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전의 디저트 카페는 주말보다 한산했다. 규연은 못마땅한 얼굴로 가게 문을 열었다. 가게에 오는 내내 나루가 보인,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규연의 심기를 뒤틀기에 충분했다.
서연은 규연의 표정을 발견한 후,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런 날 잘못 걸리면 잔소리는 물론이고, 쓸데없는 걸로 트집이 잡힐 수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직 규연을 다 파악하지 못한 도민은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짙은 갈색의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머리까지 단정하게 세팅해 놓으니 처음 봤을 때보다 인상이 더 좋아 보였다.
뒤따라 들어온 나루는 규연의 뒤에 몸을 숨기고 도민을 경계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규연이 옆에 꼭 붙어있으리라.
“나루 씨도 오셨네요? 제가 오늘은 말차 쿠키를 따로 빼놨어요.”
“와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차가 뭐예요?”
“녹차 알죠? 그 찻잎을 분말로 곱게 간 거예요. 그걸로 쿠키를 만든 거고요!”
나루를 발견하고 달려 나온 서연이 새벽부터 만든 말차 쿠키를 내밀었다. 먹을 거라면 일단 받고 보는 나루는 서연을 신 보듯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규연은 여전히 그런 나루가 마땅치 않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도민은 가만히 서서 이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서연은 나루에게 호의적이고, 규연은 늘 나루와 함께 다니지만 까탈스럽게 굴고. 나루와 규연은 대체 어떤 사이인지 유추하기 어려웠다.
“잡담 그만해. 송나루, 너는 저기 앉아 있어.”
“빵 먹어도 돼요?”
“먹어.”
“야호!”
가끔 보면 쟤 머릿속은 꽃으로 가득 찬 것 같단 말이지.
좋다고 뛰어가는 나루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헛웃음을 친 규연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굳혔다. 짧은 사이였지만 도민은 그 표정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눈치가 빠른 건 도민뿐만이 아니었다. 서연은 첫 만남부터 신경전을 벌이던 나루와 도민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민은 규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순진한 눈매로 상황을 훑으며 나루를 의식하는 게 보여서, 서연은 도민을 마냥 좋게 바라볼 수 없었다.
나루 씨, 파이팅!
속으로 나루를 응원한 서연이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규연은 제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진열 순서를 바꾸라느니, 새로운 재료를 가지고 왔다느니,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나루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원하는 빵을 가득 담고 돌아온 나루는 2차 식사 중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이것저것 맛보면서도 시선은 규연에게 진득히 붙어 있는 채였다. 하지만 나루만큼이나 눈치가 없었던 규연은 그 시선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그리고 새 메뉴 나온 김에 홍보 겸 SNS 업로드 해야 하는데 그건…….”
“제가 할게요!”
“네가? 아니, 도민 씨가?”
홍보 이야기를 꺼내던 규연이 SNS 담당자를 지목하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얌전히 듣고 있던 도민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신입인데 SNS 계정을 관리하겠다니, 열정도 크고 간도 컸다.
습관처럼 ‘네가?’라는 말을 내뱉은 규연이 호칭을 정정했다. 하지만 못 믿겠다는 표정은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규연이 이렇게 싸가지 없이 행동하면 풀 죽어서 아무런 말도 못 했지만, 도민은 오히려 더 당당히 말을 이어갔다.
“제가 사실 팔로워 수가 좀 많거든요. 자랑은 아니지만, 계정 굴리는 건 자신 있어요.”
“어머, 도민 씨 인기쟁이인가 보다. 나 구경해도 돼요?”
“잠깐 보여드릴게요.”
팔로워 수를 앞세운 도민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은 서연은 구경하고 싶다며 도민을 부추겼다.
굳이 개인 계정까지 궁금하지 않았던 규연은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기다려 줬다. 팔로워 수가 어떻든, 셀럽인 규연에게는 그저 하찮아 보일 뿐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귀를 기울이던 나루는 저게 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핸드폰도 없는 데다가, SNS도 뭔지 몰라서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와, 팔로워 수 진짜 많네요. 맞팔은 적은데, 이게 셀럽이구나.”
“아, 아니에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네요. 하하.”
