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30)


함께 잠든 이후, 규연의 태도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나루를 보면 외면하려고 하지만, 또 신경이 쓰여서 하나하나 간섭하기도 하고, 쌀쌀맞게 굴면서 챙겨 줄 건 다 챙겨줬다. 흔히 말하는 입덕부정기는 제아무리 규연이라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규연의 성격을 완벽히 파악한 나루는 차가운 말투에도 굳이 상처받지 않았다. 어차피 저러더라도 속으로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이런 날이 일주일 정도 이어졌을까. 나루는 전보다 더 불도저 같아졌다. 규연이 밀어내려 하면 무작정 몸을 들이밀며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규연은 이런 나루를 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모두 나루가 생각한 상황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그만 좀 붙어 다니지.”

“싫어요.”

“반말이랑 존댓말 오가는 것도 그만하고.”

“싫어.”

청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규연은 제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나루를 밀어내 버렸다. 볼이 뭉개져 밀려난 나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쿠키를 주워 먹었다.

쟤도 참 대단하다. 대단해.

오늘은 규연이 카페에 나가지 않는 주말이라서 한가했다. 나루는 이때를 노려 찹쌀떡처럼 붙어왔다. 아침을 먹을 땐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았고, 심지어 씻으러 들어갈 때도 같이 들어가려고 해서 매몰차게 쫓겨났다.

간만의 휴일을 느긋하게 즐기려던 규연은 산만하게 구는 나루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좀 떨어져.”

“왜, 내가 싫어?”

순수한 물음이었지만 그 안에 묘한 광기가 섞여 있었다. 처음부터 아방하던 게 언제 저렇게 당돌해졌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규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좋다는 뜻도, 싫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렇게 테라스에서까지 나루와 꼭 붙어있던 규연은 여유로운 휴일을 깔끔히 포기해 버렸다. 이 상태라면 혼자만의 시간은 꿈도 못 꿀 것 같았다.

지잉. 지잉. 지잉.

하필 정신없던 때에 진동이 울렸다. 나루는 탁자 위의 핸드폰을 집어 규연에게 건넸다. 감흥 없는 눈으로 화면을 확인한 규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규성이 형]

이 오전부터 형인 규성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회사에 미친 사람이라 주말에도 어김없이 출근할 텐데, 갑자기 왜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어, 형.”

-너 오늘 성호제약 차남 결혼식에 좀 다녀와.

“갑자기 전화해서 이게 무슨 소리야. 형 나 바빠.”

-헛소리 마, 너 주말마다 쉬는 거 다 아니까. 한 시까지 준비하고 보내준 장소로 와.

전화를 받자마자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게 키보드 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주말에도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규성은 서론도 없이 본론부터 밝혔다.

오늘은 성호제약 차남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원래는 규성과 부모님이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비서의 실수로 일정이 틀어진 규성이 황급히 미국으로 가 봐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말았다.

규연의 둘째 형인 규민은 애초에 해외 지사에서 일하고 있어서 한국에 올 수 없었다. 그러니 남은 규연이 대신 참석해야 했다. 꿀 같은 휴일에 피곤한 일이 터진 것이다.

“형, 나 진짜 바쁘다니까.”

-내가 더 바빠. 얌전히 말 들어.

“하아, 진짜…….”

-이번에 다녀오면 차 한 대 더 뽑아 줄게.

“뭘 또 차까지 뽑아 준대. 됐어, 끊어.”

전화를 끊은 규연이 규성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차는 됐다고 말하더니, 원하는 모델을 적어 보낸 게 모순적이었다.

나루는 규연이 전화하는 걸 몰래 훔쳐 듣고 있었다.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어딘가 나갈 모양새였다.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마음먹은 나루는 규연의 팔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나 잠깐 나갔다 올 거니까 집에 있어.”

“어디 가요?”

“결혼식.”

“아, 규연이랑 나랑 할지도 모르는 그거?”

얘는 또 뭐라는 거야.

규연의 황당한 눈빛이 나루에게 닿았다. 낯빛 하나 안 바뀌고 부끄러운 말을 내뱉는 나루가 이제는 대단하게 느껴졌다. 헛소리를 자연스레 차단한 규연이 옷을 고르기 위해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나루는 그 뒤를 졸졸 쫓아 들어왔다.

