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30)


“까불고 있어.”

나루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은 규연이 젓가락을 들었다. 핸드폰 그만 보고 밥이나 먹으라는 말에 나루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애인이라는 말에 성질도 안 내, 굳이 뺏어가서 소개 글을 바꾸지도 않아. 나루는 규연의 행동을 오해했다.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혼내지 않는 거라고. 아니, 어쩌면 오해가 아닐지도 몰랐다.

히죽거리며 식사를 마친 나루는 다시 핸드폰 삼매경에 빠졌다. 서연의 SNS에는 구경할 만한 사진이 많았다. 디저트 카페 사진부터 셀카까지 다양해서 아래로 내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나루는 문득 자신도 사진을 업로드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규연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카메라 앱을 켰다. 낮에 찍었던 토끼 필터가 뿅, 하고 나타나 나루의 머리 위에 반짝거렸다.

찰칵.

서연의 포즈를 흉내 내며 사진을 찍은 나루가 사진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필터가 씌워져 있어서 그런지 눈도 평소보다 더 반짝였고, 볼도 핑크빛이었다. 나루는 강아지 귀 필터를 씌운 사진을 SNS에 업로드하기로 했다.

나는 강아지니까, 강아지를 올리자.

SNS에 제 셀카를 업로드한 나루가 뿌듯하게 웃었다. 사진 밑 자그마한 하트에 숫자 1이 표시됐다. 누군가, 하고 눌러 보니 서연의 계정이 목록에 떠 있었다.

하트를 눌렀다는 건 내 사진이 좋다는 거겠지? 역시, 잘 나왔어.

“또 핸드폰 보고 있네. 잘 준비나 해.”

“으응.”

마침 욕실에서 나온 규연이 나루에게 잔소리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루는 대충 대답하며 화면을 두드렸다. 규연의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반쯤 포기한 규연은 먼저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보통 문을 먼저 닫으면 나루가 달려와서 벌써 자는 거냐며 종알거렸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문 앞이 조용했다. 모두 저 핸드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말을 잘 듣더니, 요즘에는 더럽게 안 듣네.

규연의 생각대로 나루는 요즘 들어 말을 듣지 않았다. 예전에는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제는 규연이 무슨 말을 해도 제 고집대로 행동했다.

물론 나루가 굳이 규연의 말대로 행동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잘 교육시킨 반려동물도 아니고,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규연은 뭔가 서운했다.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를 보는 부모의 기분이 이런 걸까.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든 규연이 SNS로 들어가 나루의 계정을 확인했다. 소개 글에는 여전히 ‘규연이 애인’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하나의 게시물.

“뭐야, 이건.”

아까까지 없던 게시물이 생겼다. 규연은 망설임 없이 사진을 눌러 보았다. 나루의 첫 번째 게시물은 제 셀카였다. 강아지 필터가 씌워진 셀카. 이런 각도는 또 어디서 보고 따라 했는지, 사진이 제법 잘 나왔다.

“허, 참.”

규연이 헛웃음을 내뱉는 척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동글동글한 눈도, 핑크빛 뺨도, 앙증맞게 장식된 강아지 귀나 꼬리도 전부 귀여웠다.

와, 내가 왜 웃은 거지. 지금 얘 귀엽다고 생각해서 웃은 거냐? 미친 새끼.

잽싸게 웃음기를 지워낸 규연이 표정 관리를 했다. 요즘 나루를 볼 때마다 툭하면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 큰일이었다. 이러다 더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도 있었다.

잠이나 자자.

지잉.

일찍 잠들려던 규연이 핸드폰을 막 내려놓았을 때, 진동음이 울렸다. 느낌이 영 이상해서 다시 홀드 버튼을 누른 그가 화면에 뜬 메시지 창을 확인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규연아 나 너 방에서 같이 자도 대?]