“어머, 그런데 이거 사장님 계정 아니에요? 사장님이랑은 맞팔 안 되어 있네요? 사장님 SNS 보면 잘생긴 사진이 많아서, 저도 몰래 구경해요.”
팔로우 목록을 구경하던 서연이 익숙한 계정을 손가락으로 콕 집었다. 사진도 그렇고 아이디도 어딘가 낯이 익은 게, 자세히 보니 규연의 계정이었다. 아래에 있는 걸로 봐서는 SNS를 시작하자마자 규연을 팔로우한 듯했다.
당연히 두 사람은 맞팔로우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애초에 규연은 아무나와 맞팔로우 하지 않았다. 그의 자존감이나 성깔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도민은 어쩌다 발견한 규연의 SNS 계정에서 카페 사진을 보고 무언가의 환상을 가졌다. 깔끔한 내부, 서로 견제 없이 행복하게 일하는 직원들. 마치 꿈의 직장을 보는 것 같았다. 정확히 세 번째 카페 사진을 보던 도민은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규연의 카페에서 일하겠다고.
“아, 우연히 보고, 카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팔로우했어요!”
“…….”
정작 규연은 도민에게 관심이 없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였다. 도민은 보통의 사장들이 직원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심한 규연의 태도를 강철처럼 이겨낸 도민이 급히 대화를 이어갔다. 뻔뻔스럽게 대응하는 건, 이전 일터 직원들과 부대끼며 습득한 기술이었다.
“저기, 사장님. 말 나온 김에 저랑 맞팔 해요!”
“나 아무나랑 맞팔 안 해.”
“아아, 아쉽네요.”
넉살 좋게 맞팔을 청한 도민이 깔끔히 거절당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서연은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지, 어쩜 저리 칼같이 거절할까.
규연의 올라간 입꼬리가 오늘따라 재수 없어 보였다. 매몰차게 거절당한 도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행동했다. 규연도 만만치 않지만, 도민도 생각보다 기가 셌다.
“SNS 계정은 네가 관리해.”
“저요? 저는 이런 거 자신 없단 말이에요.”
“돈 더 줄게.”
“아이쿠, 말이 헛나왔다. 완전 자신 있단 말이에요.”
돈 하나에 태도가 싹 바뀌는 서연이 어이없어서 규연이 허탈하게 웃었다. 싹바가지 없이 굴긴 해도, 오래 함께 한 직원에게는 나름 친근하게 대하는 규연이었다.
SNS 이야기를 끝으로 직원들을 해산시킨 규연이 나루에게 다가왔다. 한 손에는 이미 물티슈가 들려 있었다.
“잠깐 사이에 다 묻히고 먹냐.”
“…….”
익숙하게 입을 닦아 준 규연이 나루의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나루가 뭔가 이상했다. 웃지도 않고, 어딘가 표정이 뚱한 게 삐친 것 같았다. 규연은 나루가 왜 이러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멀리서 규연과 직원들을 지켜보던 나루는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SNS 이야기를 하며 다들 핸드폰을 쳐다볼 땐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유추할 수 없어 기분이 꽁했다.
규연과 붙어 있을 땐 몰랐는데, 이런 사소한 것에서 소외감을 느끼니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마저 들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던 나루가 고개를 푹 숙였다. 희미하긴 했지만, 서연이 분명 사장님 SNS에 잘생긴 사진이 많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핸드폰이 있어서 규연의 사진을 구경할 수 있는데, 혼자 못 보는 게 억울하고 속상한 모양이었다.
“나도 사진 보고 싶은데…….”
“어? 안 들렸어.”
“아, 아니에요.”
다 먹은 쟁반을 반납하기 위해 일어선 나루가 카운터로 향했다. 손을 붙잡아 세우려던 규연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규연은 그 자리에 앉아 나루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저, 이거…….”
“다 드셨네요? 말차 쿠키 하나 더 드릴 테니까 사장님 몰래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나루가 카운터로 다가오자 서연이 반갑게 뛰어와 말차 쿠키를 더 쥐여 줬다. 귀여운 것에 약한 그녀는 나루의 동글동글한 얼굴을 붙잡고 피부가 좋다는 둥, 볼이 말랑거린다는 둥, 민망한 말들을 연신 내뱉었다.
