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30)


나루가 나간 뒤의 집은 고요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정적이었다. 규연은 뛰쳐나간 나루를 뒤로하고 소파에 널브러져 누웠다. 감정 소모를 크게 했더니 기력이 빠져나가 속이 허해졌다.

무언가 생각해 보려 해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던 나루가 규연과 상관없는 사람이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게 되었다면. 아니, 애초에 더 꼼꼼히 조사를 진행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규연은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애초부터 꼬이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나루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

신경 쓰지 말자. 유규연, 걔는 너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야. 제발 신경 좀 쓰지 마.

마른세수를 하던 그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애써 신경 쓰지 말자고 마음을 가라앉혔건만,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붙잡았어야 하는 건데.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무리 혼란스럽고 화가 났어도, 나루가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다. 늦은 시간에 어디 갈 곳도 없을 테고, 분명히 돈도 없을 텐데…….

사람은 참 이상하다. 꼭 물이 엎질러진 뒤에야 후회되기 시작한다. 규연은 자신의 행동을 천천히 돌아보고 끝내 욕을 내뱉었다.

천천히 물어볼 수도 있는 거였는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루를 밀어붙였고. 나루의 사정은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제 감정에만 치우쳐 화를 냈다.

아, 죽고 싶네.

소파에 누워 괴로워하던 규연이 벌떡, 일어났다. 창문을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는 곧장 걸어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덜컥.

문이 열린 후에는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비상구로 뛰쳐 내려간 규연은 집 근처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날씨까지 이상했다. 밤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집 앞 상가나 도로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삼십 분 동안 집 근처를 돌며 나루를 찾던 규연은 떨어지는 빗방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정처 없이 떨어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돌아다니던 규연이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나루는 찾을 수 없었다.

“송나루!”

규연의 거칠어진 목소리가 상가 근처에 울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규연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이미지 망치는 걸 가장 싫어하던 규연이 연신 나루의 이름을 외치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네 시간이 흘렀다. 규연은 반쯤 포기한 상태로 돌아왔다. 초점이 사라진 눈에 공허함이 가득 차 있었다.

거실로 들어와 소파를 바라보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루가 저 소파에 앉아 있길 바랐는데, 그런 꿈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집을 훑어보던 그는 나루의 흔적이 남은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잘 개어진 하늘색 담요, 나루가 좋아해서 두 개나 구매했던 시리얼, 어느새 두 쌍이 된 숟가락과 젓가락, 나루 전용 포크까지.

여태 너무 자연스레 지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집 안에 나루의 영역이 많이도 생겨 있었다.

머릿속을 비워내고 욕실로 들어온 규연은 찬물 샤워를 했다. 차가운 물을 맞으니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씻고 나온 후에는 빗물로 어지럽혀진 바닥을 닦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닦았다.

규연은 제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소파에 누웠다. 늘 나루가 혼자 잠들던 곳이었다. 불 꺼진 거실에 혼자 누워있자니 허한 느낌이 들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독립한 뒤로 혼자 사는 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루와 함께 지내다가 혼자 남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눈을 감은 규연이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잠이 오지 않을 때 주로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보통 100까지 세면 잠이 몰려들었는데, 오늘은 1000까지 세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깬 것도 아니고, 잠든 것도 아닌 상태에서 괴로워하던 그는 설잠을 잤다.

꼭 이럴 때 악몽을 꿨다. 희미한 정신 사이로 나루의 얼굴이 보였다. 흙투성이가 된 채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나타난 나루는 규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도망친 게 아니라, 네가 버렸어. 유규연 네가 버린 거야. 나 책임져. 책임져. 책임.’

“허억, 허……!”

잠에서 깬 규연이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도망친 게 아니라, 네가 버렸다. 꿈속에서 나루는 그렇게 말했다. 결국, 규연은 다시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허탈하게 앉아 있다 보니 어느새 아침 해가 떴다. 하루 사이에 꼴이 피폐해진 규연이 창밖을 가만히 쳐다봤다. 혹시 몰라 기다렸는데, 나루는 여전히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규연은 줏대를 지키지 못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땐 언제고, 이제는 나루를 미친 것처럼 찾아댔다. 아침 일찍 밖으로 나온 규연은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또 몇 시간을 찾아다녔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이 정도 찾았는데 나오지 않는 거면, 다른 동네로 넘어갔거나 어쩌면 더 멀리 갔을지도 모른다.

지잉.

그때, 규연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여태 직접 뛰어다니느라 핸드폰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규연이 잽싸게 화면을 확인했다.

[유규연 후회해]

나루의 메시지였다. 규연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메시지를 쳐다봤다. 별다른 말도 없이 그냥 후회하라니. 나루답지 않은 단호한 태도였다.

늘 규연이 제일 좋다, 규연이가 최고다, 라는 말만 하던 나루가 하루 사이에 매정하게 바뀌어 있었다. 누구한테 얻어맞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뒤통수가 얼얼했다. 충격적이었다.

드디어 정신이 좀 든다. 규연은 전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전화를 걸면 뭐라고 말할 건데. 당장 돌아오라고? 내가 내쫓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걸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던가. 상처받아서 후회하라고 말하는 애를 붙잡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 나루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황당할 것이다.

