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연은 회사 앞 카페로 들어와 나루를 앉혀 놓았다. 오는 길에 무슨 색 핸드폰을 가지고 싶냐고 물어보니, 나루는 연하늘색이 갖고 싶다고 했다. 규연은 망설임 없이 YK전자 본사로 차를 몰았다.
마침 출시되지 않은 최신형 핸드폰의 한정판 색상이 딱 연하늘색이라 형에게 하나 받아 올 생각이었다.
나루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포크를 들었다. 분명 방금까지 카페에 있었는데, 왜 또 여기로 데리고 왔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규연은 자세한 사정까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여기에 잠깐 있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드라마를 보면 꼭 이런 식으로 애를 버리고 가던데, 나루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싫어. 나도 같이 갈래.”
“아니, 넌 저기 들어가면 큰일 나. 금방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안 올 거면서.”
“제발 내 말 좀 믿어라.”
나루가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는 무슨, 오히려 의심하고 있었다. 규연은 좋은 일 하려다 의심만 받아서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일단 YK전자 건물에 나루를 데리고 들어가면 사진부터 찍힐 가능성이 있다. 직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 반드시 형이나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귀찮게 붙잡혀서 조사를 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가 제 일에 간섭하는 걸 싫어하는 규연은 형에게 들키지 않도록 나루를 카페에 숨기고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나루가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이었다.
“자, 이거 먹고 있어.”
“언제 올 거야? 몇 시? 몇 분에?”
“한, 세 시에는 올게.”
“안 오면?”
“아, 온다고.”
규연이 미간을 찌푸리자 나루도 덩달아 인상을 썼다. 너만 인상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였다. 하여간 조그마한 게 성깔 하나는 대단했다.
반쯤 포기한 규연은 반드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손가락까지 걸었다. 애초에 약속이라는 걸 못 믿는 나루는 규연을 끝까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올 거야. 너야말로 어디 움직이지 마.”
“나 안 움직여.”
“누가 말 걸어도 대답하지 말고, 알겠냐?”
“…….”
“야, 대답 안 해?”
“생각해보고…….”
괜히 데리고 나왔나. 차라리 내 카페에 두고 혼자 다녀올걸 그랬나.
골치 아픈 대답에 가슴께를 두드리던 규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라 하려 해도 저 처연한 눈 때문에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나루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줬다.
규연의 스킨십에 놀란 나루가 경직된 상태로 얼굴을 붉혔다. 방금까지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노려보더니, 만져주는 건 또 좋았던 모양이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이걸로 더 주문해. 금방 올게.”
“……응.”
제 카드를 나루의 손에 쥐여준 규연이 불안을 가득 떠안고 카페를 나섰다. 나루는 카드를 쥔 손으로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해맑은 나루를 뒤로하고 나온 규연은 바로 옆 건물인 YK전자 본사로 향했다. 형은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얼굴을 보면 또 뭐 하고 사느냐고 잔소리를 해댈 게 뻔했다. 어떻게 된 게 형이 아버지보다 더 자신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본사에 들어선 규연이 자연스레 직원용 입구를 통과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규연이 등장하자마자 주변이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로비를 지나다니던 직원들은 규연을 알아보고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고, 몇 명은 인사도 건넸다.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온 규연은 비서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형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규연이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 다들 익숙하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봤다.
“형, 오랜만.”
“유규연. 너 내가 연락하고 들이닥치랬지.”
“이번에 나올 핸드폰 예쁘더라.”
규연의 형, 유규성은 10살 차이 나는 첫째로 YK전자의 부사장이었다. 규연과 많이 닮았지만, 더 무게감 있고 차분한 이목구비를 지닌 규성은 올곧은 성품과 깔끔한 인상으로 늘 1등 신랑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규연의 등장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던 규성이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가 일에 미쳐 깐깐해 보이긴 해도, 막냇동생에게만큼은 한없이 인자했다. 규연도 그걸 알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거였다.
소파에 앉아 살살 눈웃음을 치던 규연이 제 형을 꼬드겼다. 차를 살 때도, 집을 살 때도, 이렇게 찾아와서 형을 살살 구슬리면 용돈 주듯 턱턱 사 주는 게 바로 규성이었다.
“또 뭐야.”
“아직 출시 안 된 거. 나 줘라, 형.”
“저번에는 네 스타일 아니라며.”
“아, 아아, 생각해 보니까 괜찮더라고.”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규성의 집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규성은 테스트 겸 출시될 핸드폰을 규연에게 건네줬었다. 굳이 규연에게 먼저 주려고 한 건, 홍보 때문이었다.
SNS 팔로워 수가 많은 규연이 은근슬쩍 새 제품을 사진에 비춰 주면 큰 이슈가 된다. 사람들은 이번에 나올 핸드폰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서도, 막상 출시되면 먼저 구매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규연은 아주 좋은 홍보 매체였다.
그래, 홍보해주는 건 좋긴 한데 걸리는 게 있었다.
저번에 모델을 봤을 땐 색이 별로라며 사용하지 않겠다더니, 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대뜸 찾아와서 핸드폰을 달라고 하는 게 이상했다. 규성은 규연에게 여자가 생겼다고 오해했다.
“여자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니거든.”
“SNS에 사진 올려. 티 안 나게.”
“형은 가끔 보면 일에 미친 것 같아.”
질린다는 듯 고개를 휘저은 규연이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잔소리 듣기 싫으니 어서 핸드폰이나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규성은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규연에게 건넸다. 그 자리에서 바로 상자를 열어 본 규연은 파스텔 계열의 연하늘색 핸드폰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끝이 살짝 둥글게 나와서 그런지 동글동글하니 귀여운 게 나루와 딱 어울렸다.