늘 캐주얼한 옷 위주로 입던 규연은 오랜만에 검은색 수트를 꺼냈다. 현재 시각은 오전 열한 시. 빠듯하게 준비하면 결혼식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나루는 규연을 따라 옷을 골랐다. 당연히 자기도 데려가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루의 기대와 달리 규연은 옷을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어차피 너 못 데려가. 내 부모님이랑 같이 갈 거고, 초대장 없으면 못 들어가니까.”

“그럼 진짜 집에 혼자 있어야 해요?”

“어. 사고 치지 말고 있어.”

대충 대답한 규연이 나루를 드레스룸 밖으로 쫓아냈다. 시무룩한 얼굴로 쫓겨난 나루는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TV에서 보던 결혼식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신부와 신랑이 손을 잡고 넓고 고급스러운 결혼식장을 함께 가로지르는 모습도, 호화스러운 뷔페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음식들이 늘어져 있는 모습도, 나루에겐 낯설기만 했다.

“송나루, 이리 와 봐.”

“응?”

규연의 부름에 뒤돌아본 나루는 두 눈을 가렸다. 수트를 입은 규연의 모습이 눈부셔서,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옷발이 잘 받는 규연이 수트를 입으니 참 잘 어울렸다. 핏이 꼭 모델 같았다.

눈을 가리고 가까이 다가간 나루가 규연의 몸을 힐끔거리며 구경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멋있었다.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루를 쳐다보던 규연은 뒤늦게서야 왜 이러는지 눈치채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멋있냐?”

“이거, 계속 입어주면 안 돼?”

“어, 안 돼. 불편해.”

“그럼 오늘만이라도, 결혼식 다녀오고 집에서 조금만 더 입고 있어 주면…….”

나루가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혔다. 고작 수트 한 번 입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게 귀여웠다. 규연은 내키지 않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수긍하는 고갯짓에 신난 나루는 당당히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돌아와서 꼭 보여주기.”

“그래, 약속해. 넌 사고 좀 치지 말고 있어라.”

“올 때 맛있는 거 가지고 오는 거야?”

“못 가져와. 대신 와서 너 먹고 싶은 거 만들어 줄게.”

분위기가 훈훈하게 흘러갔다. 나루는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단단히 얽매인 새끼손가락 두 개가 흔들리고, 그들만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헤어샵에 가야 한다며 일찍 집을 나서게 된 규연은 현관에 서서 나루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나루 혼자 두고 가기에는 조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당당하게 약속까지 마친 나루는 괜찮다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나 간다.”

“응! 기다리고 있을게.”

오늘따라 저 인사가 왜 이리 애틋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상한 기분으로 집을 나선 규연이 닫힌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집에서 나온 후, 규연은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헤어샵에 가서 드라이를 받고, 규성에게서 받은 주소를 찍고 결혼식장까지 차를 몰았다. 부모님과 함께 들어가려면 시간을 잘 맞춰야 했다.

크게 치러지는 결혼식인 만큼, 입구에 기자들이 바글거렸다. 온갖 대기업 회장과 힘 있는 임원들이 참석했고, 가장 궁금해하는 재벌 2세 3세들까지 참석했으니 관심이 안 쏠릴 수가 없었다.

뒤쪽에 차를 세우고 부모님과 만난 규연은 대놓고 들어가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자한 얼굴로 규연을 맞아 주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우리 아들.”

“잘 지냈냐, 녀석. 집 나가더니 안색이 아주 좋아졌어.”

사람들은 YK전자 회장과 그 부인이 자식들에게 박하게 대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막내아들인 규연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물론 지금도 과분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규연을 껴안은 어머니가 어서 들어가자며 손을 맞잡아왔다. 규연은 틱틱거리면서도 살갑게 굴었다. 무뚝뚝한 규성과 규민에 비하면 규연은 애교가 많은 편이었다.

결혼식장이 열리는 호텔 앞, 기자들이 빽빽하게 서서 플래시를 터뜨리기 바빴다. 규연과 부모님은 그 사이를 당당히 걸어 통과했다. YK가의 기품을 지키며 호텔 안으로 들어선 규연은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규연아, 여기부터 기자가 없다고 해도 표정 관리는 해야지?”

