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30)


건혁이 나루와의 간격을 더 좁혀왔다. 비열한 표정을 가까이 보고 있으니 찝찝한 기분이 한층 더해졌다. 눈가를 붉히던 나루는 애써 울지 않은 척하며 눈물을 꾹 참았다. 건혁의 앞에서 쪼그라드는 게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나루의 표정 변화에 킥킥거리던 건혁이 표정을 싸하게 굳혔다. 어디 어두운 영화에서 나올 법한 사이코패스 같았다.

“난 네가 여태 규연이 씹고 다니던 졸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

“출신도 없고, 집도 없고.”

온통 나루가 이해하지 못할 소리였다. 규연이를 씹고 다니던 졸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잘 해석해 보면 당연했다. 나루는 규연을 욕하고 다닌 적이 없었다. 오히려 칭찬을 했으면 했지.

다음으로 나온 말은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출신도 없고, 집도 없다. 맞는 말이었다. 출신도 없고 집도 없는 자신을 흔쾌히 받아들여 준 건 규연이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건혁을 쳐다보던 나루가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분위기가 영 좋지 않은 게 느낌이 이상했다.

“뭐 하다 온 새끼일까, 궁금하네?”

“…….”

“말해 봐. 네가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놈인지.”

“내가 그걸 왜 말해 줘야 해.”

건혁은 나루의 존재 자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고, 뭐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루는 순순히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규연이 물어봤다면 조심스럽게나마 말해 줬겠지만, 건혁에게는 말해 줄 필요도 가치도 없었다.

나루의 맹랑한 대답에 심기가 뒤틀린 건혁이 기어코 손을 올렸다. 하는 행동이 전 주인과 똑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나루가 잽싸게 몸을 웅크리자, 위협을 가하던 그가 머리카락을 억세게 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강제로 고개를 든 나루는 건혁의 섬뜩한 얼굴을 마주했다.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익숙했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건혁이 폭력을 가하는 게 불쾌했다.

“그럼, 내가 유규연한테 먼저 말해 줄까.”

“그런 거 말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없긴 왜 없어, 지금처럼 완전히 버려질 텐데.”

“규연이는, 규연이는 절대 나 안 버려.”

앙칼진 대답에 건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버림받아 놓고서는 절대 버림받지 않는다고 버티는 꼴이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루는 규연이 자신을 꼭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기다린 지 두 시간이 다 되어갔을 때, 이미 현실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와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음을 굳게 먹은 나루가 이를 악물었다. 규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 뱀 같은 인간에게 물리지 않도록 버텨야 했다. 주인에게는 한없이 순하지만,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죽어도 이를 세우고 덤벼드는 건 강아지의 습성이었다.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유규연한테 다 들키기 싫으면 월요일에 다시 날 만나러 와.”

“싫어.”

“별것도 아닌 새끼가 고집이 더럽게 세네.”

“너도 별거 아니잖아. 너 규연이 애인이야? 그것도 아니면서, 윽……!”

나루가 계속 덤벼들자 건혁이 자리를 옮겼다. 머리채를 잡고 복도 깊숙한 곳까지 끌고 들어간 그가 대뜸 목을 졸랐다. 유복한 집에 태어나서 쓴소리 한 번 들은 적 없었는데, 아무것도 아닌 나루에게 별거 아니라는 소리를 들어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다르게 지금 표정은 악마가 따로 없었다. 벽에 처박혀 목이 졸린 나루는 함부로 숨도 내뱉지 못했다. 조르는 힘이 너무 세서 얼굴만 빨갛게 변할 뿐, 기침 하나 뱉기 힘들었다.

“저번에 경고했잖아? 주제 파악하라고.”

“…….”

“할 말이 많은 표정인데, 해 봐.”

목을 졸라 놓고 할 말을 하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반항하지 못하고 있던 나루는 손을 들어 건혁의 팔을 최대한 세게 때렸다. 야무지게 말아 쥔 손이 팔을 툭, 툭, 칠 때마다 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숨통이 한계까지 조여오기 시작했다. 나루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눈을 부릅뜨기 위해 노력했다. 의지와 다르게 점차 힘이 빠지고 있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허, 흐어, 헉……!”

나루가 기절하려는 순간에 건혁이 목을 깔끔히 놓아줬다. 덕분에 바닥에 철퍽, 엎어진 나루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괴로워해야 했다.

