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도건혁이 이 시간에, 이런 장소에서, 송나루와 같이 있는 걸까.
상황 파악을 위해 두 사람을 훑어보던 규연이 잇새로 욕지거리를 흘려보냈다. 사진전을 볼 때까지만 해도 말끔하던 나루의 옷이 엉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크림색의 니트에는 검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고, 울었는지 눈가도 붉어져 있는 게 심히 거슬렸다. 나루가 왜 건혁의 목을 조르고 있었는지 납득이 가는 꼬라지였다.
“대답 안 해?”
“그, 그게 그러니까…….”
몰아붙이는 듯한 어투에 흠칫한 나루가 말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건혁의 목을 졸라서, 규연의 화가 치솟은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건혁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나루를 더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나루는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규연의 손을 먼저 놓아 버린 것도, 굳이 그런 일을 벌여서 건혁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제 탓인 것 같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던 일을 바른대로 말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막상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니 입이 돌처럼 굳어 떨어지지 않았다.
멀리 서 있던 규연은 나루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건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반대로 나루의 고개는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누가 너보고 대답하래.”
“어…….”
“도건혁, 너 얘 데리고 뭐 했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규연은 나루가 아닌 건혁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란 나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규연을 올려다봤다. 건혁 또한 놀란 건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규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하긴. 아무것도 안 했어.”
“믿을 만한 말을 좀 지껄여.”
“좀 서운하네, 나 목도 졸렸어. 너도 봤잖아, 규연아.”
거짓은 아니었으나 자기 유리한 쪽으로 돌려 말하는 건혁이 얌체 같았다. 어느새 규연의 뒤에 몸을 숨긴 나루가 건혁을 힐끔거리며 노려봤다.
오늘따라 규연의 등이 더 듬직해 보였다. 상대방의 등을 보는 건 굉장히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보게 되는 건 나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나루는 자신을 찾아와 주고, 감싸주기까지 하는 규연에게 진심으로 감동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억울함을 토로하던 건혁이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규연은 뒤돌아서서 나루의 행색을 자세히 살펴봤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다시 천천히 살피는 눈초리였다.
멀뚱하게 서 있다가 붙잡힌 나루는 말없이 규연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제 목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눈만 깜빡거리는 게 순진해 보였다.
여린 어깨를 붙잡고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규연은 나루의 목에 남은 흔적을 발견했다. 목에는 무언가에 힘껏 졸린 듯한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목 졸린 자국. 그리고 건혁의 목을 조르고 있던 나루.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평소 나루는 규연이 하는 행동이나 말을 곧잘 따라 하곤 했다. 아까만 해도 그랬다. 밥을 먹기 전, 규연이 손을 붙잡자 놓으라며 어설프게 배운 욕을 따라 했었다.
나루는 당한 건 똑같이 되돌려주는 단순한 애였다. 겁이 많아서 먼저 덤벼드는 일이 없을 텐데, 건혁의 목까지 조르고 있었던 걸 보면 그와 비슷한 일을 더 심하게 당했을 것이다.
규연은 나루의 목에 남은 자국을 발견하자마자 이를 부득 갈았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성질이 확 돋아서 눈이 돌 것만 같았다.
“네가 먼저 조른 게 아니고?”
“커흑!”
“넌 내가 등신으로 보이냐. 그러게 왜 멋대로 입을 놀려.”
손을 뻗은 규연이 그대로 건혁의 목을 졸랐다. 나루가 잡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악력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나루가 규연의 뒤에서 나와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말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루는 슬쩍 붙잡은 팔을 놓아줬다. 생각해 보니 굳이 말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 나쁜 놈, 내 목을 그렇게 조르더니. 규연이한테 한 번 죽어라 당해 봐라.
아예 한 걸음 물러선 나루가 다시 규연의 등 뒤에 몸을 숨겼다. 건혁이 당하는 건 속이 시원했지만, 막상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져서 차라리 안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퍼렇게 핏줄이 선 손으로 건혁의 목을 움켜쥐고 한계까지 밀어붙이던 규연이 드디어 팔을 내렸다.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해갈 때 즈음 풀어준 것이었다.
풀려나자마자 숨을 크게 터뜨린 건혁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규연은 숨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멱살을 쥐어 잡았다.
“네가 뭘 단단히 착각하는데, 난 너 친구로 생각 안 해.”
“야, 유규연.”
“너처럼 저급한 새끼랑 내가 동급일 리 없잖아. 안 그러냐.”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말로 건혁의 기를 눌러 버린 규연이 재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무어라 반박하려던 건혁은 제 성질을 눌러 참고 입을 다물었다. 규연에게 더 미움을 샀다가는 이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규연아, 일단 화부터 가라앉히고.”
“앞으로 쟤한테 관심 꺼 줬으면 하는데.”
“…….”
“이게 부탁이 아니라는 건, 네가 제일 잘 알겠지.”
