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몸집에 짙은 갈색의 머리, 그리고 예쁘장하게 올라간 눈꼬리. 유진이 가리킨 곳에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소문을 퍼트린 사람은 나루인데, 저 사람은 나루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규연은 유진이 사람을 잘못 짚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나루가 이런 곳에 있을 리 없었다.
“쟤 아니야.”
“네가 어떻게 알아? 쟤 맞다니까. 송나운.”
“뭐?”
“송나운 쟤가 네 소문 안 좋게 내고 다닌 졸부라고.”
송나운. 이름은 확실히 나루와 비슷하긴 했다. 유진은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하고 있었다. 규연의 머릿속은 하얗게 물드는 중이었다. 심부름 업체까지 써 가며 송나루를 데려왔고, 거의 두 달 동안 함께 살고 있는데 이게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당황스러운 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 파티에서 분명 송나운의 얼굴을 보았는데, 규연은 왜 자꾸 쟤가 아니라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규연은 두 달 전의 상황을 천천히 되짚었다. 열받아서 심부름 업체에 뒷조사를 시켰고, 거기서 이름을 분명…….
송나운. 송나운이라고 했었다.
규연은 심부름 업체의 허술한 일 처리에 나루의 말을 우선으로 믿은 것이다. 나는 송나운이 아니고, 송나루라는 말을.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규연은 이 상황을 끝까지 외면해 버리고 싶었다. 정말 최유진의 말대로 저 사람이 내가 찾던 그 ‘졸부’라면 어떡하지.
그럼, 송나루는 누구고, 대체 왜 잡혀 와서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인가.
“나 먼저 간다.”
“어? 야, 유규연!”
자리에서 일어선 규연이 급하게 장소를 벗어났다. 유진이 뒤에서 이름을 여러 번 외쳐 봤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우중충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규연은 유진이 가리킨 남자를 붙잡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호텔을 빠져나가 집으로 가고 싶었다. 집으로 가면 나루에게 사실 확인을 하고, 다시 평소처럼…….
지낼 수 있을까. 정말 평소처럼 지낼 수 있을까.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호텔 밖으로 나온 규연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음이 착잡해서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인 규연은 필터를 깊게 빨아들이고, 연기를 천천히 흩뿌렸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그 남자를 붙잡으면 모든 걸 알 수 있게 된다. 굳이 집까지 가서 나루에게 사실 확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발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어째서일까.
공용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나니 어느새 차가 도착해 있었다. 규연의 앞까지 차를 끌고 나온 직원은 차 키를 건네며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운전석에 앉은 규연은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운전대에 머리를 처박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 일단 집으로 가자. 액셀 밟아, 유규연. 물어봐도 송나루한테 물어봐.
가만히 서 있던 규연이 드디어 차를 출발시켰다.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가고, 호텔 건물을 지나쳐 입구로 나설 때 즈음.
끼익!
얼마 달려가지 못한 차가 급정거했다.
작게 쌍욕을 입에 담던 규연이 문을 열고 내렸다. 호텔 입구로 빠르게 다가간 그는 직원에게 다시 차 키를 넘기고,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머릿속으로는 아까 그 남자의 위치를 세세하게 떠올려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다급하게 뛰어내린 규연이 걸음 속도를 서서히 높였다. 결혼식이라 사람이 바글거려서 남자를 찾기가 꽤 어려웠다.
“뭐야, 유규연. 너 간 거 아니었어?”
“아까 걔 어디 갔어.”
“어?”
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유진이 규연을 발견하고 먼저 다가왔다. 잠깐 사이에 안색이 파랗게 질린 규연은 유진의 어깨를 붙잡고 남자를 찾았다. 그러자 상황 파악을 마친 유진이 손가락 끝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는 거 같더라.”
유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규연이 걸음을 돌렸다. 사람들 사이를 헤쳐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낯선 뒤통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짙은 갈색 머리. 아까 봤던 그 머리였다. 규연은 발걸음을 늦춰 남자의 뒤를 천천히 미행했다.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제 또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는 한 여자와 자리를 옮기려는 듯 마무리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럼 가 본다.”
“다음에 또 봐, 송나운.”
다음에 또 봐, 송나운. 송나운, 송나운…….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송나운’이라는 이름이.
규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남자의 뒤를 쫓던 규연은 코너를 돌자마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자와 둘이 빠져나온 남자는 인적 드문 곳을 발견하자마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누구는 심란해서 심장이 쿵쿵, 뛰어대는데 팔자 좋은 꼴을 보니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규연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몸을 떼어 놓았다. 거친 손길에 놀란 여자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규연을 쳐다봤고,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잽싸게 도망가 버렸다.
“아이 씨, 누구,”
“…….”
남은 건, 저 남자와 규연 둘뿐이었다. 습관처럼 욕을 내뱉던 남자는 규연을 발견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단순히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라 입을 다문 건지, 잘못한 게 있어서 입을 다문 건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규연은 남자의 어깨를 억세게 붙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자 엄살을 피우던 남자가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크읏……!”
