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30)


나루는 규연이 어떤 심정인지도 모르고 신나 있었다. 전에는 조금만 심심해도 규연의 옆에 들러붙어서 놀아달라고 조르더니, 이제는 핸드폰을 만지느라 바빠 보였다.

사람들 다 쓰는 메신저부터 유행하는 SNS까지 모두 설치한 후에는 카메라 앱을 깔았다. 카메라로 보는 세상은 또 다르게 다가왔다.

반짝이는 필터를 씌우면 세상이 온통 핑크빛이었고, 고양이 필터를 씌우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고양이 귀와 꼬리를 매달고 다녔다. 나루는 사진 찍는 재미에 빠져 규연을 제 모델로 삼았다.

“여태 핸드폰도 안 써 보고 뭐 했냐.”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해서…….”

“괜히 물어봤네.”

규연은 또 한 번 인류애를 잃었다. 나루의 부모는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이었다. 전 국민이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을 필요 없다며 사 주지 않았다니. 예상대로 나루는 부모에게 학대당한 게 확실했다.

나루는 규연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본 규연은 헛웃음을 쳤다. 이런 건 또 언제 배웠는지, 화면에 토끼 귀 필터가 씌워져 있었다.

“이런 건 너나 찍어.”

나루의 손을 붙잡아 방향을 돌린 규연이 촬영 버튼을 대신 눌러 줬다. 토끼 필터는 날카로운 인상의 규연보다 온순하게 생긴 나루에게 더 잘 어울렸다. 아니, 잘 어울리는 걸 넘어서서 깜찍하기까지 했다.

멀뚱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던 나루는 곧장 갤러리로 들어가 제 사진을 확인했다. 제 얼굴에 익숙하지 않은 나루는 찍힌 사진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삭제 버튼을 누르려는데, 지켜보던 규연이 그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야, 뭐 해?”

“이거, 이상해서 지우려고…….”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핸드폰 이리 줘 봐.”

나루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 간 규연이 방금 찍은 사진을 제 메신저로 전송했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는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손이 마음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나루는 규연이 마음대로 핸드폰을 만지도록 두었다. 자신이 뭔가를 터치할 땐 말을 듣지 않는 것들이, 이상하게 규연의 손에 넘어가면 깔끔히 정리됐다.

규연은 핸드폰을 건네주기 전에 제 번호를 먼저 저장해 놓았다. 아무것도 없는 연락처에 제 이름만 떡하니 띄워져 있는 게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내 번호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전화?”

“이 버튼 누르면 돼.”

규연의 지시대로 초록색 전화 버튼을 누른 나루가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규연은 이번만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전화를 받으니 바로 앞에서 나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규연아, 들려?”

“…어, 들려. 앞으로 이렇게 해.”

해맑은 얼굴에 정신을 빼앗긴 규연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나루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소중히 집어넣고 규연의 손을 붙잡았다. 또 예고 없는 스킨십이었다.

강제 뽀뽀를 당한 뒤로 심란해져 있던 규연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내고 말았다. 덕분에 나루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물들었다.

“나는 그냥 안 잃어버리려고 잡은 건데…….”

“너는 아무 손이나 그렇게 덥석 덥석 잡냐.”

“아무 손 아니야. 규연이 손이잖아.”

“말은 잘해요.”

당돌한 대답에 져 준 규연이 다시 손을 붙잡았다. 미지근하면서 따듯한 온기가 괜히 마음을 간질였다. 그냥 사심으로 규연의 손을 붙잡았던 나루는 불쌍한 척 연기한 게 통했다며 속으로 기뻐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카페에서 나와, 다시 규연의 카페로 향했다. 두고 온 물건이 있기도 했고, 나루도 서연에게 핸드폰 자랑을 하고 싶어서 들렀다 집에 가기로 한 것이다.

쉴 틈 없이 일하던 서연은 나란히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규연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루는 싱글생글 웃으며 똑같이 손을 흔들어 줬다.

“한 번 나가면 다시 안 오는 분이 웬일이세요?”

“까분다. 다이어리 찾으러 온 거야.”

