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에는 여느 때와 같이 적당히 시끄러운 날이 반복됐다. 규연은 혹시라도 나루가 또 돌발행동을 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현관문 근처에만 가도 방에서 튀어나와 감시했고, 테라스 쪽 통창은 건드리지도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규연의 철통 보안 덕분에 나루의 삶은 한결 더 편안해졌다. 며칠 전까지는 죽어라 무시하더니, 그 소동이 있고 나서는 자신을 처음처럼 잘 챙겨 줘서 안심한 모양이었다.
그래, 다 좋았는데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난 네가 여태 규연이 씹고 다니던 졸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나루는 그때 건혁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규연이를 씹고 다닌 적도 없고, 졸부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다. 아마도 누군가와 착각을 한 거 같은데, 묘하게 기분이 찝찝했다.
“야, 송나루. 너 왜 조용하냐, 설마 또 사고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사고 안 쳤어요!”
“억울한 눈으로 쳐다봐도 다 알아. 하, 씹,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한참 건혁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티슈 뽑기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부엌에서 나온 규연이 이럴 줄 알았다며 이마를 짚었다.
나루가 조용하면 늘 무언가 사고를 치고 있는 거였다. 사고뭉치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오늘은 거실 바닥에 티슈들이 구름처럼 뭉쳐진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각 티슈는 나루의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쏙쏙 뽑는 손맛이 좋아서 한 번 중독되면 빠져나올 수 없었다. 최근에도 티슈를 죄다 뽑아 놔서 규연이 구석에 숨겨 놓았는데, 언제 발견한 건지 그새 가져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티슈 뽑지 말라고. 네가 개야?”
규연이 널브러진 티슈를 치우며 야단을 쳤다. 나루는 치우기 쉽도록 자리를 비켜 주고 모르는 척 눈알만 굴렸다. 사고는 본인이 쳤으면서 아무것도 안 했다는 눈빛이 기가 막히게 순진했다.
규연은 나루가 사고를 칠 때마다 툭하면 ‘네가 개냐’라고 물었다. 나루는 자꾸 당연한 걸 물으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그란 눈을 똑바로 뜨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규연이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뭘 끄덕거려.”
“개 맞는데…….”
“아, 그러세요? 무슨 개인데요?”
“똥강아지…….”
비아냥거리는 투로 묻던 규연이 되돌아온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기가 자기 입으로 똥강아지라니. 나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눈으로 대답해서 태클을 걸지도 못하겠다.
나루는 진지했다. 아주 아기 때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똥강아지’라고 불렀었다. 아기 때의 나루는 왜 흰색 털을 가진 자신이 똥강아지 소리를 듣는지 몰랐다. 몸에 하도 흙을 묻히고 돌아와서 그런 말을 들었던 걸까. 아직도 의문이었다.
잔잔한 광기에 몸서리친 규연이 말없이 거실을 치우고 부엌으로 향했다. 와중에 나루의 뒷덜미를 질질 끌고 식탁 앞에 앉혀 놓았다. 가만히 두었다가 또 사고를 칠까 봐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거였다.
오늘 규연은 아침부터 일이 바빴다. 다음 달에 출시할 까눌레를 만들어 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은 귀찮아도 디저트 만드는 일 하나는 즐거웠다. YK전자 막내아들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맏형이나 둘째 형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
“맛있는 냄새 나.”
“뜨거우니까 비켜라.”
“이거 먹는 거 맞지?”
“그럼 뭐, 쓰레기겠냐.”
앉아 있던 나루가 오븐 근처를 얼씬거리자 규연이 몸을 단호히 밀어냈다. 까눌레를 오븐에서 빼내야 하는데 그 앞에서 나루가 얼쩡거리고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얌전히 물러선 나루는 오븐이 열리자마자 가까이 다가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규연이 신메뉴 개발을 위해 디저트를 만들 때면 늘 이렇게 들러붙어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야, 비켜, 비켜.”
“뭐예요? 그거 뭐예요? 까맣다.”
“너는 진짜…….”
