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30)


결국, 이번에도 규연이 져 줬다. 나루는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집에 있어도 공기청정기 덕분에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지만, 바깥의 공기는 또 다른 상쾌함이 있어서 좋았다.

꽃밭에 온 강아지마냥 뛰어다니던 나루가 규연의 손에 단단히 붙잡혔다. 집에서는 뛰어다녀도 괜찮았지만, 차가 많이 다니는 밖에서는 어디 치이기라도 할까 봐 불안해서 잡아 놓아야 했다.

“얌전히 있어라, 좀.”

“규연이 카페 다 왔다. 카페 데스틴이.”

“데스티니거든.”

“아, 그렇게 읽는 거구나.”

데스티니, 데스티니, 데스티니.

규연이 알려 준 가게 이름을 여러 번 읊조리던 나루가 당당히 문을 열었다. 오늘도 카페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게가 넓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아도 한적해 보이는 게 꽤 괜찮았다.

손님에게 라떼를 내어주던 서연은 나루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사장은 규연인데 인사는 나루에게 더 열심히 했다. 꼰대 기질을 보이던 규연은 정작 이런 부분에서 너그러웠다. 인사를 하든 말든, 어차피 본인도 싹수 노랗게 굴어서 남이 그렇게 굴어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방금 막 나온 타르트가 있어요. 이거 제가 사 드릴게요!”

타이밍 좋게 도착한 모양이다. 서연이 갓 만들어진 블루베리 타르트를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루는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막 나온 타르트들을 구경했다. 보라색 알맹이들이 빼곡하게 올라간 게 입맛을 돋게 해 주었다.

규연은 대놓고 인상을 구기며 나루를 잡아끌었다. 저번부터 나루에게 친한 척을 하는 서연이 신경 쓰여서 경계하는 거였다. 대체 왜 경계하는 건지 본인도 몰랐다. 멍청하게도 말이다.

“그걸 왜 사 줘. 내가 알아서 줄 테니까 가서 진열이나 해.”

“사 줄 수도 있지. 너무해요, 사장님. 이 타르트 방금 나온 거니까 꼭 드려야 해요.”

“너 뭐, 얘 좋아하기라도 해?”

“어머…….”

턱 끝으로 나루를 가리키며 말하던 규연이 헛웃음을 쳤다. 아니라고 손을 휘저어도 모자랄 판에,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서연이 묘하게 거슬렸다.

여기서 나루까지 쿵짝을 맞췄다면 열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루는 서연에게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서연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은 수많은 디저트에 정신이 제대로 팔려있는 상태였다.

“저거 뭐예요?”

“앙버터 프레첼.”

“맛있겠다.”

나루가 제발 먹게 해달라는 눈으로 규연을 응시했다. 그 눈빛이 너무 집요해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라며 허락했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열대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규연은 면접자가 오기 전까지 귀찮은 일을 끝내 놓기로 했다. 안쪽에서 온종일 빵을 구워내는 파티시에들에게 까눌레를 내밀자 다들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규연이 사장이라고 하나, 뛰어난 파티시에에게 실력을 인정받는 건 뿌듯한 일이었다.

“괜찮네요. 확실히 맛에 깊은 풍미가 느껴지고, 식감도 아주 좋아요.”

“그럼 이건 다음 달에 내는 걸로 하고, 레시피는 메신저에 보내 놨으니까 참고해 주세요.”

직원들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선 규연이 곧바로 이마를 짚었다. 쟁반에 빵을 한가득 담아 온 나루가 구석 테이블에 앉아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발끝으로 리듬까지 타고 있는 게 귀여우면서도 웃겼다.

서연이 그새 음료를 만들어 준 걸까. 쟁반 옆에는 타피오카 펄이 넘치도록 들어간 버블티가 있었다. 재료를 아주 아낌없이 넣어 준 모양이었다.

나루의 옆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규연이 업무용 다이어리를 펼치며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마침 앙버터 프레첼을 베어 물던 나루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작은 스푼으로 팥앙금을 덜어 규연에게 내밀었다.

“뭐냐, 이거.”

“먹어.”

“너 지금 팥 먹기 싫어서 나한테 떠넘기는 거지, 읍!”

규연의 입에 막무가내로 팥앙금을 밀어 넣은 나루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버터만 남은 프레첼을 한 입 베어 무니 이제야 나루 취향이 맛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욕을 내뱉을 것처럼 표정을 구기던 규연이 다이어리 끄트머리에 글자를 적었다.

