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저기 뭐야, 농장 차 타러 온 거여?”
“농장……?”
“돈 벌러 농장 가는 거 아니여?”
“마, 맞아요.”
나루는 농장에 가기로 한 적이 없었다. 농장에 가는 차가 이곳에 서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돈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내뱉고 말았다.
할머니들의 말을 참고해 보았을 때, 농장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는 모양이었다.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자라 본 나루는 농장을 좋아했다. 뜯어 먹을 상추도 많고, 배추도 있고, 땅을 잘 파 보면 감자도 있어서 최고였다.
나루는 농장으로 가는 차를 기다리며 손장난을 쳤다. 차는 정확히 오후 열두 시에 도착한다고 했다. 건너편 건물에 걸린 전자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 오전 열한 시밖에 되지 않았다.
“어이구, 청년. 들어가서 세수라도 혀. 꾀죄죄하자녀.”
“물 쓸 수 있어요……?”
“그려, 우리가 허락하면 괜찮어.”
나루를 안쓰럽게 본 할머니가 노인정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루는 감사하다며 허리를 푹 숙이고는 노인정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인정 옆에 마련된 화장실은 꽤 깔끔했다.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좋은 향기까지 났다. 물론 규연의 집보다 좋지는 않았지만, 지금 나루에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거울로 제 꼴을 확인한 나루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젯밤 비도 맞고, 밖에서 잤더니 얼굴이 시커먼 게 더러워 보였다. 수도꼭지를 올리고 찬물을 튼 나루는 새파란 오이 비누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렇게 씻고 나니 다시 뽀얀 피부로 돌아왔다. 샤워까지 하지는 못하지만, 대충 물을 끼얹어 팔을 씻어낸 나루가 상쾌한 얼굴로 화장실을 나섰다.
“이제 좀 깰꼼하네.”
“얼굴이 뽀얀 것이 예쁘게도 생겼다.”
“저랴서 밭일 할 수 있겄어?”
“저런 아들이 요즘에는 더 약아 빠졌우.”
나루의 등장에 할머니들이 한마디씩 얹으며 잡담을 이어갔다. 예쁘장한 얼굴 덕분에 떡까지 얻어먹은 나루는 어느새 할머니들과 친해져 수다를 떨었다. 예전이었다면 사람을 무서워해서 자리를 피했을 텐데, 규연과 지내면서 자연스레 붙임성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할머니들과 함께 있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건물에 달린 전자시계는 어느새 오후 열두 시를 띄우고 있었다.
“허, 허억, 늦을 뻔했네. 아오.”
“…….”
정류장 앞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키가 훤칠한 남자가 이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빨간 머리카락에 피어싱까지 한 그는 조금 불량스러워 보였다.
나루는 남자를 경계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숨을 고르던 남자는 정류장 구석에 박혀 있는 나루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자신을 피하는 모양새라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 뭐냐.”
“…….”
남자의 말투는 규연과 엇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규연은 좀 있어 보이게 싸가지 없는 느낌이었고, 이 남자는 마냥 거친 느낌이라는 것이었다. 나루는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 걸음 더 물러섰다.
남자의 말을 애써 무시하던 중, 검은색 봉고차 하나가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차 옆에는 ‘우리농장’이라는 글씨가 돋움체로 붙여져 있었다. 그 아래에 붙은 전화번호는 덤이었다.
조수석 창문을 내린 중년 남성은 어서 타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자 남자가 먼저 올라탔고, 나루는 얼떨결에 그 뒤를 따라 탔다.
창문 쪽 자리에 딱 붙어 앉은 나루는 할머니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깐이지만 친할머니처럼 대해 주셔서 정이 많이 들었는데 헤어져야 하는 게 아쉬웠다.
“야, 야.”
“아 씨, 왜.”
“어쭈? 너 못 보던 얼굴인데 여기 왜 왔냐.”
남자는 나루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아마 이 차에 여러 번 탔던 사람인 듯했다. 어깨를 치며 말하는 남자에게 작게 신경질을 낸 나루가 당당히 반말을 뱉었다. 상대가 반말을 하니, 나도 똑같이 반말하겠다는 패기였다.
