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려, 유규연.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나루를 쳐다보던 규연이 제 위에 올라탄 몸을 확 밀어내 버렸다. 덕분에 나루는 힘없이 떨어져 나가 바닥에 엎어졌다.
“꼬리는 무슨, 이상한 소리 하고 있어.”
“진짜야, 꼬리 치지,”
“또 그 소리 했다가는, 밖에 안 데리고 나갈 줄 알아.”
규연의 경고에 나루가 입을 꼭 다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밖에 데리고 나가지 않겠다는 말은 좀 무서웠다. 또 혼자 집에 남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안 데리고 나간다는 얘기는 왜 한 걸까. 가만히 앉아 볼을 긁적거리던 나루가 규연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어디 가요?”
“어.”
“어디?”
“너 혼내러.”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옷걸이에 걸던 규연이 별 의미 없는 대답을 뱉었다. 나루는 이 정도 거짓말을 쉽게 구분해낼 수 있었다. 뚱한 눈으로 규연을 쳐다보던 나루가 바닥에 있던 셔츠 하나를 발로 슬쩍 밀었다. 나름 화풀이를 하는 거였다.
매의 시선으로 나루의 행동을 캐치한 규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저런 식으로 소심하게 성질을 부리는데 무섭지도 않은 게 하찮았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루는 규연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제대로 된 답을 줄 때까지 기다렸다. 본인이 어지른 옷들을 치울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네가 어지른 거 안 치우냐?”
“이거 치우면 어디 가요?”
“다른 카페.”
“규연이네 카페?”
“아니, 내 가게 말고.”
오늘 규연의 오후 일정은 조금 여유로우면서도 바빴다.
그는 시장 조사 겸 다른 카페에 들러 특색 있는 메뉴들을 먹어보고, 그것보다 더 새롭고 독특한 디저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평소에는 혼자 조용히 가거나 직원과 다녀오지만, 오늘은 나루를 데려가 볼 생각이었다.
‘다른 카페’라는 말에 신난 나루는 어질러진 드레스룸을 잽싸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자신이 정리를 제대로 마치지 않으면 규연이 떼어놓고 갈까 봐 눈치 있게 굴었다. 치우면서도 규연을 흘긋흘긋 쳐다보며 자신이 제대로 치우고 있다는 걸 대놓고 어필하기까지 했다.
단 20분 만에 정리를 끝낸 나루는 힘겨운 척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물론 치우는 건 규연이 거의 다 했다.
“하, 기 빨려. 또 어지르기만 해.”
“해?”
“…죽을래?”
“아니요. 카페 가자, 규연아.”
해맑게 대꾸하던 나루가 소파에 늘어진 규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다른 카페에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규연의 카페에도 맛있는 게 많았지만, 디저트에 제대로 맛들린 나루는 더 다양한 빵들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들뜬 상태였다.
기진맥진해진 규연은 이끌림에 못 이겨 재킷을 챙겨 입었다. 어느새 뽀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나루는 박자까지 타 가며 걷고 있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고개까지 좌우로 까딱이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집에 들어갔다가 일만 하고 나온 규연은 신난 나루를 옆에 태우고 퀭한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 들러 볼 곳은, 숨은 맛집으로 유명해진 한 디저트 카페였다. 롤케이크를 메인으로 내세워 팔고 있는데, 인터넷으로 보니 종류도 다양한 게 꽤 괜찮아 보였다.
서울 외곽 쪽으로 들어와 복잡한 골목길 사이를 달려 온 규연은 작은 매장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골목에는 작은 카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담하고 귀엽게 꾸며져 있어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을 것 같았다.
차를 세우자마자 조수석에서 튀어 나간 나루는 카페 앞을 서성거렸다. 분홍색 토끼와 흰색 토끼가 매장 앞에 나란히 장식된 게 특히나 귀여웠다. 토끼 앞에 쪼그려 앉은 나루는 인형을 손가락 끝으로 쿡쿡, 찔러 보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이거 귀엽다…….”