못마땅하지만 밉지 않다는 눈으로 나루를 쳐다보던 규연이 틀에서 잘 구워진 까눌레를 꺼냈다. 짙은 초콜릿 색의 까눌레는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루는 접시에 차곡차곡 쌓이는 까눌레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새롭고 낯설지만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게 당장이라도 입 안에 욱여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하나만 주세요.”
“안 돼.”
“줘.”
“…….”
또 나왔다.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반말부터 쓰고 보는 더러운 습관.
나루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밀어낸 규연이 싫은 척하며 까눌레를 건네줬다. 맛 평가에는 소질이 없는 나루지만, 맛있게 먹는 걸 보면 뿌듯해져서 일부러 더 먹일 때가 있었다.
접시에 덩그러니 놓인 까눌레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나루가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다. 입은 작으면서 뭘 먹을 때마다 입 안 가득 음식을 집어넣는 게 햄스터 같기도 했다.
“어때.”
“맛있어!”
“당연히 맛있겠지. 내가 프랑스에서 직접 배워 온,”
“하나 더 줘!”
“…그래, 많이 먹어라.”
자기 자랑을 늘어놓던 규연이 말하기를 포기하고 까눌레 하나를 더 얹어 줬다. 나루는 입 안 가득 퍼지는 풍미를 느끼며 행복에 취해 있었다. 잔뜩 휘어진 눈과 올라간 입꼬리가 행복한 기분을 고스란히 나타내 주었다.
나루의 앞에 앉아 턱을 괸 규연이 헛웃음을 쳤다. 먹을 때마다 보여주는 저 멍청한 표정이 왜 갑자기 귀여워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이 어떻게 된 건가. 규연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퍼졌다.
가만히 입을 오물거리던 나루가 그런 규연의 표정을 예리하게 캐치했다. 그러고 보니, 백화점에서 돌아온 후로 규연의 태도가 지나치게 친절해졌다. 뭐랄까,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하지만 분위기가 조금 더 다정해졌달까. 이상하다.
“아, 하세요.”
“……뭐?”
“이거 맛있어, 같이 먹어요.”
“너, 너나 많이 먹어.”
이거 봐, 분명 말투도 다정하고 다 괜찮은데…….
왜 묘하게 나를 피하는 것 같지?
나루가 반으로 자른 까눌레를 입가에 가져다 대자, 규연이 됐다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진짜 싫었다면 이딴 짓 좀 하지 말라며 신경질을 냈을 거다. 하지만 성질을 내는 대신 고개를 돌리기만 한다.
“먹어 주세요.”
“…야, 너.”
“네?”
“누가 들으면 오해, 아니다.”
단순히 까눌레를 먹어 달라고 한 것뿐인데, 규연이 이상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럴수록 나루의 의심은 깊어져만 갔다.
어디가 아픈 걸까? 감기는 아닐 거고. 설마……?
규연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백화점에서 돌아온 후로 나루의 얼굴이 예뻐 보여서 진지하게 제 취향을 의심해 보기도 했다.
지금도 그랬다. 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쳐다볼 때면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첫사랑을 시작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참 이상했다.
“얼굴이 빨개요.”
“아니야.”
“빨간데.”
“아니라고.”
단답형으로 말한 규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대로 있다가 또 나루에게 제대로 말릴 것 같아서 뒷정리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규연이 부엌을 치우는 동안 나루는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구경했다. 아픈 줄 알고 잠시나마 걱정했는데, 저렇게 멀쩡한 걸 보니 마음이 구름처럼 퐁신해졌다.
알았다. 규연이가 나한테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거야.
아쉽지 않을 정도로 연애를 해 본 건 분명 규연인데, 이럴 때를 보면 나루가 더 고수인 듯했다. 규연이 제게 스며들고 있다는 걸 알아챈 나루는 이때다! 싶어 눈을 빛냈다.
식탁 위에는 다 먹은 접시와 포크, 그리고 나이프가 있었다. 잠시 기회를 보던 나루는 일부러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순진한 강아지의 얼굴을 한 새끼 여우처럼.
하나, 둘, 셋.
챙그랑!
“아야, 내 손!”
“야, 괜찮아? 어디 다쳤어.”