규연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 감정만 생각하고 나루를 무작정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이성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나루에게 천천히 다가갈 것인가.

일단 연락은 되는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나루가 무사히 있다는 걸 확인한 규연은 집으로 돌아가 머리를 식혔다. 나루를 붙잡는다고 해도 지금 상태라면 또 어긋나 버릴지도 모른다.

오후 늦은 시간까지 착잡한 마음을 달래던 규연이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겨우 두 시간 참았을 뿐인데, 나루가 어디서 굶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돼서 미칠 지경이었다.

붙잡아서 어긋나면 뭐. 걔랑 나 사이에 이런 오해가 생긴 게 당황스럽긴 하지만, 대화해 보면 되지. 그러면 될 거 아니야.

규연의 핸드폰에 전화 연결 화면이 떴다. 상단에는 나루의 이름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Trrr―, Tr,

마음먹고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음이 중간에 뚝, 끊겨 버렸다. 규연은 제가 착각한 건가, 싶어 한 번 더 걸었다.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삐-.

음성 사서함 연결음과 함께 규연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연결음이 지속되다가 바로 전화기가 꺼지다니. 고의로 전화를 끊지 않는 이상 이런 경우는 잘 없었다.

나루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규연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은 꼭 한 번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다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뒤늦게서야 나루의 소중함을 깨달은 규연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 * *

동그라니 예쁘게 생긴 감자들이 바구니에 한가득 담겼다. 나루는 뿌듯한 얼굴로 허리를 쭈욱, 폈다. 하얗던 얼굴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몸도 마찬가지로 더러웠다. 감자를 너무 열심히 캔 탓이었다.

담아 온 농작물을 저울에 달아 보던 농장주가 한 명 한 명에게 수고했다며 현금을 쥐여줬다.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으나 하루 아르바이트치고는 꽤 괜찮았다.

“자, 내일도 수고해.”

“감사합니다…!”

나루의 손에 현금 9만 원이 올려졌다. 누군가에게 빼앗길세라 지폐를 세게 움켜쥔 나루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돈을 벌어 본 게 뿌듯했나 보다.

내일 일곱 시까지 모이라는 말을 끝으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아저씨들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허름한 숙소로 향했다. 그 뒤를 졸졸 따라 걷던 나루는 습관처럼 눈치를 봤다.

“야, 처음인데 열심히 하더라.”

“난 항상 다 열심히 해.”

“쪼그만 게 열정이 넘치네. 저기 샤워실 더럽게 좁은데 같이 씻자.”

“난 너랑 안 씻어.”

살갑게 붙어오던 건후가 같이 씻자며 나루의 등을 톡톡, 쳤다. 나루는 그 손을 쳐내 버리고 앞장서 걸었다.

규연이랑 같이 씻어 본 적도 없는데 내가 왜 쟤랑 씻어.

새침한 행동에 건후가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경쾌한 웃음소리가 그와 잘 어울렸다. 숙소 앞까지 다다른 나루는 서늘함에 몸을 살짝 떨었다.

다 떨어져 가는 구식 건물은 떼가 껴서 벽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부 상태는 더 최악이었다. 붕 뜬 장판은 없느니만 못했고, 벽지는 이곳저곳이 뜯어져서 회색 콘크리트 벽이 다 드러나 있었다.

나루는 곧바로 갇혀 살던 지하실을 떠올렸다. 이곳은 지하실과 매우 유사했다. 서늘한 공기에 섬뜩할 정도로 어두운 분위기, 특히 저 콘크리트 벽이 제일 무서웠다.

“아오, 여기는 언제 와도 거지 같네.”

“…….”

“겁먹었나 봐?”

“……응.”

들릴 듯 말 듯 대답한 나루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저씨들이 모두 신발을 벗지 않고 들어와서 나루도 그들을 따라 신발을 벗지 않았다. 하긴, 벗고 들어왔다가는 발이 새카맣게 변할 것 같았다.

“어이, 젊은이들. 너희는 맨 나중에 씻어라.”

“아 왜요.”

“도건후 저놈 저거 또 건방지게 구네.”

“또 싸우려고 하시네, 아 알았으니까 빨리 씻고 나오세요.”

작업복을 벗어 던지던 아저씨 하나가 텃세를 부렸다. 자기네들이 먼저 씻을 테니 너희는 마지막에 씻으라는 흔한 텃세였다. 나루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지만, 건후는 곧바로 말대답을 했다.

이전에 아저씨들과 여러 번 싸웠던 건후는 귀찮다는 얼굴로 상황을 넘겨 버렸다. 덕분에 험악해지려던 분위기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나루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씻을 차례를 기다렸다. 돈을 받을 땐 마냥 좋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분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돈이 있으면 뭐 해. 나 진짜 혼자 살 수 있을까?

…규연이 보고 싶다. 따듯한 집에서 씻고, 먹고, 자고 싶어.

핸드폰을 꺼낸 나루가 홀드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YK전자의 로고가 뜨더니 배터리 부족 표시와 함께 다시 전원이 꺼졌다. 망연자실한 나루는 울상을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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