저깟 토끼가 뭐 귀엽다고, 지는 강아지 같으면서. 가 아니라……. 나 방금 무슨 생각 했냐?
나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요새 자꾸 쓸데없는 헛생각이 들어서 머릿속이 금세 산만해지곤 했다. 혼자 있으면 괜찮은데, 꼭 나루랑 같이 있을 때마다 이러는 게 이상했다.
“그거 만지지 말고 들어와.”
“같이 가!”
일부러 쌀쌀맞게 말한 규연이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나루는 아무런 타격 없이 규연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이런 걸로 상처받긴 무슨, 오히려 새로운 카페에 정신이 팔려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작아 보이던 카페는 생각보다 크기가 컸다. 2층까지 잘 활용해서 그런지 손님들도 많이 들어올 수 있고, 진열대와 주방도 잘 구분해 놓아서 깔끔하니 보기 좋았다. 인테리어도 적당히 아기자기하니 괜찮고.
합격.
속으로 점수를 매겨가며 내부를 둘러보던 규연이 카운터 앞에 섰다. 이곳은 클래식한 롤케이크와 얼그레이 크림이 들어간 롤케이크가 유명한 가게였다.
우선 유명한 것부터 주문해 봐야지.
“나 저거…….”
“뭐?”
“저거, 먹고 싶은데.”
규연이 주문하려던 때에 나루가 진열대 한쪽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얇게 썰린 화이트초콜릿이 올라간 롤케이크가 보였다. 규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여러 메뉴를 먹어보는 게 나았다.
“얼그레이 하나, 클래식 하나, 다크 화이트 하나 주세요. 음료는 아메리카노랑, 뭐 마실래.”
“응? 나는…….”
음료를 주문하던 규연이 나루에게 질문을 던졌다. 뭘 마실 거냐는 질문이었다. 나루는 당황한 채로 메뉴판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에스프레소, 바닐라라떼, 카페라떼, 흑당 어쩌고……. 저게 다 뭐지?
늘 서연이 마음대로 만들어주는 음료를 마시다가 자발적으로 고르려니 힘이 들었다. 나루가 끙끙거리며 고민하자,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메뉴를 추천해 주었다.
“고민되시면 제가 추천해 드려도 될까요?”
“앗, 네에.”
“달콤한 걸 좋아하실 것 같은데, 딸기 연유 라떼는 어떠세요?”
“딸기 연유 라떼가 뭐예요?”
이게 무슨 상황일까. 갑자기 나루와 직원 둘만의 세계가 펼쳐진 느낌이었다. 어느새 규연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다.
친절한 직원의 태도에 햇살처럼 웃던 나루는 이런저런 질문을 건네며 살갑게 굴고 있었다. 어딜 가든 규연의 옆에 착 붙어 있더니, 이제는 병풍 취급까지 한다.
“딸기랑 연유를 넣고 우유랑 같이…….”
“우와아, 맛있겠다. 이렇게 맛있는 음료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
인상을 구기고 나루의 행동을 지켜보던 규연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무리 눈치를 줘도 나루는 알아먹지를 못했다. 누구한테는 꼬리 치지 말라더니, 본인은 저렇게 아무한테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게 얄미워 보였다.
“그러면 저 이걸로 할래요. 규연아, 나는 이거 먹을래!”
“아, 그러든가.”
시큰둥하게 주문을 마친 규연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나루는 눈치 없이 발을 까딱이며 기분 좋은 티를 내고 있었다. 규연의 썩은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직원은 친히 앉은 자리까지 디저트를 가져다줬다. 쟁반 위에는 규연이 주문한 메뉴들과 휘낭시에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저런 메뉴는 시킨 적이 없는데, 주문이 잘못 들어간 걸까. 의아해하던 중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서비스예요. 맛있게 드세요!”
“와아, 감사합니다.”
둘이 북 치고 장구 치고 아주 쿵짝이 잘 맞았다.
박수까지 쳐 가며 웃던 나루가 직원이 떠나자마자 휘낭시에를 집어 들었다. 규연은 그런 나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심보인지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아무튼 기분이 나빴다.
