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아침은 제법 쌀쌀했다. 소파 위에서 잠든 나루는 두터운 담요를 턱 끝까지 끌어 올리고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집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텅 빈 거실에 냉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규연은 낑낑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 거실로 나왔다. 무심하게 걸어 나온 그는 제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와 나루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낑낑거리던 소리는 그제야 사그라들었다.
잘 자는 나루를 그대로 두고, 홀로 부엌에 온 규연이 간단한 아침을 만들었다. 토마토를 썰고,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고, 토스트까지 구워내니 꽤 그럴싸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식탁 위에 놓인 컵 하나에는 우유가 부어졌고, 또 하나에는 커피가 내려졌다. 마실 것까지 완벽히 준비하자, 30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야, 일어나.”
“…….”
거실로 나온 규연이 소파 위에 늘어진 나루를 툭툭 건드려 깨웠다. 어떤 때에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부엌을 어지럽히더니, 어제 늦게까지 TV를 보고 자서 이렇게 늘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나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규연은 그냥 깨우지 말까, 고민했다. 아기같이 새근새근 자는 모습이 뭔가 평온하고 귀여워서 가만히 두고 싶었다.
아,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지.
저번부터 자꾸 나루의 얼굴만 보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저 얼굴이 귀여워서 그런 게 아니라, 뭐랄까, 하는 행동이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오묘하게 사람을 이끈다고 해야 하나.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규연이 제 뺨을 두어 번 내리쳤다. 요즘 툭하면 나루에게 정신을 빼앗겨서 문제였다.
“뭐 해요?”
“와! 씨, 놀라라.”
“…….”
어느새 눈을 뜬 나루가 멀뚱멀뚱한 얼굴로 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규연의 얼굴이 보여서 당황스러운데 또 좋은 눈치였다. 입꼬리를 올리며 실실거리던 나루가 규연의 옷 끄트머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는데, 규연이 아침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뭘 봐. 와서 아침이나 먹어. 나 일찍 나가야 해.”
“어디 가요?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요?”
“데리고 갈 거니까, 빨리 먹으라고.”
이제는 데려가라고 애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달고 나가 줬다. 나루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매번 규연이 자신을 두고 갈까 봐 마음을 졸였는데, 최근 들어 이런 일이 줄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식탁에 마주 보고 앉은 둘은 식사를 시작했다. 나루는 오로지 음식에 집중하며 숟가락을 움직이기 바빴고, 규연은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화면으로 보이는 일정표가 꽤 빽빽했다. 오늘은 새 직원인 도민이 첫 출근을 하는 날이라 일찍 가 봐야 했다. 새 직원을 뽑는 게 오랜만이기도 해서, 규연은 최대한 잘해 주자고 마음먹었다. 곧 있으면 바쁠 시기라, 그만두고 나가면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크램블 에그를 숟가락으로 한가득 퍼서 입에 넣던 나루가 규연의 핸드폰을 훔쳐보기 위해 눈동자를 열심히 굴렸다. 나루는 아직 핸드폰이 없었는데, 규연이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볼 때마다 뭘 그렇게 보는 건지 궁금해했다.
“뭐 보는 거예요?”
“일정표.”
“그걸 왜 봐요?”
“오늘 할 일 체크하려고.”
“오늘 뭐 하는데요?”
오늘도 역시 질문 폭탄이 떨어졌다. 규연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나루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질문을 더 던졌다. 여러 번 물어보고 나서야 규연의 시선이 핸드폰에서 거두어졌다.
이제 일부러 그러는 거냐면서 화를 내겠지? 규연이는 항상 그랬으니까.
잔소리가 날아오길 기다리던 나루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런데 다섯이 지나도 규연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 이때 짜증을 내는데, 무슨 일로 조용한 걸까.
“새 직원 출근일이라 잠깐 보러 갈 거야.”
“…….”
유규연이 이상해졌다.
정확히 카페 투어를 다녀온 뒤로, 이상해졌다. 짜증이 일상인 그가 웬일로 온순하게 대답해 주고, 심지어는 미묘하게 웃어 주기까지 했다. 이런 행동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적응이 안 돼서 당황스러웠다.
나루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냥 단순히 기분이 좋은 건가. 아무리 봐도 기분 좋은 일은 없는 듯했다. 참 희한했다.
“새 직원?”
“어, 저번에 봤던 걔.”
“아…….”
그 고양이 같은 사람. 순간 나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새 직원이라면, 저번에 카페에서 보았던 도민을 얘기하는 거겠지. 어딘가 하는 행동이 얄미운 사람이었다.
나루는 규연이 도민과 함께 일하지 않았으면 했다. 도민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익숙했는데, 이상하게 짜증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도민을 보면, 마치 콧대 높은 고양이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규연이가 그 고양이 같은 남자를 쫓아낼까? 으음.
그 직원을 자르지 않겠다면, 나루가 직접 옆을 따라다니면서 경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접시에 담긴 음식을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던 나루가 무언가를 다짐하듯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규연은 그 얼굴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피실,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왜 웃어?”
“내가 방금 웃었나.”
“웃었는데.”
“안 웃었어. 그리고 나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 왜 이럴 때마다 반말 쓰냐?”
나루의 반말에 눈썹을 찡그리던 규연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여태 굳이 얘기하지 않고 있었지만, 나루는 툭하면 묘한 타이밍에 반말을 사용하곤 했다.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정곡을 찔린 나루는 입에 지퍼를 채우고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이럴 때를 보면 고집이 여간 센 게 아니었다. 규연은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접시를 치웠다.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게 눈에 훤해서 잔소리할 생각도 없었다.