“이름.”
“네?”
“네 이름 말해 보라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남자는 눈치를 보며 제 이름을 중얼거리듯 말했다. 발음이 다 뭉개지고, 목소리도 작아서 뭐라고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규연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세게 가했다. 그러자 아악, 하고 소리를 내지르던 남자가 제 이름 석 자를 빠르게 말해 주었다.
“윽! 송나운, 송나운이요.”
“…….”
점점 유진이 말했던 게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DK항공 막내딸 생일 파티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게 진짜 이 새끼일까. ‘송나운’이라는 남자를 붙잡기까지 했으니 질문 한 번만 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규연은 아직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규연이 송나운의 행색을 눈으로 훑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날카로운 듯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 누가 봐도 20대 초반 같은 이미지. 가까이서 봐도 송나루와 비슷한 부분이 없었다.
그때였다. 규연이 뜸을 들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혼자 찔린 송나운이 술술 제 잘못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죄, 죄송해요. 그때, 파티에서 제가 술을 너무,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었어요. 그냥 말이 이상하게 튀어나왔고, 그게 갑자기 소문으로 퍼져나가서 저도 많이 당황했어요. 하, 한 번만 봐주세요. 죄송합니다.”
파티. 말이 이상하게 튀어나왔다. 그게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죄송하다.
의도치 않게 진실을 마주한 규연이 허망한 얼굴로 송나운을 놓아 주었다. 이걸로 집에 있는 송나루가 가짜라는 게 확실해졌다.
“어디서 거짓말을 해. 네가 여기서 나한테 사과를 하면……!”
“저, 정말 죄송합, 네?”
차라리 영영 모르는 게 마음 편했을 것이다. 의심조차 하지 않았었고, 심지어는 마음까지 내어주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게 된 현실이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또 가혹했다.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빌던 송나운은 규연의 상태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몸을 사렸다. YK전자 막내아들이 유독 자유롭게 자라서 또라이 같다는 건 이미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 큰 봉변을 당하기 전에 사려야만 했다.
정작 규연은 지랄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재난이 발생하기 전, 온 세상이 고요하고 잠잠한 상태가 딱 지금 규연의 상태와 비슷했다.
“꺼져.”
“그게, 그,”
“꺼지라고.”
지금은 저 얼굴을 더 보고 있기가 싫었다. 꺼지라는 말에 쏜살같이 달아난 송나운은 규연을 귀신 보듯 쳐다보며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 자리에 혼자 남겨진 규연은 힘없이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그럼, 지금 내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걔는 어디서 온 누구인 걸까. 내가 데려왔을 때, 왜 저항하지 않았지. 알면서도 내 옆에 붙어있었던 걸까.
그 전에,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멋대로 데려오고, 폭언을 쏟아붓고.
“하, X발…….”
생각해보니 모든 게 다 이상했다. 묘하게 어긋나던 대화, 어딘가 이상한 나루의 행동.
어떤 졸부가 핸드폰 사용법을 모르고, 백화점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간단한 단어조차 못 알아들을까. 일찍이 이상함을 깨달았어야 하는 건데.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저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커서, 사소한 교육조차 못 받은 줄로만 알았다. 처음에는 마냥 불쌍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부 경험시켜 주고 싶어졌다.
맛있는 걸 먹이고, 좋은 옷을 입혀 주고,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줬다.
그런데 전부 거짓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두 달 동안 나루와 함께했던 시간이 모조리 착각 덩어리였다는 거다.
“나 여태까지 뭐 한 거냐, 도대체…….”
이러기 싫은데, 규연은 나루에게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뿐일까. 의심도 되었다.
아무런 반항 없이 규연의 옆에 붙어있었던 점. 규연이 찾는 게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점. 전부 다 의심스러웠다.
물론 후자는 규연이 혼자 넘겨짚은 거였다. 나루는 자신이 새로운 주인에게 팔려 온 줄로만 알았으니까. 문제는 규연이 이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지잉. 지잉.
혼란스러운 와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한 규연은 그대로 손을 떨궈 버렸다.
<나루>
화면 위로 나루의 이름이 반짝였다. 끊기지 않는 진동음에 빨간색 버튼을 터치한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잉. 지잉.
잠시 끊겼던 진동음이 또 다시 울렸다. 역시나 화면에는 나루의 이름이 띄워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규연은 핸드폰 전원을 아예 꺼 버리고 1층으로 내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딛을수록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허탈함. 배신감. 의심. 그리고, 분노.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시동을 건 규연이 바로 액셀을 밟았다. 아까와 정반대의 속도였다.
* * *
집까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린 그는 주차도 엉망으로 해놓은 채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덜컥!
“규연이……?”
“…….”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루의 얼굴이 보였다. 편한 차림에 얇은 카디건을 걸쳐 입은 나루는 어딘가로 뛰쳐나갈 것처럼 나오고 있었다. 심란하던 표정은 규연을 발견한 뒤, 유순하게 풀어졌다.
그 말간 얼굴에 규연의 속이 제대로 뒤집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