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30)


부드러운 셔츠 위로 말랑한 볼이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다. 차 키를 꺼내던 규연은 영문 모를 행동에 빳빳이 굳은 채였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가게에서 나온 뒤로 끈덕지게 붙어있던 나루가 제 체취를 규연에게 남기겠다는 각오로 몸을 비비적거렸다. 처음에는 규연의 가슴팍에 폭 안겨들더니 머리를 문댔고, 다음으로는 규연의 팔을 꼭 껴안고 놔 주지 않았다.

“잠깐 좀 놔 봐, 차에 타야 할 거 아니야.”

“…….”

얘 또 이러네.

나루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문득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물론 그때와 눈빛이 확연히 다르긴 했지만,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분위기가 쓸데없이 처연해져서 사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규연이 어떤 감정을 느끼든, 나루는 볼을 문지르는 데 집중했다. 마음이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나루는 경쟁자를 만나는 게 처음이었다. 지하실에 갇혀 지냈을 땐 힘들긴 했지만, 전 주인이 나루 한 명에게만 집착해서 경쟁해본 적이 없었다.

주인은 무조건 나 한 명만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이쪽 세계에서는 전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맞지 않아도 되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고, 따듯한 물도 쓸 수 있고, 좋은 사람도 많았다. 나루는 이런 세상이 마냥 좋기만 했는데, 그랬는데…….

자유로운 만큼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다양해서 문제였다. 이전에 만났던 건혁도 그랬고, 아까 본 도민도 자신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규연을 탐냈다.

예전에는 주인 한 명에게 받는 관심이 너무 버거워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이제는 주인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노력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규연을 뺏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단 애정 표현을 하기로 했다. 덤으로 ‘유규연은 내 거다!’라는 뜻을 담아 체취까지 열심히 묻혔다.

킁킁. 킁킁.

“좀 놓으라니까 왜 냄새를 맡고 있어.”

볼을 비비고 냄새를 맡던 나루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규연에게서 제 냄새가 나야 하는데, 향수의 시원한 향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팔 한쪽에 나루를 매달고 있던 규연이 억지로 작은 몸을 떼어 놓았다. 젖은 옷 때문에 덜덜 떨면서도 차에 타지 않으려는 나루가 미련스러웠다. 아까는 옷을 갈아입고 싶다더니, 이제는 옷 따위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일단 타.”

“…….”

“뭘 가만히 보고 있어, 얼른 타라니까.”

조수석 문을 열어 준 규연이 나루의 몸을 억지로 구겨 넣었다. 와중에 고집이 어찌나 세던지, 잡은 팔을 안 놓으려고 해서 애를 좀 먹었다.

출발하기도 전에 진을 뺀 규연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몸을 편히 기댔다. 조용한 차 안에서 규연의 눈치를 보던 나루는 몸을 돌려 앉아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야, 안전벨트 똑바로 매.”

“조금만 더 붙어있고 싶은데…….”

“여태 실컷 들러붙었으면서 무슨 소리를, 야!”

기회를 보던 나루가 규연에게 그대로 돌진했다. 아직 시동을 걸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넓은 어깨를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얼굴을 들이민 나루가 아까와 똑같이 규연의 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규연은 다른 의미로 미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갑자기 들러붙어서 놀랐는데 떨어질 생각을 안 하고, 심지어 둘밖에 없는 공간에서까지 붙어대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떨어져라.”

“아까 그 사람 누구야?”

“누구, 새 직원 말하는 건가.”

“직원? 친해? 왜? 직원이면 저 가게에서 계속 같이 일해? 언제까지 해?”

질문 폭탄이 떨어졌다. 간 보듯 물어보던 나루가 눈을 빛내며 질문을 마구 쏟아냈다. 무미건조한 투로 대답하던 규연은 어안이 벙벙해져 헛웃음을 치는 중이었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황당한 눈으로 나루를 쳐다보던 규연이 의심을 거두었다. 일부러는 무슨, 누구보다 진지하게 물어보고 있는 거였다.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지. 가만 보면 나루는 호기심이 참 많았다.

“새 직원이니까 그만두기 전까지는 계속 같이 일하겠지.”

“왜?”

“내가 뽑았으니까.”

“왜 뽑아?”

“…….”

왜 뽑냐니, 단순한 질문일 뿐인데 왜 감정이 섞여 있지. 저 원망스러운 눈초리는 또 뭐야.

이런 식으로 대답하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았다. 규연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루를 매정하게 밀어냈다. 이번에도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얌전히 떨어져 나가 앉는다.

제자리로 돌아가 앉은 나루는 제 손으로 안전벨트를 맸다. 매번 규연에게 해달라며 버티고 앉아 있더니 의외였다.

찝찝한 기분을 느끼던 규연은 일단 액셀부터 밟았다. 방금까지 질문을 쏟아내던 나루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옆을 힐끔거리던 규연은 심각해진 나루의 얼굴을 살피고 똑같이 눈썹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데.”

“…….”

“너 갑자기 왜 그렇게 풀이 죽었냐고. 말을 해.”

“그냥, 직원이…….”

답답함에 못 이겨 먼저 말을 꺼낸 규연이 대답을 재촉했다. 나루는 손가락만 꼼질거릴 뿐, 시원스러운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네가 뽑은 새 직원이 마음에 안 들어!

속으로는 시원하게 말이 터져 나오는데, 왜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 걸까. 나루는 규연에게 미움받을까 봐 일부러 말을 아끼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도민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몰아붙인다면 규연이 당황스러워할 것이다. 나루는 규연을 곤란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나루의 심란한 마음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규연에게 대놓고 그 직원이 싫다고 말할 수도 없고, 직접 움직이기에는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었다. 마냥 손 놓고 놀자니, 도민이 규연을 낚아채 갈까 봐 두려웠다.