꿀리지 않고 대드는 나루의 모습에 남자는 흥미를 느꼈다. 보통 이런 식으로 말을 걸면 끝까지 무시하거나, 쫄아서 소심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루는 전혀 쫄지 않고 덤벼 왔다.
“너 여기 왜 왔냐고.”
“돈 벌러 왔는데.”
“농장 일 개같이 힘들어.”
“어쩌라고…….”
나루는 슬슬 짜증이 났다. 남자가 자꾸 귀찮게 굴면서 궁금하지 않은 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어쩌라고’라는 말에 감격한 남자는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예쁘장하니 순하게 생긴 게 이를 세우는 꼴이 재미있었다. 나루는 남자의 웃음소리를 개무시하며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름 뭐냐.”
“송나루.”
“뭔 이름이 개새끼 같네.”
“개새끼 아니고 강아지 같은 거야.”
굳이 ‘강아지’로 고쳐 말해 준 나루가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많고 많은 욕들이 있다지만, 나루는 그중 ‘개새끼’라는 욕이 제일 싫었다. 전 주인이 화날 때마다 사용하기도 했고, 그냥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싫었다.
“보통 여기서는 사람한테 개새끼가 뭐냐면서 화내는 게 정상 아닌가.”
“…….”
“내 이름 뭐게.”
남자는 끈덕지게도 붙어왔다. 뭐랄까, 건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건혁의 경우 초반부터 싸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다가왔지만, 이 남자는 말투만 거칠 뿐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 귀찮았다.
그렇다고 대꾸해주지 않는 건 조금 미안해서, 나루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김덕칠.”
“헛소리 쩌네.”
“…….”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어이없는 이름이었다. 저 남자의 얼굴에 김덕칠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남자의 외모는 꽤 화려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시원스러운 인상이 은근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그래도 규연이가 더 잘생겼어.
고개를 휙 돌린 나루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규연의 생각을 하니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도건후야.”
“아, 응.”
“뭐가 응이야, 잘 부탁해 이런 말은 안 하냐?”
“잘 부탁해.”
도건후.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루는 호기심을 거두고 바깥만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점점 도심을 벗어나고 있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거침없이 달리던 차는 중간에 또 한 번 멈춰 섰다. 나루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운전석을 쳐다봤다. 농장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아까처럼 조수석 창문을 내려 손을 까딱이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고, 정류장 앞에 서 있던 남자들이 줄줄이 올라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이대가 좀 있어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당황한 나루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건후가 팔을 잡아끌었다.
“거기 있으면 아저씨들 못 타잖아.”
“아…….”
“띨빵하네.”
“띨빵?”
띨빵하다. 예전에 규연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띨빵하다가 무슨 뜻인지 아주 잘 알았다. 맹하고 멍청하다는 뜻이었다.
나루는 미간을 찌푸린 채 건후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어 주었다.
“아악!”
“나 안 띨빵해.”
꼬집히고도 킥킥거리며 웃던 건후가 나루를 계속 자극했다. 한 번 더 꼬집어 보라느니, 너 사실 성격 안 좋다느니, 일부러 화를 낼 만한 말을 골라 했다. 나루는 삐친 티를 내며 몸 자체를 돌려 앉았다.
규연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고 싶었던 나루는 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건후가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아서 외로워할 틈이 없었다.
“다들 내려!”
건후와 투닥거리는 사이, 차가 농장 앞에 멈췄다. 아저씨들은 땀을 닦을 수건을 챙겨 내렸고, 나루와 건후는 그 뒤를 따라 내렸다.
농장은 규모가 꽤 컸다. 입구 근처에는 비닐하우스가 쭉 늘어서 있었고, 그 옆에는 짙은 황토색의 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의 냄새를 맡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뭐야? 한 명이 더 많은데.”
“당신 왔어?”
“어어, 그런데 이상하네. 한 명이 더 많아.”
“어차피 일도 많은데 잘 됐지 뭐.”