“나루 씨, 핸드폰 좀 구경시켜 주세요. 저도 볼래요.”

규연의 대답을 깔끔히 무시해 버린 서연이 나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루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곧장 서연에게 넘겨줬다. 보통 남에게 핸드폰을 잘 넘겨주지 않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루는 다 봐도 상관없다며 흔쾌히 구경시켜 줬다.

서연은 우선 제 번호부터 저장하고, SNS 앱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생성된 계정은 텅텅 비어 있어서 깔끔했다. 프로필 사진도 없고, 게시물도 없고, 친구도 없고.

어라?

아무것도 없어야 할 친구 목록에 숫자 1이 적혀져 있었다. 팔로워 1, 팔로잉 1. 그 사이에 누군가와 맞팔로우를 한 걸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팔로워 목록을 확인한 서연이 입을 틀어막았다.

“허업!”

“왜, 왜요?”

“아니, 사장님이 나루 씨랑 맞팔을 했어요? 와, 대박.”

팔로워 목록에는 규연의 계정 하나가 덩그러니 띄워져 있었다. 서연은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며 주접을 떨어댔다. 아까 도민 씨한테는 아무나랑 맞팔로우 안 한다더니, 나루 씨는 아무나가 아니라는 건가. 음흉한 미소를 짓던 그녀가 프로필 변경 버튼을 눌렀다.

나루는 서연이 뭘 하든 가만히 두었다. 핸드폰 조작에 능숙한 서연이라면 알아서 도움 되는 걸 깔아주겠지, 싶어 가만히 둔 것이었다.

규연이 다이어리를 챙기는 동안 눈치를 살피던 서연이 잽싸게 프로필 소개 글을 바꿔 놓았다.

<규연이 애인>

규연이 알아챈다면 당황할 법한 소개 글이었다. 킥킥거리며 웃던 서연은 SNS 창을 내리고 갤러리로 들어갔다. 구매한 지 얼마 안 된 핸드폰인데 사진이 벌써 40개나 저장되어 있었다. 사진 구경을 하던 서연은 또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귀, 귀여워……!”

“뭔데요?”

“나루 씨, 이거 셀카 뭐예요? 너무 귀여워요.”

낯선 이에게 듣는 칭찬은 늘 쑥스러웠다. 나루가 어색해하고 있는 사이, 서연이 토끼 필터가 씌워진 사진을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 등록해 줬다. 깔끔히 비워진 메신저 친구 목록에는 규연의 이름과 서연이 이름만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뿌듯하다. 나루 씨, 저한테 꼭 메시지 보내세요. 이거 누르고, 채팅 누르면 보낼 수 있어요.”

서연에게서 메시지 보내는 법을 터득한 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삼아 규연에게 ‘안녕’이라고 전송해 본 나루가 쓸쓸히 떠 있는 말풍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적으며 가게를 돌던 규연은 핸드폰을 확인하고 카운터를 휙, 돌아봤다.

서연은 잽싸게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고, 나루는 여전히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규연은 답장을 보내주고 일을 빠르게 정리했다.

지잉.

[집에 갈 준비나 해]

“집에 갈, 준비나, 해…….”

“답장 그렇게 왔어요? 사장님 가시려나 보다. 크림치즈 쿠키 챙겨 드릴 테니까 가져가세요.”

카운터 근처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던 서연이 리본으로 포장된 상자를 나루에게 건넸다. 나루는 쿠키 상자를 품에 꼭 껴안고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일을 마치고 온 규연은 어서 가자며 나루를 이끌었다. 하여간 서연과 붙여 놓으면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는데 묘한 질투심이 일었다.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나루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규연은 핸드폰을 준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옆에서 잘도 조잘거리더니, 핸드폰이 그렇게 좋은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줘 봐도, 나루는 고개를 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규연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스스로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걸 어찌 막을 수는 없었다.

규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루는 소파에 털썩, 누워 메신저 앱을 켰다. 차 안에서 ‘나에게 보내기’ 기능으로 메시지 보내는 연습을 많이 했으니, 이제 규연에게 보낼 차례였다.

[규연아 머해] 전송.