“야, 송나루.”
“왜요?”
“너나 꼬리치고 다니지 마.”
“나는 꼬리 안 쳤는데.”
“그냥 좀 알겠다고 해라. 어떻게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냐?”
휘낭시에를 입에 넣고 씹던 나루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규연을 응시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저 눈빛은 분명히 ‘어쩌라고’를 말할 때의 눈빛이었다.
묘하게 날 선 말투에 슬그머니 태도를 수그린 나루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눈치 보는 척을 하는 거였다. 특유의 불쌍한 눈으로 규연을 힐끔거리자 사납던 시선이 조금이나마 유순해졌다.
분위기가 오묘해질 때 즈음, 타이밍 좋게 주문했던 롤케이크가 나왔다. 규연은 얼굴을 환하게 풀고 턱짓했다.
“됐다, 그냥 그거나 먹어라.”
“이거 맛있어요.”
일부러 존댓말을 사용하던 나루가 규연의 입 앞에 포크를 가져다 댔다. 평소였다면 됐다며 내쳤을 텐데, 규연이 웬일로 별말 없이 롤케이크를 받아먹었다.
얼그레이 향이 짙게 느껴지는 크림은 소문대로 맛있었다. 폭신한 빵의 식감도 딱 괜찮고, 커피와도 잘 어울리는 게 왜 유명한 메뉴인지 알 것 같았다.
롤케이크를 번갈아 가며 찍어 먹던 나루가 규연의 표정을 살피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손을 올려 입을 가리기까지 했다.
“규연이네 카페가 더 맛있어.”
“…….”
작게 속삭인 나루가 자리에 돌아가 딸기 연유 라떼를 쭉 들이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규연은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나루가 요망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땐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같이 살면서 많이 변한 것 같기도 했다. 웃긴 건 나루가 이러는 게 마냥 싫지 않다는 거였다.
내가 미쳤지. 너 지금 송나루한테 휘둘리는 거야, 유규연. 이 멍청한 새끼야. 정신 차려.
“뭐, 내가 만든 게 훨씬 맛있긴 해.”
“응!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뭘 또 그렇게까지…….”
정신 차리긴 개뿔, 규연은 홀라당 넘어가 제 자랑을 하고 있었다. 빈말이라기엔 나루의 표정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 저도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얼굴이 홧홧해지기 전에 화제를 돌린 규연이 나루를 따라 포크를 집어 들고 먹는 데 집중했다. 놀러 온 게 아니니 일은 제대로 해야 했다. 핸드폰 메모장에 카페 이름과 메뉴, 그리고 맛에 대한 감상평을 길게 적어 놓은 그가 만족스럽게 홀드 버튼을 눌렀다.
그사이 나루는 입에 초코 크림을 묻혀가며 포크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단 음식이 질리지도 않는 건지 연달아서 잘 먹는 게 신기했다.
규연은 냅킨을 꺼내 들고 나루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닦아줄 테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라는 뜻이었다. 나루는 익숙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사실 이렇게 닦아줄 걸 예상하고 일부러 묻힌 건데, 규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네가 애냐, 더럽게 자꾸 묻히고 먹어.”
“…….”
“뭘 웃어.”
대답 대신 환하게 웃던 나루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원래도 규연이 좋았지만, 오늘은 왠지 더 좋았다. 잠시 도민에게 질투가 나긴 했지만, 어쨌든 규연은 자신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디저트를 먹던 중, 나루가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겼다.
“윤수 씨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선한 인상에 지영 씨처럼 착한…….”
옆 테이블에는 소개팅 중인 남녀가 앉아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경청하던 나루는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이상형이 뭐지?
남자는 여자의 칭찬을 연신 늘어놓으며 제 이상형 이야기를 했다. 선한 인상에, 착하고, 책을 좋아하고. 그냥 저 사람을 칭찬하는 건가. 계속해서 대화를 엿듣던 나루가 포크를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규연을 빤히 쳐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