웬일로 집중해서 생각을 이어가던 나루가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쳤다. 산만한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규연이 옆을 힐끔거렸다. 나루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직원 할래요!”

“아 씹, 깜짝이야.”

“직원! 나도 직원 할래요.”

뜬금없는 소리였다. 규연은 자신이 나루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건지 두어 번이나 더 생각해 보아야 했다.

나루는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다부지게 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건 규연이 절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아무 경력도 없는 나루를 무슨 수로 직원 자리에 앉힐까. 다른 건 몰라도 일 문제에서는 칼 같은 규연이었다.

“안 돼.”

“나도 직원 하고 싶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규연의 단호한 대답에 나루가 꼬리를 내렸다. 규연의 말대로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일하는 게 장난도 아니고.

차 안이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나루는 가만히 창문만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고집을 부릴 문제가 아니었기에 그냥 답답한 마음을 끌어안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어색해진 채로 차에서 내렸다. 운전하는 내내 나루를 신경 쓰던 규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루가 워낙 단순하게 행동해서 뭘 해도 알기 쉬웠는데, 이럴 땐 또 속내를 알 수 없어서 갑갑해졌다.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

말없이 드레스룸으로 올라간 나루가 빼곡하게 걸린 옷들을 뒤적거렸다. 방금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는데 규연의 향으로 꽉 채워진 공간에 오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옷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의미 없이 옷걸이만 뒤적이던 나루가 행거 사이로 몸을 숨겼다. 뽀송하게 세탁된 옷들 사이에 쪼그려 앉자마자 작은 세상이 규연의 향으로 뒤덮였다. 옷에 가려져서 앞은 어둡고, 좁은 공간에 규연의 향이 가득 퍼져서 안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규연이 냄새 좋다.

급기야 옷을 더 가져와 제 주변을 둘러싸고 눕기까지 했다. 옷들 사이에 파묻힌 나루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규연의 냄새는 언제 맡아도 기분이 좋았다.

“옷 갈아입는 데 시간이 왜 이리 오래 걸리냐.”

“…….”

“하, 하하, 미친. 그래, 왠지 조용하더라. X발…….”

거실에서 나루를 기다리던 규연은 고요해진 집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끼고 곧장 드레스룸으로 올라왔다. 아까부터 나루의 낯빛이 좋지 않아 보여서 걱정하며 달려왔는데, 이게 웬걸. 드레스룸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행거에 멀쩡히 걸려 있던 옷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고, 사고를 친 장본인은 그 옷들 사이에 파묻혀 코를 킁킁거리는 중이었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사고를 쳐대니, 규연은 잔소리할 기운도 없이 허탈하게 웃기만 했다.

나루는 제가 어질러놓은 옷더미가 매우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둥지 속에 누워있는 아기 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게 어이가 없었다.

“내가 옷 갈아입으라고 했지, 언제 어지르라고 했어.”

“여기 있으면 규연이 냄새가 많이 나서.”

“하, 참…….”

발치에 있는 옷가지를 주워 들던 규연이 다 포기한 말투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루는 뻔뻔한 얼굴로 대답을 내놓았다. 거짓 없는 대답이었다. 덕분에 규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너 엿 먹이고 싶어서’도 아니고, ‘네 냄새가 많이 나서’라니. 화도 내지 못하게 사람 마음을 뒤집어엎어 놓는다.

헛숨을 토해내던 규연이 천천히 걸어와 나루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가까운 옷부터 치워내려던 그는 아까보다 나아진 나루의 표정을 발견하고 손을 거두었다.

“그래, 마음대로 있어라.”

“갈 거야?”

“그럼 뭐, 여기서 너랑 같이 누워있기라도 할까?”

“그러면 좋겠는데…….”

얼씨구. 뭐? 그러면 좋겠는데?

그냥 비아냥거린 건데, 나루가 미끼를 덥석 물고 놓아 주지 않았다. 어느새 팔이 붙잡힌 규연은 어정쩡한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이거 놔.”

매서운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나루가 규연의 팔을 확 잡아끌었다. 무릎을 굽히고 있던 규연은 그만 중심을 잃고 옷더미 사이로 엎어지고야 말았다.

나루는 규연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풀리지 않도록 손깍지까지 야무지게 꼈다. 예상에 없던 스킨십에 당황한 건 규연뿐이었다.

나루는 어떤 말을 해야 규연이 흔들리지 않고 평생 제 옆에 있어 줄지 생각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롭던 와중, 전 주인이 제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함부로 꼬리 치고 다니지 마.’

꼬리 치고 다니지 말라는 말. 처음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이제는 이게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할 때는 움직이지 못하게 몸을 포박하고, 최대한 무서운 얼굴로…….

“야, 갑자기 왜 이래.”

순식간에 규연의 몸 위로 올라탄 나루가 두 무릎으로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규연에게는 그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사람을 막 껴안더니, 이제는 몸 위에 올라타기까지 하고. 오해를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규연의 말을 죄다 무시하고 최대한 무서운 표정을 지은 나루가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여린 목소리로 또박또박 발음하는 말에선 왠지 모를 광기가 느껴졌다.

“다른 사람한테 꼬리 치지 마.”

“…….”

“함부로 꼬리 치고 다니지 마.”

뭐야, 분명 미친 행동인데 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지.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나루를 멍하니 바라보던 규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쯤 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상대방 혼을 쏙 빼놓고, 정작 본인은 진지한 게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웃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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