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데,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켁, 콜록……!”
여자의 말을 똑같이 따라 해 본 나루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는 소리에 당황한 규연은 사레가 들려 기침을 내뱉었다. 나루는 규연 쪽으로 물을 밀어줬다. 대체 왜 기침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골 때렸다.
물을 마시고 겨우 진정한 규연은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뒤늦게 나루의 얼굴을 살펴보니 이상형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이상형이 뭔지는 알고 물어보는 거지? 어?”
“몰라서 물어본 건데…….”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자세를 바꿔 다른 쪽 다리를 꼬고 앉은 규연이 마음을 차분히 다스렸다. 모른다는 애한테 신경질을 낼 수도 없고, 그냥 제대로 알려주는 수밖에.
규연이 설명을 시작하려 하자, 나루가 새겨듣겠다는 듯 의자를 끌어당겼다. 상체를 쭉 내밀고 귀를 내밀고 있는 꼴이 퍽 귀여웠다. 규연은 애써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기도 모르게 귀엽다는 말이 튀어나올까 봐,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거였다.
“이상형은 네가 선호하는 외모나 성격, 아니면 취미 같은 걸 말해.”
“내가 선호해?”
“그러니까, 내 미래 연인이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거. 예를 들어서 성격이 온순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얼굴은 잘생긴 편이 좋겠다, 뭐 이런.”
드디어 말을 이해한 나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듣고 나니 또 궁금한 점이 생겼다. 바로 규연의 이상형이었다. 규연의 연인을 꿈꾸고 있는 나루는 그의 이상형과 똑같이 되어 볼 생각이었다.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꽃받침 자세로 턱을 괸 나루가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럼 규연이 이상형은 뭐야?”
“그건 왜 물어봐.”
“구, 궁금해서요.”
제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잔뜩 쫄은 나루가 습관처럼 존댓말을 사용했다. 규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줬다.
“적당히 들이대고, 귀찮게 안 하는 사람.”
“아…….”
이래저래 인기인인 규연은 주변인들이 귀찮게 구는 걸 제일 싫어했다. 특히, 초면에 들이대는 사람은 더더욱 비호감이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상형이 뭐냐고 물어보면 외형에 관련된 대답을 내놓았는데, 커 가면서는 방금과 같은 대답을 기계처럼 하곤 했다.
이번에도 익숙하게 입에 밴 대답을 한 규연이 슬쩍 나루를 쳐다봤다. 무언가 실망한 듯 입술을 쭉 내민 게 처연하고 귀여웠다. 팔 자로 늘어진 두 눈썹도 풀 죽은 강아지 같았다.
규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였다. 몇 년 만에 새로운 답을 내놓은 것이었다.
“…귀여운 사람.”
“네?”
“귀여운 사람도 이상형이라고.”
내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지. 그만둬, X발. 유규연! 입방정 그만 떨어!
뒤늦게 후회해 봤자였다. 이미 말은 내뱉어졌고, 나루의 귀는 활짝 열려 있었다. 귀여운 사람이라니. 나루는 순간 착각할 뻔했다. 규연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며 말해서, 기분이 묘해졌다.
어색하게 빨대를 짓씹던 나루가 컵 안에 든 얼음을 괜히 휘적거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메울 때 즈음, 규연이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네 이상형은 뭐냐. 아, 너한테 그런 게 있을 리 없겠지.”
“있어요.”
“……어?”
“내 이상형, 규연이.”
얘는 자존심이라는 게 없나. 매번 뭐가 이렇게 해맑아?
입꼬리를 당겨 웃던 규연이 아닌 척하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심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나루는 얼음을 와그작, 씹어 먹고 있었다.
규연은 그런 나루를 가만히 바라보며 타이밍을 쟀다. 더 자세히 물어볼 타이밍. 이상형이 뭐라고 이렇게 궁금해지는 건지, 자존심이 상했지만, 꼭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그래도 뭐 특징이 있을 거 아니야.”
“으음…….”
골똘히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리던 나루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규연은 괜한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다정하고, 착하고, 천사 같고, 내 말을 잘 들어 주고, 든든한 사람…….”
다정? 착해? 천사? 전부 규연에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규연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나름 나루에게는 다정했고, 착했다. 애초에 자기 소문을 안 좋게 내고 다닌 나루를 이렇게까지 봐주고 있다는 건, 천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나만큼 착한 새끼가 어디 있겠어. 뒷담을 해도 너그럽게 넘어가 주고, 심지어 집까지 내어 주고. 지금도 봐, 쟤한테 디저트까지 다 사 주고. 심지어 든든한 사람? 딱 나잖아. 키 크고, 우직하고.
아, 송나루. 저 요망한 놈. 이상형 말하랬더니 내 얘기를 하고 있네.
“전부 내 얘기네.”
“맞긴 맞는데…….”
“왜 끝을 흐리냐.”
“말을 잘 들어주진 않는…….”
말을 하다가 만 나루가 먼 산을 바라봤다. 이미 할 말 다 해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뭐? 다시 말해 봐.”
규연의 대꾸에 고개를 저은 나루가 몰래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또 ‘어쩌라고’와 ‘미친’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규연은 나루의 골 때리는 태도에 얼이 빠졌다.
그러고 보니 온순해 보이는 나루는 언젠가부터 규연에게 확 덤빌 때가 있었다. 욕도 배워서 서슴없이 써먹고, 어쩔 땐 규연에게 대놓고 뭐라고 할 때도 있었다.
핀트가 엇나간 규연은 이유 없이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너 방금 내 욕했지.”