이 행동을 오해한 나루는 잽싸게 뒤따라 일어나 규연을 붙잡았다. 늘 옷 끄트머리만 소심하게 붙잡더니, 이번에는 많이 급했는지 규연의 허리를 냅다 껴안아 버렸다.
나루의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규연은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굳어 버렸다. 자그마한 몸집이 제 등에 꼭 붙어올 때마다 온기가 느껴지는데, 기분이 괜히 몽글몽글하니 이상해져서 침조차 삼키기 힘들 정도였다.
“야, 갑자기 왜 이래.”
“계속 존댓말 쓸게요…….”
“뭐라는 거야, 어차피 안 쓸 거면서. 네 마음대로 해.”
“정말요?”
“언제는 허락받고 한 것처럼 얘기하네.”
일부러 틱틱거리던 규연이 허리에 감긴 팔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저도 모르게 규연을 껴안고 있던 나루는 뒤늦게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왜 입맛을 다지고 난리야. 가만 보면 음흉한 구석이 있어, 애가.
나루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규연이 애써 마음속을 비워내며 식기세척기를 작동시켰다. 나루는 심란한 규연의 마음도 모르고 태연하게 씻으러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이 얼마나 여유롭던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규연이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욕실에서 깨끗이 씻고 나온 나루는 최대한 깔끔하고, 최대한 예쁜 옷을 꺼내 입었다. 이전에 규연이 백화점에서 사 준 옷을 맞춰 입은 그는 거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규연이 옆에 있어도 창피하지 않아!
완벽히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은 나루가 강아지 다큐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규연이 준비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는 거였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패턴이 몸에 익은 모양이었다.
“저건 왜 자꾸 보는 거야.”
“불쌍해, 강아지…….”
마침 드레스룸으로 향하던 규연이 TV 화면을 확인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매번 저 강아지 다큐 프로그램을 보고 눈물을 쏟는 나루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불쌍한 장면만 내보내는 프로그램이 뭐 좋다고 보는 건지 참.
오늘 역시 안타까운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 나루가 코를 훌쩍거렸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규연은 진심으로 질린다는 표정을 짓더니 티슈를 건네줬다.
“너 저거 보지 마. 볼 때마다 눈물을 짜요, 아주.”
“크응, 그래도, 저걸 보는 게 마음이 편해서…….”
“마음 편하다는 애가 우냐? 울어? 아무튼 빨리 눈물 닦고 나와.”
“…….”
“그런 얼굴로 나 쳐다보지 말고, 좀.”
나루의 우는 얼굴은 조금 위험했다. 눈가와 코가 발갛게 달아올라서 꼭 복숭아 같았고,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눈은 어찌나 처연한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다 절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얼굴형까지 동글동글하니 귀여운 매력까지 더해졌다.
규연은 저 얼굴을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루가 울 때면 일부러 더 틱틱거리고,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방금도 그랬다.
영문을 모르는 나루는 대충 눈물을 닦아내고 규연의 옆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얼굴이 물러 터진 복숭아를 연상케 했다. 규연은 고개를 홱, 돌리고 주차장까지 직진했다.
규연보다 키가 한참 작은 나루는 보폭을 따라잡느라 반쯤 뛰어야 했다. 오도도도, 뛰어오는 발소리에 티 나지 않게 보폭을 줄인 규연이 차 문을 열었다.
“타.”
조수석에 오른 나루는 규연이 옆에 타기까지 기다렸다. 버리고 가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규연의 동선을 집요하게 훑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
운전석에 타자마자 상체를 나루 쪽으로 기울인 규연이 자연스레 안전벨트를 채워 줬다. 전에는 나루가 직접 멜 때까지 기다리더니,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직접 나서서 메 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정해지는 태도에 나루가 입꼬리를 빙글 올려 웃었다. 차에 탈 때마다 안전벨트 하나로 기 싸움을 했었는데, 이것도 이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킨 규연이 운전하는 내내 조수석을 힐끔거렸다. 바깥 풍경을 구경하던 나루는 창문에 비친 규연의 모습을 발견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규연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앞을 바라봤다.
뭐지? 규연이 뭐 하는 거지?
시선을 돌린 나루가 창문을 보는 척하며 규연을 빤히 쳐다봤다. 역시, 눈이 마주친 건 나루의 착각이 아니었다. 규연은 이번에도 나루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혹시 저 뭐 잘못했어요……?”
“아 씨, 깜짝이야.”
“자꾸 쳐다봐서요.”
“내가 언제.”
오, 규연이 거짓말한다.
들키지 않을 정도로 소리를 죽여 킥킥거리던 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규연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뻤기에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나루가 시선을 거두어 버리자, 규연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도저처럼 제 감정을 밀어붙이던 나루가 갑자기 무신경하게 굴어서 어색해졌기 때문이다.
쟤 갑자기 왜 저래? 나한테 들이댈 때는 언제고. 이제는 모르는 척을 해?
혼자 오해하고 인상을 찌푸리던 규연이 액셀을 세게 밟았다. 카페에 도착하기 전까지 대화나 많이 나눌까 싶어 속도를 일부러 줄이고 있었는데, 창문만 바라보는 나루 때문에 기분이 상한 탓이었다.
갑자기 빨라진 속도에 옆을 바라본 나루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규연의 심통 난 표정이 왠지 모르게 귀여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