가만히 얼굴을 내어주며 웃던 나루는 이때를 노려 서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친절한 서연이라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줄 것 같아서였다.
“아까 그거, 규연이 사진 볼 수 있다고 말씀한 거…….”
“아, SNS요? 어라, 그러고 보니까 나루 씨는 핸드폰 없어요?”
“네에, 없어요.”
“잃어버리셨나? 사장님 사진 궁금하면 제가 몰래 보여드릴게요. 잘생긴 거 짱 많아요.”
원래 본인 이야기보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할 때 더 즐거운 법이다. 서연은 곧장 핸드폰을 꺼내 규연의 SNS로 들어갔다. 프로필부터 ‘나 셀럽이에요.’라고 말하는 듯한 규연의 계정은 팔로워 수만 무려 67.4K였다.
어마어마한 팔로워 수와 달리 팔로우 수는 가뭄 수준이었다. 콧대 높은 규연이 ‘아무나’와 맞팔로우를 하지 않은 탓이었다.
서연은 스크롤을 내리며 규연의 사진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이라든가, 이름 모를 외국인들과 찍은 사진, 간혹 손만 찍어 올린 사진도 있었다.
나루는 전부 제 눈에 담겠다는 듯 규연의 사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서연은 집중하고 있는 나루의 뒤통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루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규연은 대놓고 인상을 쓰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쟁반이나 놓고 올 것이지, 갑자기 서연과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는 게 거슬렸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규연은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졸지에 사진 구경하던 걸 들켜 버린 나루는 핸드폰을 돌려달라며 손을 쭉 뻗었다.
“줘!”
“쟁반 놓고 오라니까 여기 서서 뭘 하는 거야. 너는 일 안 해?”
“그거 규연이 사진이란 말이야!”
“내 사진?”
규연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퍼졌다. 서연은 오해하지 말고 보라며 핸드폰 화면을 가리켰다. 팔을 내려 화면을 확인한 규연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쳤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나 했더니, 알고 보니 자신의 SNS였다. 나루가 이 사진들을 빤히 보고 있었다는 게 민망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으면 모를까.
규연의 눈치를 살살 살피던 나루가 셔츠 끝을 붙잡아 당겼다. 할 말이 있을 때마다 하던 행동이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러는 거야.
속은 복잡하면서, 애써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본 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루는 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규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저 눈에 별이라도 박아 놓은 걸까. 다른 사람과 다를 거 없는 눈동자인데 이상하게 나루가 저렇게 쳐다보면 홀릴 것 같았다.
“나도 저거 갖고 싶어요.”
“…뭐?”
“저거, 핸드폰.”
소심한 손짓으로 핸드폰을 가리키던 나루가 규연의 팔을 슬쩍 잡았다. 제 나름 규연을 졸라 보는 것 같은데, 규연이 이런 수작에 넘어갈 리…….
있었다.
“당장 따라 나와.”
“어……?”
나루의 팔을 잡아끈 규연이 가게를 나섰다. 저렇게 갖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안 사 줄까. 그러나 뒤따라 나가던 나루는 혼나는 줄로만 알고 울상을 지었다.
난 그냥 핸드폰을! 규연이 사진을 구경하고 싶었던 건데! 소외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데!
나루가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고, 규연은 형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핸드폰이라면 언제든지 구해 줄 수 있었다. YK전자 막내아들인 규연에게 핸드폰은 굳이 사지 않아도 말만 하면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카운터에 턱을 괴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던 서연이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에 데리고 올 때는 싫어 죽겠다는 표정이더니, 이제는 나루를 감싸고 도는 규연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생각은 이렇게 해도 두 사람의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려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사장님은 좀 그렇지만, 잘 됐으면 좋겠다.
기어코 차에 타는 것까지 구경한 서연이 상쾌하게 뒤돌아섰다.
탁!
“세상에, 도민 씨. 다친 곳 없어요?”
“아, 죄송해요. 손이 미끄러져서.”
“원래 설거지할 때 그래요. 세제가 많이 미끄럽다니까요.”
주방에서 큰 소음이 들려왔다. 설거지를 하던 도민이 컵을 놓친 듯했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서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다.
도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얼굴엔 누군가를 시샘하기보단, 무언가를 불안해하는 기색이 스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