“우리 엄마, 걱정도 많으시네.”

“허허, 이놈. 밖에 나가 살더니 더 능구렁이가 됐어.”

“능구렁이는 무슨. 아빠, 나 인사만 좀 드리고 바로 빠질게요.”

어차피 이 결혼식은 기업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용도나 마찬가지였다. 또는 상호제약에서 기업과의 친분을 과시하거나. 아무튼 정말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가 아니라는 거였다.

규연은 인사만 마치고 빠지겠다고 밑밥을 깔았다. 그렇게 삼십 분 동안 돌아다니면서 인사만 반복했던 것 같다. YK가의 유능하고 착한 막내아들을 연기하며 웃고 다니던 규연은 입꼬리에 경련이 왔을 때 즈음 풀려날 수 있었다.

“와, X발. 강제로 웃었더니 입이 다 아프네.”

결혼식을 보고 나온 그가 입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슬슬 기회나 보다가 집에 가려는데 누군가가 규연의 어깨를 세게 쳤다.

탁!

“유규연!”

“아 뭐야, 최유진?”

반갑게 어깨를 친 사람은 평소 규연과 친하게 지내던 유진이었다. 유진은 화장품 제조사로 여러 유명 브랜드를 운영 중인 U&R의 장녀였다.

해외로 넘어가 자신만의 브랜드를 론칭한 그녀는 자리를 잡은 후 한국을 자주 오갔고, 올 때마다 규연의 얼굴을 꼭 보고 가곤 했다. 어렸을 때 친해져서 그런지 자주 못 봐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였다.

“지루하다, 지루해. 밥이나 먹으러 갈래.”

“나는 왜 끌고 가.”

“야, 나 왕따야. 저번에 박연희 머리채 잡았다가 왕따 됐어.”

“쯧, 성깔하고는.”

유진의 성깔은 규연과 비슷하게 사나웠다. 유독 잘 나가는 바람에 무리에서 견제를 받게 된 그녀는 얼마 전, 친구 박연희의 생일 파티에서 개싸움을 벌이고 떨궈졌다. 그 이후로 친구라고는 규연밖에 남지 않았다.

연회장 쪽으로 규연을 이끈 유진이 자연스레 접시를 건넸다. 먹기 싫어도 적당히 담으라는 눈빛이 강압적이었다. 규연은 한숨을 내쉬고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담아 돌아왔다.

유진은 박연희 무리 옆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행동에 혀를 내두른 규연은 조용히 발걸음을 돌리려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어허, 어디 가실까. 유규연.”

“싸운 애들 사이에서 밥이 넘어가냐.”

“왜 안 넘어가? 난 잘못한 거 없어. 저것들이 먼저 내 뒷담화 했다고.”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썰어 입에 넣던 유진이 얄미운 웃음을 지었다. 규연은 고개를 저으며 샐러드를 찍어 먹었다.

짝!

고기 맛을 음미하며 열심히 턱을 움직이던 유진이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규연은 또 무슨 일이냐며 귀찮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까, 너도 당했잖아. 졸부가 네 소문 안 좋게 내고 다닌 거.”

“아, 몰라.”

“어머, 미쳤다. 유규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저기 있다.”

“뭔 소리야.”

규연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을 유진이 굳이 끄집어내 말했다. 규연은 이 대화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졸부는 지금 자신의 집에 있고, 심지어 함께 지내면서 사이가 이상해지기까지 했다.

규연은 그냥 그 일을 덮고 싶었다. 어차피 사과받기도 글렀고, 지금 상황에 그 일을 들먹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유진이 자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규연을 욕한 ‘졸부’가 저기에 있다며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루는 분명 집에 있을 텐데.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고기나 썰어.”

“헛소리라니. 나도 그 파티에 있어서 졸부 얼굴 봤거든? 쟤 맞아.”

“무슨…….”

규연은 유진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설마, 송나루가 여기 있을 리 없는데.

하지만 유진은 확신에 찬 손짓으로 삿대질하고 있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던 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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