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30)


“어디 가.”

“전화를 안 받아서, 찾으러…….”

“네가 나를 왜 찾아.”

감정은 점점 격해지는데 나오는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나루는 규연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어딘가 싸하고, 꼭 제게 아무 감정이 없는 것처럼…….

규연에게 곧잘 덤비던 나루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전화를 여러 번이나 걸어서 화가 난 걸까. 단순히 규연이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던 나루는 아무리 기다려도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신호가 길게 가다가 끊겼고, 두 번째에는 곧바로 끊겼고, 그다음부터는 아예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흘러나왔다.

나루는 쓸데없는 곳에서 촉이 좋았다. 규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함을 깨달은 그는 손톱만 물어뜯다가, 카디건만 대충 걸쳐 입고 집을 나서기로 작정했다. 왠지 모르게 규연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황급히 문을 열던 순간, 나루는 깊이 안심했다. 바로 앞에 규연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분명 안심했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었는데.

유규연이 이상했다.

“걱정돼서.”

“걱정?”

“응. 걱정돼서 찾으러 나가려고 했어.”

“네가, 네가 뭔데 날 걱정해?”

네가 뭔데 날 걱정하냐. 평소처럼 틱틱대는 말투가 아니었다. 나루는 어떤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 예전부터 하도 욕을 들어서 익숙해진 것도 있었지만, 함께 살면서 규연의 성격이 어떤지 파악했기에 아무렇지 않았던 거였다.

고개가 점점 떨궈졌다. 지금 규연은 나루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단순히 틱틱대는 게 아니라, 정말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나루를 대하고 있었다.

나루는 처음으로 상처받아 봤다. 제게 있어 천사와도 같은 규연이 이렇게 매몰차게 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 느낌, 잊고 있었는데 여전히 아파. 상처받는 건, 너무 괴로워.

잊고 있던 고통이 점점 생생히 느껴졌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나루는 무의식적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규연이가 날 버리지 않게 해주세요.

“너, 누구야. 대체 누군데 여태껏 내 옆에 뻔뻔히 있었던 거냐고!”

“네가, 그러라고 했잖아. 나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애초부터 아니라고 말했었다면!”

“네가 나를 데리고 왔으니까. 나는 이제부터 너랑 살게 되는 줄로만 알고, 읏!”

규연이 나루의 두 어깨를 우악스레 붙잡았다. 아픈 신음을 내며 규연을 바라보던 나루는 악의 가득한 시선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핏줄이 서서 새빨갛게 충혈된 눈이 꼭 전 주인을 떠올리게끔 했다. 일이 뒤틀릴 때마다 나루를 압박하며 괴롭히고, 당장이라도 버릴 것처럼 쳐다보던 그 눈.

뭐가 잘못된 걸까. 규연에게 매몰차게 내쳐지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루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만약, 잘못된 걸 원상태로 되돌린다면 다시 전처럼 잘 지낼 수 있는 걸까.

나루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산 건 규연이고, 그런 규연을 경계하던 나루는 서서히 의심을 풀어갔다. 아무리 봐도 규연이 제 새 주인 같았고, 함께 지내며 진정한 주인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이제는 행복할 줄로만 알았다.

“넌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대체 왜…….”

“어……?”

“못 알아듣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넌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었다고.”

잠깐이나마 빛을 봤는데, 세상은 역시 캄캄한가 보다. 나루는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저 하늘에서 시커먼 먼지 바닥까지 떨어져 마구 짓밟히는 기분.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규연은 그런 나루를 뭉개버리겠다는 듯,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내가 찾던 사람은 네가 아니었다고.

나루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 존재를 부정당하고 말았다.

어떤 말을 해도 버텨낼 자신이 있었는데. 이런 식에는 면역이 없었다. 가슴 속 어딘가가 쓰리고, 아렸다.

고개를 들어 규연의 눈을 바라보던 나루가 눈물을 툭, 떨궜다.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다 괜찮았다. 분명 전부 괜찮았었다.

규연이 집에 들어오면 저녁을 함께 만들어 먹고, 평소처럼 티키타카를 주고받다가, 며칠 전 밤처럼 한 침대에서 잠들고 싶었다.

나루는 자그마한 희망을 품고 규연을 붙잡아 보기로 했다.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규연이 뭔가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우선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좋을 듯했다.

제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나루는 규연을 더 우선시했다. 어깨 위에 올라온 규연의 손을 살포시 감싼 나루가 애써 침착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야, 잘못 안 거일 수도 있어. 나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얘기하면 다 풀릴…….”

탁!

나루의 손이 내쳐졌다. 얼떨결이었으나, 매정하게 손을 쳐낸 규연은 나루를 말없이 노려볼 뿐이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제 손을 바라보던 나루는 울컥, 하고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지 못했다. 바닥에 투둑, 떨어진 눈물이 선명하게 자국을 남겼다.

순간, 나루의 눈동자가 감정 없이 공허해졌다.

나, 규연이한테 버림받은 거구나.

입술을 콰득, 깨문 나루가 소리 없이 울었다. 여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 느껴 봤지, 실제로 버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규연의 앞에 서 있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고개를 치켜든 나루는 규연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치며 소리쳤다.

“내가 그렇게 싫어? 네가 데리고 온 거잖아. 네가 나를 살렸잖아.”