침대에 누워 있던 규연은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게 차마 나루가 보낸 메시지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핸드폰은 수시로 알림을 울려대곤 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지인들의 안부 인사, SNS 좋아요 알림, 은행 알림까지 복잡하게도 울려댔다.

지잉. 지잉. 지잉. 지잉.

그래도 이렇게 광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인간은 없었는데, 뭐지. 한 번 울리던 진동이 연달아서 계속 울렸다. 짜증스럽게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규연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규연아 머해]

[규연아 삐진거 아니지]

[나 사진을 많이 찌겄어]

[내꺼 메시지 보여??]

[여부세요]

엉성한 맞춤법부터 말투까지, 모두 어이없이 웃겼다. 규연은 답장을 보내는 대신 방문을 열고 나왔다. 답장해 줬다가는 재미가 들려서 얼굴을 보고 대화할 것 같지 않았다. 그 전에 싹을 잘라 놓아야 했다.

“야, 송나루. 집에 있을 땐 말로 해.”

“이거 편한데.”

“아, 그러세요? 그렇게 편하면 따로 떨어져 살지 왜. 메신저로 다 할 수 있는데, 굳이 같이 살 필요가 있냐.”

쿠궁.

규연의 충격 발언에 나루의 몸이 굳어 버렸다. 3초 동안 굳어 있던 나루는 잽싸게 고개를 내저었다. 핸드폰으로 연락하는 것보다 규연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다.

나루의 필사적인 반응에 규연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쩜 가면 갈수록 행동이 유치해지는 듯했다. 나루가 순진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꼬투리를 잡고 놀려댔을 것이다.

“저녁 만들 거니까 와서 도와.”

“응!”

상황을 자연스레 넘긴 규연이 함께 저녁을 만들자며 나루를 불러들였다. 핸드폰을 소파 위에 던져두고 규연의 뒤를 졸졸 따라온 나루가 어깨 너머를 기웃거렸다. 평소에 사고만 친다고 저녁 준비를 못 돕게 했는데, 웬일로 허락해 줘서 들뜬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나름 핑크빛 분위기를 풍기며 요리를 완성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소고기 스테이크와 새우 샐러드였다. 식탁에 접시를 올려놓은 나루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소파에서 핸드폰을 가지고 돌아왔다.

앞으로는 이 핸드폰에 규연과의 추억을 남길 생각이었다. 곧바로 카메라를 켠 나루는 어설픈 솜씨로 사진을 찍었다. 플레이팅이 예쁘게 되어 있어서 그런지 대충 찍어도 예쁘게 나와서 뿌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규연은 대신 찍어 주겠다며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 확실히 SNS를 자주 해서 그런지 사진 찍는 솜씨가 나루보다 훨씬 뛰어났다.

사진을 두어 장 정도 남긴 규연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나루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런데 그때였다.

띠링.

[seoyeon22_22_ss 님이 회원님을 팔로우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단에 SNS 알림이 띄워졌다. 동시에 규연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핸드폰을 건네주다 말고 다시 빼앗은 그가 알림을 눌러 팔로우한 계정을 확인했다.

나루의 계정을 팔로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서연이었다. 규연은 저도 모르게 안심하며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나루의 SNS 계정 정보가 띄워져 있었다. 규연은 무언가를 확인하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규연이 애인>

“…….”

소개 글에 황당한 말이 쓰여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루는 순수한 눈을 깜빡이며 규연을 바라보았다.

“이거, 네가 썼냐…?”

“뭐?”

“SNS에 내 애인이라고 적어 놓은 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화면을 확인한 나루가 헉,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이런 말을 적어 놓은 적이 없는데, 좋은 기회였다!

탁!

규연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채 간 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요망한 행동에 넋이 빠진 규연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누가 네 애인이야.”

“나.”

규연의 쌀쌀맞은 말에 지지 않고 대답한 나루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네가 아니라고 하면 어쩔 건데’라는 태도였다.

나루의 예상과 다르게 규연은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만 내뱉을 뿐, 핸드폰을 빼앗거나 소개 글을 바꾸라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봐, 규연이 너도 인정하고 있잖아!

속마음으로 대꾸한 나루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맑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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