡하니 입을 벌렸다.
벌레 한 마리도 못 잡게 생긴 나루는 바퀴벌레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 작은놈도 아닌 큰놈을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바퀴벌레는 절대 손으로 못 잡는 건후가 박수를 쳤다.
“와, 그걸 맨손으로 때려잡아?”
“…….”
손바닥을 이불에 닦은 나루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이제 말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귀신같이 알아들은 건후는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덧붙이다가 이내 곯아떨어졌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자는 스타일인 듯했다.
먼저 눈을 감은 나루는 두 시간이 지나도 잠들지 못했다. 자꾸만 규연이 생각나서 괴로웠다. 심지어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지하실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냥 자자. 규연이 생각하지 말고 자는 거야.
억지로 잠을 청하려던 나루는 얼마 가지 않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다시 들어갔던 귀와 꼬리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뿅 하고 올라온 귀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혼자 있는 공간이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지금은 여러 명이 나루의 근처에 있었다. 이 모습을 들키기 전에 어서 방을 빠져나가야 했다.
살금살금 일어난 나루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모든 사람이 잠에 취해 있었다. 조심스레 밖으로 나온 나루는 숙소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밭까지 도망쳤다.
밭 끄트머리에는 작은 창고가 하나 있었다.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였다. 멧돼지라도 마주칠까 무서워 벌벌 떨던 나루는 곧장 창고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제는 이곳도 무서웠다는 거다. 어두컴컴하고, 폐쇄적이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귀와 꼬리까지 나온 탓에 코가 예민해져서 곰팡이 냄새가 더 심하게 느껴졌다.
구석에 몸을 숨긴 나루는 쪼그린 상태로 누워 눈물을 훌쩍였다. 규연에게 후회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정작 제일 후회하고 있는 건 나루였다. 밖에 나와서 고생해보니 세상이 참 험악했다.
“크응, 규연아…….”
핸드폰은 여전히 말썽이었다. 규연에게 전화를 걸려고 해도 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나루는 상처받아도 괜찮으니 규연이 자기를 다시 거두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풍성한 꼬리를 말아 품에 쥔 나루가 몸을 덜덜 떨었다. 춥고, 배고프고, 졸렸다. 노숙자가 된다면 항상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아아아아아악!
“흐악!”
근처에 있는 산에서 남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루는 귀를 틀어막고 눈을 꾹 감았다. 비명이 여러 번 들리는 걸로 봐서는 남자가 아니라 고라니 울음소리 같았다.
나루는 정체 모를 동물이 창고 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문 앞을 철저히 막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농기구 사이에 몸을 숨겼다.
밤은 더럽게 길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빌던 나루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쌓인 피로가 몰려들어 잠이 쏟아졌다.
이른 아침, 겨우 밤을 보낸 나루가 눈을 떴다.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서인지 온몸이 다 찌뿌둥했다.
창고 안에 작게 난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날이 밝아지니 그나마 공포감이 좀 가셨다.
끼익.
문을 열고 나온 나루가 휑한 밭을 둘러봤다. 엉덩이와 머리를 더듬거려 보니 밤새 귀와 꼬리가 사라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어, 저기 있다. 야! 어디 갔나 했더니 먼저 출근했던 거였어?”
“어…….”
밭으로 막 들어오던 건후가 나루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뛰어왔다. 말을 들어 보니 다들 나루가 도망간 줄 알았다고 했다. 밭에서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나루는 이 중에서 제일 성실한 청년이 되었다.
농장은 아침부터 바빴다. 나루는 오늘도 감자 캐기 담당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분홍색 바구니를 들고 호미질을 하던 나루가 자꾸만 감기는 눈을 깜박거렸다.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몸 상태가 허약해진 모양이었다.
나루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잠도 오고, 규연이도 신경 쓰이고, 핸드폰도 빨리 켜 보고 싶고. 정신이 산만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 오늘 왜 그러냐.”