“형 고마워, 나 그럼 간다.”
“잠깐 서 봐, 유규연.”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려던 규연은 규성에게 붙잡혀 버렸다. 붙잡기 전에 빨리 튀려고 했더니, 눈치 빠른 규성이 놓칠세라 붙잡은 것이었다. 짜증 섞인 얼굴로 뒤돌아선 규연은 애써 웃어 보였다.
“뭐 나한테 할 말 있어?”
“너 요즘 뭐 하고 돌아다녀. 소문 들어 보니까 클럽에도 안 간다던데.”
“안 가면 좋은 거 아닌가. 나 요즘 내 카페 운영하느라 바빠.”
“…그래. 내 귀로 다 들어오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살아.”
쓸데없는 짓을 굳이 강요해서 말한 규성이 이제 됐다며 손을 휘저었다. 규연은 찝찝한 얼굴로 집무실을 나섰다. 올 때마다 늘 비슷한 말을 듣곤 하지만, 오늘은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규성은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규연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그 집요한 시선에 부담을 느낀 규연이 재빨리 문을 닫아 버렸다. 아무리 제 형이라지만, 저런 눈을 할 때면 등골이 서늘해졌다.
와, 설마. 형이 내 집에 송나루 들인 거 알아챈 건 아니겠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규연이 걸음을 빨리했다. YK전자 막내아들인데 본사 건물에 있는 게 왜 이리 숨 막히는지 모르겠다.
단 3분 만에 건물에서 나온 규연은 나루가 있는 카페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백화점 때처럼 혼자 도망가 버릴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규연은 곧장 나루가 앉아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그 자리에 나루가 앉아 있지 않았다.
순간 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짧은 사이에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벌벌 떨렸다. 한 편으로는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대체 어디로 사라진……!
“규연아?”
“너, 너…….”
“크림 먹고 싶어서 이거 하나 사 먹었어.”
“하아…….”
사라진 줄 알고 패닉에 빠져있었는데, 갑자기 나루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운터 쪽에서 나타난 나루는 한 손에 휘핑크림이 올라간 프라푸치노를 들고 있었다. 규연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나루는 말간 얼굴로 규연을 가만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나타나서 깊은 한숨을 내뱉는 게 이상해서였다.
아, 내가 마음대로 돈을 써서 그런 건가.
잘못 넘겨짚은 나루가 멋쩍은 표정으로 목을 긁적였다. 음료값만 7천 원이 넘게 나왔는데 이 사실을 그대로 말하기가 미안해졌다.
“저, 마음대로 카드 써서 죄송해,”
“됐어, 사 먹으라고 준 건데 뭐가 죄송해. 난 네가 사라진 줄 알고…….”
“내가, 사라져?”
“아니, 방금 한 말 신경 쓰지 마. 일단 가서 앉아 봐.”
자리로 돌아와 앉은 나루가 규연의 눈치를 살폈다. 뉘앙스로 봐서는 내가 사라졌을까 봐 걱정한 듯한데. 정말일까. 기분 좋은 의심을 하던 나루가 헤실거리며 웃었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민망해진 규연은 일부러 웃지 말라며 핀잔을 줬다. 나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웃음기를 지워내지 않았다.
규연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받아 온 핸드폰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호기심 많은 나루는 바로 손을 뻗어 상자를 툭툭, 건드려 보았다. 흰색 상자에는 로고 하나만 깔끔히 박혀 있어서 뭐에 쓰는 물건인지 유추하기 어려웠다.
“열어 봐.”
“내 거야?”
“어. 핸드폰 갖고 싶다며.”
“……핸드폰!”
핸드폰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던 나루가 상자를 거침없이 개봉했다. 겉 스티커를 떼어내고 윗 뚜껑을 열자마자 연하늘색 핸드폰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도 대지 못한 채 핸드폰을 구경하던 나루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졸부라는 애가 핸드폰을 저렇게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다니. 부모가 얼마나 각박하게 키웠으면 저럴까. 가만 보면 집안만 괜찮았지, 애를 거의 학대하며 키운 수준이었다. 규연은 이런 나루를 안쓰럽게 여겼다.
“정말 내 거 맞아?”
“네 거라니까.”
“규연아, 할 말 있어. 귓속말!”
핸드폰을 제대로 구경하기 전에 규연의 상체를 제 쪽으로 이끈 나루가 손을 팔랑거렸다. 더 가까이 다가오라는 뜻이었다.
못 이기는 척 귀를 내어준 규연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상했다. 귀에 대고 고맙다는 말이나 하겠지. 뭐, 나름 귀여울지도.
쪽.
……어?
규연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나루는 귓속말하는 척하며 규연의 볼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다행히 손으로 앞을 가려서 아무도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규연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나루를 쳐다봤다. 예전 같았으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뻔뻔스럽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나루는 핸드폰 구경을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꺼내 만져 보며 감탄사를 내뱉고, 이런저런 버튼을 누르며 사용법을 익혀갔다. 누구는 심장이 터질 위기를 느끼고 있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뭐야, 심장이 왜 이렇게 뛰는 건데. 미친. 유규연, 너 지금 뭐 하냐……?
마른침을 꼴깍, 삼킨 규연이 나루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핸드폰을 구경하다 말고 규연과 시선을 마주친 나루는 세상 예쁘게 웃어 보였다. 아주 화사하고, 예쁘게.
규연은 나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닌 저 미소가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여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아, X됐다…….
마침내 제 마음을 깨닫고야 만 규연이 허망하게 욕을 짓씹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