경고 섞인 말에 건혁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넘어갈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규연은 확답을 들은 뒤에야 손을 완전히 풀어줬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 내뱉어지는 숨이 거칠었으나,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괜찮은 척을 했다.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한 건혁은 나루를 슬쩍 쳐다보았다. 안광이 사라진 눈빛은 꼭 썩은 동태 눈깔을 떠올리게끔 했다. 규연은 나루의 손을 붙잡고 자리를 먼저 벗어났다. 건혁의 옆을 지나치면서 제 눈에 띄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해 줬다.
얼떨결에 붙잡혀 끌려 나온 나루는 규연의 차까지 말없이 따라 걸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무서웠지만, 다 제가 벌인 일이니 감당해야 했다.
조수석 문을 연 규연이 나루를 던지듯 구겨 넣었다. 거친 행동에도 불만 없이 따르던 나루는 괜한 손톱만 괴롭힐 뿐,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운전석에 오른 규연은 시동을 걸다 말고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갑작스러운 신경질에 화들짝 놀란 나루가 시선을 피하자, 규연이 말을 걸어왔다.
“야.”
“네?”
“너 어디 갔었어. 왜 거기에 있었어. 아무리 찾아도……!”
“…….”
말을 하다가 만 규연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또 혼자 몰아붙이면 나루가 겁먹을 것 같아서 애써 화를 삼킨 거였다. 나루는 규연이 화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찾았구나. 찾아 줬구나.
잠깐이었지만, 정말 버림받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규연이 자신을 애타게 찾아다녔다니, 안도감이 들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루는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놓았던 꽃다발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꽂아 놓은 거였는데 이렇게 보관하길 잘했다. 비록 힘없는 종이 포장지가 보기 싫게 구겨지긴 했지만, 자그마한 꽃송이들은 무사히 잘 붙어 있었다.
“이거, 주고 싶어서…….”
“뭐?”
“이걸 꼭 주고 싶어서.”
나를 찾아와 준 너한테 이걸 꼭 주고 싶어서.
규연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손을 놓고 사라졌던 게, 꽃다발을 사러 가기 위해서였다니.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 비루한 꽃다발은 처음이었다. 아니, 이건 꽃다발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손바닥만 한 포장지는 다 구겨졌고, 꽃도 부실하게 달려 있고, 하나같이 별로였다.
그래, 분명 별로인데. 별로여야만 하는데.
꽃을 건네는 나루의 얼굴이 무척이나 예뻐 보여서, 구겨진 포장지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촉촉해진 눈, 수줍게 올라간 입꼬리, 복숭아처럼 발갛게 물든 뺨이 짜증 나게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아련하기까지 해서 마음이 괜히 간질거렸다.
규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나루가 먼저 손을 붙잡아왔다. 큼지막한 손에 억지로 꽃다발을 넘겨준 그가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찾아 줘서 고마워.”
“…….”
양심이 쿡쿡 쑤셨지만, 규연은 무언가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바보도 아니고, 찾아 줘서 고맙다는 말을 왜 하는 건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규연이 대답 대신 고개를 휙 돌렸다. 지금은 도저히 나루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뭐랄까, 저 순수한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홀릴 것 같아서 위험했다.
나루는 규연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지금이라면 제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규연아, 좋아해도 돼? 너 좋아해도 돼?”
“…….”
“나중에는 너도 나를 좋아해 주면 좋겠지만. 나부터 좋아해도 돼?”
꽤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규연은 드물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들이대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생긴 건 순진해 빠진 게, 행동은 왜 이리 불도저야.
규연이 한 손으로 눈을 가리자, 나루가 낑낑거리며 팔을 떼어냈다. 어서 제 얼굴을 보고 대답하라고 재촉하는 거였다.
결국, 오늘도 규연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네 마음대로 해.”
“어?”
“네 마음대로 하라고.”
긍정적인 대답에 나루의 두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물들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건, 좋아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드디어 답을 받아냈다.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규연에게 안기듯 엉겨 붙어있던 나루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하여간 사람 혼을 쏙 빼놓는 데 재능이 있었다. 정작 나루는 제 행동이 규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고 있었다.
“안전벨트나 매.”
“…….”
“하아,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뭐, 나보고 직접 안전벨트까지 해 달라고?”
안전벨트를 매라는 말에 나루가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보다 못한 규연이 황당한 얼굴로 묻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얄미운 행동인데 이상하게도 믿지 않았다.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규연이 하는 수 없이 나서서 안전벨트를 매 줬다. 싫은 티는 내면서 다 해주는 게 웃겼다. 나루는 가까워진 규연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몸도 좋고, 향까지 매력적인 게 언제 봐도 완벽한 남자였다.
안전벨트를 매주고 자리로 돌아가던 규연이 의미심장한 나루의 표정을 발견했다.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는 표정.
“그만 좀 들이대라. 얼굴에 다 보여.”
“아, 아닌데.”
나루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은 그가 운전대를 잡았다. 백화점까지 달려올 때와 다르게 집으로 가는 길은 속도를 높게 내지 않았다.
아련하면서도, 화사하게 웃던 나루의 얼굴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아서 운전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와 설마, 내가 쟤한테 마음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 아니지. 아니다. 아니야. 운전에 집중해, 유규연.
집에 가는 길이 이렇게나 멀었던가.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 음악까지 튼 규연이 액셀을 조심스레 밟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