감자가 든 바구니를 들고나오던 여자가 어서 일이나 시키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농장 주인은 아저씨들에게 일거리를 배정해 주고 나루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 건후 또 왔냐.”
“아저씨, 오랜만.”
“말 짧게 하지 말라니까, 이 녀석아!”
건후는 농장 주인과 인연이 깊어 보였다. 편하게 대하는 태도가 꼭 이 농장의 아들 같기도 했다. 건후에게 감자나 캐라며 잔소리를 하던 농장 주인은 나루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루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싱글싱글 웃었다. 다행히 농장주는 나루를 의심하지 않고 일거리를 주었다. 나루에게 배정된 일은 감자 캐기였다. 건후와 같은 일이었다.
“가자, 송나루.”
“으앗!”
“옷이 그게 뭐냐, 농장에 오는데 누가 이런 옷을, 미친. 이거 명품 아니야?”
“하지 마. 내 애인이 준 거야.”
오늘따라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애인은 무슨, 규연은 이제 더 이상 나루의 주인도, 애인도 아니었다.
나루의 옷을 자세히 구경하던 건후는 오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이 준 옷이 명품인데, 그 귀한 옷을 이렇게 더럽혔다니 뭔가 이상했다. 얼굴만 정상이었지, 나루의 차림새는 진흙탕에서 뒹군 강아지 같았다.
“애인도 있냐?”
“응.”
“존나 거물인가 보네.”
“거물?”
“어, 네 애인 돈 많은가 보다.”
“……많아.”
많은데, 그 애인이 사실 내 게 아니야.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킨 나루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건후는 나루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자기 애인이 밭일하러 떠난다는데 어떤 사람이 얌전히 보내 줄까. 애초에 돈 많은 애인을 두고 혼자 이런 곳에 왔다는 게 말도 안 됐다.
“감자나 캐러 가자.”
“잡지 마.”
“되게 까탈스럽네, 진짜.”
자연스레 대화를 넘긴 건후가 나루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친화력이 좋아도 보통 좋은 게 아니었다. 나루는 건후의 팔을 떼어내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농장주에게서 받은 분홍색 바구니를 옆구리에 야무지게 낀 모습이 묘하게 귀여웠다.
감자밭으로 들어선 나루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짙은 흙내음이 코끝으로 흘러 들어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나루는 장갑도 끼지 않은 채 흙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건후가 혀를 차며 장갑을 끼워 주었다.
“야, 손톱에 흙 들어가면 골치 아파.”
“나는 맨손이 좋은데…….”
땅 파는 걸 좋아하는 나루는 호미를 옆에 두고 손으로 직접 흙더미를 파헤쳤다. 파바밧, 하고 흙을 퍼내는 게 장난치는 강아지 같았다.
바구니를 조금씩 채워가며 흙만 파낸 지 정확히 세 시간째였다. 쨍한 햇빛 사이를 가르고 다가온 농장주가 목을 가다듬더니 소리를 질렀다.
“어이, 다들! 짐 챙겨 왔지?”
뜬금없이 짐을 챙겨 왔냐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감자를 두 바구니나 캔 건후는 대충 손을 흔들어 보이며 긍정을 표시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이에서 어리둥절한 건 나루뿐이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오늘 집에 돌려보내 주는 게 아니야?
“오케이! 여섯 시에 저어기 보이는 숙소로 들어가들!”
할 말만 깔끔히 전달한 농장주가 뒤돌아서 가 버렸다. 나루는 또 다른 위기를 마주했다. 돌려보내 주는 줄 알았더니, 숙소에서 다 같이 생활하는 거였나 보다.
농장주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니 허름한 건물 하나가 보였다. 저 작은 1층짜리 건물에 이 인원들이 다 들어가 생활해야 하는 거였다. 단체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나루는 눈물을 머금었다.
지잉.
그때,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또 배터리 부족 알림일까. 몰래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던 나루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규연의 이름을 본 것 같았는데, 타이밍 나쁘게 배터리가 방전되어 핸드폰이 꺼지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