나루의 메시지였다. 핸드폰을 보느라 사람을 무시할 땐 언제고, 이제는 방에 와서 같이 자고 싶단다. 규연은 곧바로 답장을 전송했다.

[안 돼]

안 된다는 답이었다. 그러자 나루 쪽에서 1초도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ㅇ]

단답. 그래, 단답이었다. 규연은 태어나서 이런 답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늘 정성 가득한 메시지들만 받아 왔는데, 그 누구도 저렇게 싸가지 없이 답한 적이 없었는데. 고작 ‘ㅇ’ 하나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단답을 전송한 나루는 어느새 규연의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오늘은 왜 안 오나 했더니, 이제야 오시는구만.

규연은 나루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저러다 보면 다시 소파로 돌아가 잠들기 일쑤였으니, 딱히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달칵.

문이 열렸다. 나루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규연의 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이불 속을 파고들어 규연의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누웠다.

“뭐냐?”

“궁금한 게 있어.”

“안 비키지.”

“사람들이 너 사진에는 하트 많이 누르는데, 나한테는 안 눌러. 왜야?”

규연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나루가 제 할 말만 늘어놨다. 왜 자신의 사진에만 사람들이 하트를 누르지 않는 건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규연은 터무니없는 질문에 재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YK전자 막내아들이고, 너는 아무도 모르는 졸부잖아.”

“그거 나 욕하는 거지.”

“글쎄다.”

“나도 방금 하트 하나 생겼어. 나도 인기 많아.”

나루가 위풍당당한 태도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잠깐 사이에 하트가 2로 늘어나 있었다. 규연은 곧장 핸드폰을 빼앗아 하트 목록과 게시물 댓글을 확인했다.

[ilili_ill 님이 회원님의 게시물을 좋아합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혹여 도민의 계정이 아닐까 의심해 봤지만, 프로필 사진을 보니 여자 같았다. 앳되게 생긴 여자는 나루의 게시글에 하트를 누르고 댓글까지 달아 주었다.

[헉 귀엽게 생기셨어요ㅠㅠㅠ 연생이신가??]

초면에 주접 섞인 댓글을 단 여자는 나루를 어느 소속사의 연습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첫 댓글에 들뜬 나루는 답글을 달 수 있는 거냐며 설레발을 쳤다.

“이거 나도 댓글 달아 줄 수 있는 거지? 그치?”

“아니, 못 달아.”

규연은 나루의 계정을 비공개 계정으로 돌려놓았다. 그냥 정신 차리고 보니 이런 행동을 하고 있었다. 댓글도 못 달게 하고, 계정에 자물쇠까지 걸려서 의아함을 느낀 나루는 대놓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거 뭐야? 자물쇠 생겼어.”

“네 계정을 소수의 사람만 볼 수 있게 잠근 거야.”

나루의 물음에 규연이 태연히 대답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대답하는 목소리가 뻔뻔스러웠다는 것이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원래 이게 더 멋있는 거야.”

“내가 규연이 거라 아무도 못 보게 하는 거야?”

또 나왔다. 불도저 화법.

나루가 몸을 붙여오며 물었다. 가끔은 이런 솔직함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 때가 있었다. 규연은 애써 대답을 회피하며 나루를 밀어냈다.

나루는 호락호락하게 밀려나 주지 않았다. 규연이 밀어내면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와 옆자리를 필사적으로 사수했다.

규연이 침대에서 규연이 냄새난다. 포근하고 시원하고 좋은 향. 최고!

“야, 옆으로 안 가?”

“웅, 안 가.”

“가라고 했다.”

“안 간다고 했다. X발.”

“너 내가 그 욕 쓰지 말라고 몇 번을, 읍!”

기어코 나루가 사고를 쳤다. 쓰지 말라던 욕까지 야무지게 써먹던 그가 규연의 볼을 붙잡고 무작정 입을 맞춘 것이다. 쪼옥, 하는 민망한 소리와 함께 입술을 뗀 나루가 헤실헤실 웃었다. 언제나 순수해 보이던 얼굴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영악해 보였다.