“아니야.”
“어젯밤에 어디 가는 것 같던데.”
“어, 어? 봤어?”
와중에 폭탄이 떨어졌다. 자는 줄 알았던 건후가 어젯밤 나루가 숙소를 나가는 걸 봤다고 했다.
어두컴컴했으니 귀와 꼬리는 안 보였겠지. 심장을 졸이던 나루가 건후를 곁눈질하며 쳐다봤다. 눈치를 보는 게 안쓰러울 정도였다. 건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얘기를 이어갔다.
“뭘 봤다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나가는 거…….”
“정확히 본 건 아니고, 부스럭거리길래.”
후우. 안심이다. 나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만 들었다니 천만다행이었다.
“너 뭐 돈 훔친 거 아니지?”
“아니야.”
능청스레 장난을 붙인 건후가 유쾌하게 웃었다. 나루는 이제야 좀 표정을 풀었다. 줄곧 느끼던 울적함도, 옆에서 시도 때도 없이 떠드는 건후 덕분에 정신이 없어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았다. 기운을 차린 나루가 힘차게 호미질을 했다. 땅이라도 파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작정이었다.
잡담을 나누며 감자를 캐면 열두 시가 된다. 농장주가 와서 점심시간을 알리면 다 같이 점심을 먹고, 또 밭으로 돌아와 감자를 캔다. 반복 작업이었으나 나루는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가끔 몸을 휘청일 때면 건후가 나서서 받쳐 줬고, 농장주도 열심히 일하는 나루에게 떡 하나 더 챙겨줬다.
“자 여기, 오늘 일찍 출근해 줬으니까 10만 원.”
“감사합니다.”
노을이 져갈 때 즈음 일이 끝났다. 어제처럼 일당을 받은 나루가 희미하게 웃었다. 의도치 않은 오해로 만 원이나 더 얹어 받은 것이다. 바지 주머니 속에는 19만 원이 꼬깃하게 접혀 있었다.
주머니에 괜히 손을 넣어 지폐를 만지작거리던 나루가 딱딱하게 만져지는 것을 꺼내 들었다. 배터리가 없어 켜지지 않는 핸드폰이었다.
우중충한 얼굴로 화면을 터치해 보던 나루가 짜증스럽게 발을 굴렀다. 마침 숙소로 뒤따라 들어오던 건후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뭐 문제라도 있어?”
“이게 안 켜져서.”
“핸드폰? 아, 배터리 없어서 꺼졌나 보네.”
나루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간 건후가 기다리라며 제 가방을 뒤적거렸다. 옷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은 가방에 손을 깊숙이 넣어 보던 그가 드디어 찾았다는 듯 충전기를 꺼내 들었다.
순간 나루의 안색이 환해졌다. 핸드폰을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그가 건후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규연이 밉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그래도 연락해 보고 싶은걸.
콘센트를 찾아낸 건후가 코드를 꽂았다. 잭을 핸드폰에 연결하고 나니 화면이 반짝였다. 건후는 제 옆에 쪼그려 앉은 나루를 일으켜 세웠다.
“조금 충전하고 켜는 게 좋으니까 그사이에 씻어. 너한테 꼬질꼬질한 냄새 나.”
“너도 꼬질꼬질해. 옷 빌려줘.”
“미친, 너 왜 이렇게 당당하냐? 어 그래, 빌려준다, 빌려줘. 자!”
건후가 검은색 티셔츠를 던지듯 건네줬다. 장난 섞인 태도에 옅게 웃던 나루가 샤워실로 향했다. 씻고 나오면 드디어 규연이한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알아서 잘 살아가기는 무슨. 나루는 그럴 자신이 없어졌다. 강아지를 버린 주인들은 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루는 흐린 눈을 하고 규연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규연이는 나를 찾을 거야. 후회할 거야. 아니, 후회해야만 해.
입술을 꽉 깨문 나루가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