“…….”

“난 아무것도 몰랐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규연이 네가, 나를 따듯한 곳에서 재우고, 흐끅, 맛있는 밥도 주고, 깨끗한 물로 씻게 해주고, 다 네가 알게 해줬으면서! 그랬으면서, 나를 버리면, 나는 이제, 흐으, 어떻게 살아……?”

원망스러운 눈으로 규연을 쏘아보던 나루가 현관문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그리고는 규연을 지나쳐 그대로 뛰쳐나가 버렸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규연은 뛰쳐나가는 나루를 차마 붙잡지 못했다. 못했다기보다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머리는 방금 나루가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몸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송나루가 울었다. 웬만한 건 다 해맑게 웃어 넘겨 사람을 곤란하게 하던 게, 진짜 서럽게도 울었다. 진심으로 억울한 사람처럼.

규연은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여기서 쟤를 잡아 오면 뭐, 어쩔 건데. 없었던 일로 하고 예전처럼 다시 살아? 그나저나 송나루는 왜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본 거지. 내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본능적으로 손잡이를 붙잡은 규연이 손에 힘을 풀었다. 지금은 붙잡지 않는 게 맞는 거 같았다. 찝찝한 기분으로 돌아선 규연은 나루를 외면하고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한편, 집 밖으로 나온 나루는 무작정 달려 음침한 골목길로 들어왔다. 지하실에서 도망쳐 나올 때 숨던 버릇이 있어서 몸이 저절로 움직인 거였다. 비좁은 공간을 찾아 몸을 구겨 넣은 나루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윽, 으윽.”

숨죽여 울던 습관 때문인지 눈물이 시원하게 터져 나오지 않았다. 감정을 삼키듯 윽윽거리며 울던 나루가 문득 제 발을 내려다봤다.

거뭇하게 얼룩진 흰 양말, 한쪽 발에만 신겨진 운동화가 처량했다. 와중에 날은 더 어두워졌고, 하늘에는 먹구름까지 가득 끼었다. 불행이 따르면 다른 불행들까지 겹쳐 온다던데, 틀린 말이 아닌가 보다.

쓰레기통과 전봇대 사이에 몸을 끼우고 있던 나루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 비가 쏟아져 내릴지 모르는 먹구름이 머리 바로 위까지 흘러 내려왔다.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데, 기어코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툭, 투둑.

한 번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은 금세 굵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온 사방에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당연히 우산이 없는 나루는 차가운 빗물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중이었다.

“헛……!”

그때였다. 나루가 갑자기 제 엉덩이를 부여잡고 벌떡, 일어섰다. 무언가 느낌이 이상하다, 했더니 이곳에 오면서 사라졌던 귀와 꼬리가 예고 없이 나타나고 만 것이다. 설마, 싶어 엉덩이 뒤를 만져 보니 포슬포슬한 털 뭉치가 만져졌다.

귀도 마찬가지였다. 하얀색 강아지 귀가 머리 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당황한 나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으로 꼬리와 귀를 가렸다.

분명 감쪽같이 사라졌었는데, 왜 하필 이 타이밍에 튀어나온 거지.

아무것도 모를 시절이었다면 겁 없이 이 꼴로 돌아다녔겠지만, 나루는 이제 이 세상에 적응한 상태였다. 강아지 귀와 꼬리를 내놓고 다닌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게 뻔했다.

제 의지로 숨기려고 노력해 봐도, 꼬리와 귀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뭐가 문제길래 항상 이 모양일까.

믿었던 사람에게 버려지고, 상황은 최악이고, 도와주는 건 아무것도 없고.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서러워진 나루는 제 꼬리와 귀를 힘껏 잡아당겼다. 꼬리가 찢겨나갈 것처럼 아팠지만, 잡아당기는 행위를 멈추지는 않았다.

“으윽, 짜증 나.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

툭, 하고 상처가 난 귀에서 피가 흘렀다. 꼬리 털도 마구 꼬여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단 몇 분 사이에 엉망이 되어버린 나루는 계속해서 제 몸을 못살게 굴었다.

끼이잉. 끼잉. 낑.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갈 때 즈음, 발치에서 강아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본 나루는 푹 젖은 강아지 한 마리를 발견했다.

끼이잉.

수인이라 강아지와도 말이 통하는 나루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루를 제 동족으로 인식한 강아지가 그만하라며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나루는 그제야 제 몸 괴롭히기를 그만두었다.

끼잉. 낑!

강아지는 주먹을 쥐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나루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앞발이 무릎을 툭툭, 칠 때마다 나루의 어깨가 더 크게 들썩였다.

끼이잉. 낑, 끼잉. 왕!

‘너 괜찮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비록, 수인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나루는 이 작은 강아지에게 크게 위로받고 있었다.

입술을 꼭 깨물고 밀려드는 설움을 참던 나루는 강아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물을 팡, 터뜨렸다.

“흐끅, 흐어엉, 나, 나 주인한테 버림, 받았어, 허어엉. 규연이 나쁜, X발, 허어엉.”

끼이잉. 끼잉.

‘나도 버림받았어. 울지 마. 일단 여기로 와.’

불쌍한 표정으로 나루를 쳐다보던 강아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걸 보니, 그쪽에 제 보금자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낸 나루는 강아지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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