“아닌데요?”
“뭐가 아니야, 다 들었어. 너 그거 나쁜 말이야, 쓰지 마.”
어린아이를 혼내는 부모처럼 경고한 규연이 눈썹을 찡그렸다. 가만히 앉아 듣고 있던 나루는 동그란 눈을 끔뻑거리다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규연에게 배운 욕을 썼을 뿐인데 혼자만 혼난 게 짜증이 나서였다. 규연은 욕을 자주 썼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나루가 엉뚱한 행동을 할 때마다 습관처럼 내뱉는 게 욕이었다. 자기는 마음대로 쓰면서 나는 하지 말라니.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규연이는 왜 써?”
“그냥 쓰지 말라면 쓰지 마.”
“싫어.”
“야, 너 나한테만 이러지? 어?”
가벼운 말싸움을 주고받던 규연이 답답하다는 투로 물었다. 자주 들어서 익숙한 물음이었다.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루는 곧잘 고개를 휘젓곤 했지만,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고 규연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잘 생각하면 나루는 진짜 규연에게만 이렇게 행동했다. 짜증도 내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이러지 않았다.
맑은 눈망울로 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루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두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응, 너한테만 그래.”
“……!”
그걸 왜 저런 얼굴로 말하는 걸까. 순간 규연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걸 느꼈다.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이 뒤로는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심장 박동이 크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규연의 머릿속이 산만해졌다.
아까부터 왜 이래, 유규연. 정신 좀 잡아라. 아, 심장은 왜 이러는 거야. 속도 울렁거리고.
단 걸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울렁이는 건가. 남은 아메리카노를 모두 들이킨 규연이 빈 컵을 세게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날카롭던 인상은 유독 사납게 변해 있었다.
와중에 나루는 깊이 오해하는 중이었다. 혹시, 내가 얌전하게 굴지 않아서 정이라도 떨어졌나. 규연이가 나한테 정을 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해가 깊어지자 기분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듯했다.
테이블 밑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나루가 규연의 눈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마냥 해맑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아 시무룩하게 들렸다.
“혹시, 내가 바보처럼 굴기를 원해……?”
“…….”
“규연이도 내가 그러길 원하는 거라면…….”
몇 분 사이에 기가 죽은 나루가 눈물을 글썽였다. 규연이만큼은 전 주인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진짜 내가 바보 인형처럼 얌전히 있길 바라는 거라면…….
정말 슬플 거야. 드디어 나로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다시 지하실에 있던 것처럼 살게 된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야.”
나루가 땅굴을 파던 그때, 규연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 한마디가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가려던 나루를 다시 바깥 세상으로 이끌었다.
그는 까칠한 톤을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 나루를 나무라는 투였지만, 그 내용은 어떤 말보다 더 따스했다.
“야, 원래 인생은 바보처럼 살면 손해 보게 되어 있어.”
“…….”
“그러니까 싸가지 없게 구는 한이 있어도, 남한테 절대 만만히 보이지 마.”
“…….”
“알겠냐? 바보처럼 살지 말라고.”
규연의 말이 나루의 가슴에 확 와닿았다. 살면서 이런 충고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나루는 바보처럼 살기를 강요받아 왔다. 전 주인은 표현의 자유를 마음대로 막았고, 나루가 무조건 복종하기만을 바랐다.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나루는 늘 입을 다물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싫어도 좋다고 말하고, 아파도 혼자 견디며 참고, 누군가에게 만만히 보여 욕을 들어도 반박하지 못했다.
여태껏 이런 멍청한 삶을 살다가 이제 좀 풀어져서 마음대로 날뛰고 다니던 참이었는데, 규연은 그런 나루를 억압하기보다 더 자유로워져도 된다며 풀어주었다.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고여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루가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자, 놀란 규연이 고장 난 로봇처럼 뚝딱거렸다.
“갑자기 왜 울고 난리야, 내가 너한테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그, 울지 말아 봐.”
“우는 거 아니에요. 그냥 눈을 너무 부릅뜨고 있어서, 눈물이 나온 건데.”
“아, 괜히 놀랐네. 얼굴은 왜 그렇게 생겨서, 보는 사람이 다 짠하게…….”
언제 봐도 나루의 우는 얼굴은 처연하고, 예뻤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다 절절하게 만드는, 그런 얼굴이었다. 무심하게 냅킨을 건네준 규연이 관심 없는 척하며 나루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다행히 눈물은 금방 멈췄다. 냅킨으로 눈가를 닦아내던 나루가 다시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자, 규연의 표정이 그제야 좀 풀어졌다.
어느새 둘 사이의 공기가 어색해졌다. 규연은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고, 놓았던 포크를 다시 손에 들었다. 디저트나 마저 먹어 민망함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포크가 얼마 남지 않은 롤케이크에 닿았을 때, 한눈을 팔고 있던 나루가 규연의 손을 매정하게 쳐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얘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나루의 눈치를 살피던 규연이 대체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루는 야무진 태도로 접시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손해 보고 살면 안 돼. 이거 내가 먹을 거야.”
아, 미친. 존나게 귀엽다.
단단한 포도알 같은 표정으로 규연을 쳐다보던 나루가 남은 롤케이크를 사수했다. 하여튼 배우는 건 누구보다 빨랐다.
나루가 롤케이크를 마저 먹는 동안, 규연은 이를 악문 채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여태 애써 외면하고 있던 본심이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송나루는, 귀여웠다. 카페 밖에 앉아 있는 저 토깽이 새끼들보다 더.
더 귀여웠다. X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