버터 프레첼 메뉴 추가.

휘갈기듯 쓴 글자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나루가 보았다면 뛸 듯이 기뻐했을 만한 메모였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호리호리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손님인가 싶어 인사를 건네던 서연이 무언가 말을 듣더니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면접 보러 온 사람인가.”

“면접?”

“나 잠깐 얘기 좀 해야 하니까 옆에서 조용히 먹고 있어.”

“누군데요?”

혹시라도 나루가 중간에 끼어들까 봐 미리 경고한 규연이 손을 들어 보였다. 서연과 대화를 나누다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규연을 발견하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인상도 순하니 귀여운데 인사성까지 밝아서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반면, 나루는 경계 모드에 돌입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사람이 규연에게 호의적으로 굴어서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 면접 보기로 했던 정도민입니다.”

“편하게 앉아요.”

1단계 통과. 도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나루보다 더 깍듯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규연도 남자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며 친절하게 굴었다. 누군가에게 존댓말을 하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나루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경력은 이력서로 봤으니까 말 안 해 줘도 돼요.”

“아, 그러셨구나. 엄청 꼼꼼하시네요. 저 정말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진심이에요.”

“꼭 여기여야 하는 이유가 뭐죠.”

도민은 붙임성도 좋고, 넉살도 있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제 의사를 또렷하게 밝히는 게 인상 깊었다. 어디에 가도 좋게 봐줄 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규연은 일부러 제 성격을 드러내며 질문을 던졌다.

카페 데스티니의 직원들은 모두 한 번씩 거친 관문이었다. 디저트 카페를 처음 열고 직원을 구했을 때, 규연은 2주에 두 명이나 퇴사하는 처참한 일을 겪어야만 했다. 모두 규연의 직설적인 말에 상처받아 나간 거였다.

그 이후로는 면접 때부터 제 성격이 더럽다는 걸 드러냈다.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알아서 이곳을 선택하지 않을 거고, 괜찮다고 느낀다면 흔쾌히 출근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 제가 여기 디저트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저번에 여쭤보니 사장님께서 신메뉴 개발에 진심이라고 대답해 주셨는데, 그때 깨달았어요. 꼭 이런 사장님 밑에서 일해 보고 싶다고요.”

도민은 당돌하기까지 했다. 보통 이런 질문에는 당황하거나 횡설수설하던데, 그는 미리 준비해 온 것처럼 막힘 없이 대답을 내뱉었다.

“좋네요. 성격은 나랑 잘 맞을 것 같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던 규연이 다이어리를 뒤적거렸다. 옆에서 빵을 주워 먹으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나루는 인상을 찌푸렸다.

좋네요? 성격도 잘 맞을 것 같고?

규연이 누군가에게 ‘좋다’고 말하는 건 처음 들어 봤다. 심지어 나루도 제대로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저 다람쥐같이 생긴 남자가 듣다니. 질투가 났다.

크르르. 으르르.

규연에게만 들릴 정도로 그르렁거리던 나루가 손에 힘을 주고 부들부들 떨었다. 덕분에 쥐고 있던 소금빵이 쪼그라들어 모양이 이상하게 변했다.

이상한 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려 본 규연이 헛숨을 들이켰다. 나루가 다 쪼그라든 소금빵을 이로 물어뜯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나 매섭게 노려보던지 그 순하던 인상이 조금은 험악하게 변해 있었다.

‘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조용히 있으라고. 조용히.’

입 모양으로 경고를 주던 규연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하면 순순히 눈을 내리깔아야 하는데, 나루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규연은 도민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나루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언제 튀어나와 훼방을 놓을지 모르니 긴장하고 있는 거였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일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괜찮아요?”

“네, 너무 좋습니다. 사장님이랑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저는 당장 내일이라도 괜찮아요.”

으르르. 크르르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일하라니. 나루가 조금 더 소리를 키워서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도민에게도 이 소리가 들린 듯했다.

“크흠!”

일부러 헛기침을 뱉은 규연이 나루에게 눈치를 줬다. 거의 다 끝나가니 조금만 더 참으라고 신호를 주는 거였다.

도민은 웃는 낯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느 순간부터 규연이 제게 집중하지 않는 거 같더라니, 시선 끝에 나루가 있었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둘은 오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루는 도민을 은근하게 노려보고, 도민은 웃는 척하며 그 눈을 절대 피하지 않았다.