규연은 뭐에 홀린 듯 나루의 뒤통수를 잡아끌었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냐면서 막 화를 내야 하는데,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 버렸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거리를 좁힌 규연이 고개를 슬쩍 비틀었다. 이 상태로 다시 입술이 닿는다면 방금보다 더 깊고 진하게 키스하게 될 것이다.

두근. 두근.

둘 사이의 거리가 1cm도 채 남지 않았을 때, 규연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나루는 긴 속눈썹을 자랑하며 특유의 예쁘장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더 안 하는 거야?”

“……미친.”

“규연아?”

“잘 거니까 건드리지 마라.”

규연이 뒤돌아 누웠다. 덕분에 아슬아슬했던 핑크빛 기류가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루는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규연이 이만큼이나 마음을 열어주었다는 게 기뻐서, 코앞까지 가까워졌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댔다.

규연의 등에 착 달라붙은 나루가 일정한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잔다고 했던 규연은 진짜 잠이 든 건지 말 한마디 없이 조용했다. 두근거림에 잠이 오지 않아 눈만 멀뚱히 깜박이던 나루는 규연의 몸을 넘어 반대편에 몸을 뉘었다.

정말 자고 있었네.

이쪽에서는 규연의 얼굴이 잘 보였다. 올곧게 뻗은 눈썹도, 감은 눈도, 입술도.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루의 두 손이 규연의 양쪽 뺨에 닿았다. 붕어 입술이 될 정도로 볼을 구긴 나루는 제 입술을 두어 번 맞대며 뽀뽀했다.

쪽, 쪽, 쪼옵!

자는 사람에게 몰래 하기에는 참 대담한 스킨십이었다. 게다가 입술도 격하게 맞춰서 민망스러운 소리가 온 방에 울려 퍼졌다.

혼자 만족한 나루는 규연의 볼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덕분에 자는 척하던 규연만 곤란해졌다. 일어나서 화를 낼 수도 없고, 참.

부처 같은 인내심으로 눈 뜨기를 참아낸 규연이 숨을 내쉬는 척 한숨을 뱉었다. 격하게 뽀뽀해대던 나루는 규연의 품속으로 몸을 구겨 넣는 중이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골 때리는 짓이었다.

얘 설마 내가 자는 동안 계속 이렇게 행동해온 건 아니겠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규연이 포기한 듯 제 몸을 모두 내어줬다. 애초에 내어줄 생각이 없었어도 나루가 정복했겠지만.

“진짜 잘 자, 규연아.”

규연의 허리를 꼭 껴안은 나루가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이건 규연이 깨어있는 걸 알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건넨 말일까. 아리송했다.

송나루, 이 요망한 새끼. 내 속을 다 뒤집어 놓고 있어.

나루의 행동에 잠이 깬 규연은 몇 시간 동안 잠들지 못했다. 반대로 나루는 규연의 품속에서 새근새근 잘만 잤다. 어찌나 편하게 자던지 잠꼬대까지 했다.

오늘도 의도치 않게 나루의 꼼수에 당한 규연이 이마를 짚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제 마음까지 다 내어주고, 나루에게 끌려다닐 것 같아서 무서웠다.

한참 고민하던 규연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고요한 침대 위로 두 개의 숨소리가 겹쳐 들렸다.

“규연이는 자는 척도 잘해.”

잠꼬대하는 척 명연기를 펼치던 나루가 슬며시 눈을 떴다. 당장이라도 이 방에서 내쫓길 줄 알았는데, 규연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나루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규연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규연의 허리를 더 세게 껴안은 나루가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드디어 규연의 마음을 얻어냈다는 생각에 들떠 웃음이 피실피실, 흘러나왔다. 애정의 표시로 규연의 품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던 나루는 5분도 지나지 않아 잠들어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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