“…….”
소음이 들리자마자 규연이 곧장 달려왔다. 방금 떨어뜨린 나이프는 규연이 이탈리아에서 공수해 온 거였다. 무려 하나에 50만 원씩이나 하는 걸 떨어뜨렸는데, 나이프가 아닌 자신을 먼저 걱정하는 모습에 나루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직 나루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한 규연이 뽀얀 손을 뒤집어가며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손을 다친 것처럼 소리를 지르길래 놀랐는데, 나루의 손에는 생채기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아, 베인 줄 알고…….”
“조심 안 하냐?”
“저거 비싼 거라고 했는데 내가 떨어뜨려서…….”
“아, 저 정도는 상관없어.”
나루 대신 나이프를 주워 든 규연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 정도는 상관없다니. 예전에는 바디워시를 조금만 많이 써도 난리를 쳤으면서. 새삼 짧은 시간 만에 규연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호오, 규연이가 진짜 변하고 있잖아?
규연의 마음을 열겠다고 다짐했던 나루는 점점 희망을 보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는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상태라면 몇 개월 사이에 진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이 큰 나루는 조금 더 대담해지기로 했다. 며칠 눈치를 보느라 밖에 나가자는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는데, 슬슬 규연을 졸라 봐도 괜찮을 듯했다.
부엌을 깔끔히 치워 놓은 규연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나루는 규연이 곧 나갈 거란 걸 예상했다. 보통 규연이 저렇게 인상을 쓰며 핸드폰을 바라본 후에는 꼭 나갈 일이 생겼다.
“하아…….”
손목시계를 한 번 힐끔거린 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루의 예상과 같이 규연은 곧 나가야 했다. 샘플로 만든 까눌레도 직원들에게 먹여 봐야 했고, 마침 새 직원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면접 지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은 상관이 없는데, 집에 혼자 남아 있을 나루가 문제였다. 혼자 두자니 걱정되고, 데리고 나가자니 이전에 도망쳤던 일이 있어서 더 걱정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나 잠깐 나갔다 와야 하는데.”
“옷 입고 올게요.”
“아니.”
“나 안 데리고 가?”
“또 반말한다.”
반말 어쩌라고. 속으로만 꿍얼거리던 나루가 부러 간절한 눈으로 규연을 바라봤다. 이렇게 하면 규연의 마음이 약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을 찌푸리며 재킷을 걸쳐 입던 규연이 들러붙는 나루를 단호히 밀어냈다. 데리고 나가서 잃어버릴 바에야 차라리 집에 두는 게 훨씬 나았다.
당연하게도 나루는 규연의 의견을 쉽게 따라 주지 않았다. 며칠 못 나가서 몸이 근질거리기도 했고, 또 규연의 카페에 가서 맛있는 디저트들을 얻어먹고 싶었다. 특히, 카페 직원인 서연은 나루를 볼 때마다 맛있는 걸 한가득 챙겨 주곤 했다.
“안 데려가요……?”
“그렇게 쳐다봐도 안 돼.”
“도망 안 가요.”
“안 된다고.”
“데려가라고.”
듣기 좋은 미성의 목소리로 거친 어투를 흉내 낸 나루가 해맑게 웃었다. 규연과 딱 붙어 다니더니 그사이에 말투를 익혔나 보다. 틱틱거리면서도 거친 게 딱 규연의 말투 그대로였다.
의도치 않게 거울 치료를 당한 규연이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입을 떡 벌렸다. 나루와 대화할 땐 잠시라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순둥하게 생겨 먹은 게 틈만 보이면 훅 들어오려고 해서 당황할 때가 많았다.
규연이 미쳤냐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자 나루가 아무렇지 않게 눈을 깜빡거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물러나지 않을 테니 데리고 나가 달라는 눈빛이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이제 도망 안 가.”
“…….”
“정말이야, 이제 규연이 믿으니까. 나 안 버려둘 거잖아.”
나 안 버려둘 거잖아. 규연의 속을 꿰뚫는 말이었다.
나루의 눈이 정확했다. 규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규연은 나루를 버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