고단수다! 저 사람, 고단수야. 얄미워. 나랑 분위기도 비슷하고, 눈이 조금 고양이 같달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고양이.

“앗……!”

“내가 너 사고 칠 줄 알았어, 하 진짜.”

“아, 이게,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도민과 필사적으로 눈싸움을 하던 나루가 실수로 버블티를 엎질렀다. 방금 건 생각지도 못한 사고였다. 그래, 분명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

오히려 잘 됐다!

규연의 관심이 단번에 나루에게 향했다. 옷이 젖지 않도록 몸을 일으켜 세워 준 규연이 서연을 불렀다. 한 손으로는 옷을 털어 주고 있었다.

멍하니 그 손길을 받던 나루는 도민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마치 내가 이겼다는 듯이.

“어, 사장님 동생 분이세요? 어떡해. 제가 티슈 가지고 올게요!”

“동생……?”

놀란 척하며 다가온 도민이 상큼한 투로 말하고는 카운터 쪽으로 달려갔다. 규연과 나루는 동생이라는 호칭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규연은 도민이 단순히 눈썰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루는 그 속뜻을 알아채고 눈썹을 찌푸렸다.

어느새 티슈를 가지고 온 도민이 나루의 옷을 친절히 닦아 주었다. 서연은 잽싸게 대걸레를 빨아 와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죄, 죄송해요.”

“아니에요! 금방 치우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버블티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요, 아니요. 괜찮아요.”

죄송하다는 말에 괜찮다며 웃어 보이던 서연이 능숙한 솜씨로 바닥을 치워냈다. 그사이 도민은 나루의 손을 티슈로 문질렀다.

“여기도 튀었어요. 동생 분이 조금 덜렁대는 성격인가 봐요. 너무 귀엽다.”

“티슈 줘요. 내가 닦아줘도 되니까.”

“제가 닦아 드려도 되는데, 사장님께서 동생 분을 잘 챙겨 주시네요.”

“동생 아니니까 자꾸 헛다리 짚지 말지.”

특유의 싹수없는 말투로 대꾸한 규연이 도민의 손에서 티슈를 뺏어 들었다. 쌀쌀맞은 태도에도 도민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야말로 나루의 강적이었다.

규연은 뺏어 든 티슈로 나루의 손을 깔끔히 닦아냈다. 규연이 이렇게 챙겨 주는 건 좋았지만, 도민이 자꾸 거슬려서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좀 마음에 안 드는데? 시골에서 내 밥 뺏어 먹던 고양이 같단 말이지. 엄청 나쁘다기보다는 얄밉고, 좀, 거슬리는 골목길 대장 고양이.

나루가 이를 바득 갈자, 젖은 옷을 대신 걱정해 주던 규연이 의아한 눈으로 얼굴을 살폈다.

“어디 더 젖은 곳 있어?”

“옷 갈아입고 싶어요…….”

쓸데없이 아련한 얼굴로 규연의 동정심을 자극한 나루가 집에 가자며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루의 사소한 계략에 넘어간 규연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우선 서연에게는 도민의 출근 사실을 알리고, 월요일부터 잘 가르치라고 일러두었다. 신입 교육은 늘 서연의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해요. 사소한 건 문자로 하고.”

“지금 들어가시는 건가요?”

“좀 급해서.”

면접이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되었다. 도민은 그렇게 꿈꾸던 디저트 카페에 취직하게 됐지만, 찝찝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규연은 나루를 최우선으로 챙겼다. 날이 조금씩 추워지고 있는데,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골치 아파지는 건 규연 본인이었다.

쟤가 아프면 내가 옆에서 죽도 끓여 줘야 하고, 약도 먹여야 하고, 아무튼 골치 아프니까 챙기는 거다. 이건 걱정이 아니다.

자기 최면을 걸던 규연이 나루를 데리고 나왔다. 규연의 옆에 꼭 붙어 나오던 나루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멍하니 서 있는 도민을 쳐다보았다.

역시, 뭔가 수상해. 냄새가 나.

앙칼지면서도 동글동글한 도민의 얼굴이 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나루는 대놓고 얼굴을 찡그려 줬다.

나 너 싫어. 규연이 옆에 붙지 마. 유규연은 내 주인이야.

나루의 텔레파시가 전해진 걸까. 가만히 규연의 뒤태를 바라보던 도민이 한쪽 눈썹을 거만하게 치켜올렸다. 서로 경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꼭 원수 사이인 강아지와 고양이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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