건혁은 제 발밑에 쓰러진 나루를 보며 무관심한 얼굴로 손을 털었다. 하는 행동이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기본 도덕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태도였다.

급기야는 나루의 몸을 짓밟듯 발을 올려놓기까지 했다. 목을 조르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쳐도 몸을 짓밟는 행위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루가 입고 있는 옷은 규연이 새로 사 준 옷이었다. 워낙 꼬질꼬질해서 아예 규연이 사 준 옷으로 갈아입고 백화점 안을 돌아다녔는데, 소중하게 보관해도 모자랄 새 옷이 무참히 더럽혀진 것이다.

“내가 유규연 옆자리를 어떻게 지켰는데. 너 같은 게 끼어들면 못 쓰지.”

“그게 무슨,”

“닥치고 들어. 유규연이랑 가장 가까워야 할 건 나야. 어디 너 따위가 YK에 비벼.”

“발이나 치워, 씨…,”

건혁이 여태 규연과 어떤 사이를 유지했든, 나루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규연이 무참히 끊어낼 만한 관계였다. 지금 나루에게 중요한 건, 제 옷을 더럽히고 있는 발을 치우는 게 전부였다.

상체를 일으켜 다리를 힘껏 밀어낸 나루가 더러워진 니트를 다급히 털어냈다. 규연에게서 배운 욕을 은근슬쩍 섞어 말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와중에 크림색 니트라서 새카만 발자국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게 속상했다. 게다가 소재 때문에 손으로 털어내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다.

“너 때문에 옷이, 옷이…….”

“그깟 옷 하나에 전전긍긍하는 새끼가 무슨,”

“이거 규연이가 사 준 옷인데 네가 다 망쳤어! 이 나쁜, X발, 거지 같은 게!”

온갖 욕을 두서없이 내뱉은 나루가 건혁에게 날다람쥐처럼 덤벼들었다. 몸을 세게 가져다 박자, 서 있던 건혁이 작게 휘청였다. 아무리 나루가 왜소한 체형을 가지고 있다 해도 갑작스러운 충격엔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건혁의 목을 두 손으로 붙잡은 나루가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나도 당해 봤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 보라는 심보였다.

안타깝게도 나루의 힘은 건혁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눈동자를 내려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손을 쳐다보던 건혁이 비웃음을 날렸다. 사람을 위협해 본 적이 없어서 힘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게 가소로웠다.

“왜, 그렇게 덤벼들더니 목 조를 자신은 없나 봐?”

사람을 깔보는 듯한 태도 하며, 비열한 말투까지 완벽하게 재수 없었다. 나루는 목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나도 얼마든지 너를 해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 규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상황에서 꼼짝없이 무릎부터 꿇었을 거다. 사람답게 살지 못해서 밑바닥 취급받는 게 당연했고, 잘못하지 않아도 상대가 기분 나빠하면 무조건 사과부터 하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나루는 규연을 만나고부터 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존중받아 봤고, 제 의견을 몰아세워도 욕먹거나 맞지 않았다.

정상인답게 살아 보니,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게 억울해졌다. 이제는 감정도 다양해진 터였다. 화남, 억울함, 속상함, 행복함, 모두 규연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나는 이제 바보가 아니야. 반박할 줄도 알아야 해.

“나한테 이러지 마. 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갑자기 나타나서 때린 네가 나쁜 거야.”

“네가 잘못한 게 없긴 왜 없어.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속였는데.”

“…난 그런 적 없어. 규연이한테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나루는 정말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규연이 전 주인에 대해 궁금해한다면, 속이지 않고 전부 말해 줄 자신도 있었다. 그리 듣기 좋은 얘기도 아니고, 자신이 어떤 취급을 당하고 살았는지 말하는 게 창피했지만, 규연이라면 너그러이 보듬어줄 게 분명했다.

나루와 건혁, 두 사람은 숨 막히는 정적을 이어갔다. 나루는 여전히 목을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고, 건혁 또한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나루를 비웃는 중이었다.

찝찝하지만 그냥 이대로 상황을 마무리시키면 어떨까. 나루는 착잡한 마음으로 고민했다. 혹시라도 규연이 자신을 찾아냈을 때, 이 상황을 보고 오해하지 않을까 싶어 초조해졌다.

그냥 이대로 끝내자고 할까.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걸까. 규연이가 보기라도 하면, 아니 그럴 리 없겠지만…….

“하, 너 지금 뭐 하냐?”

이럴 때만 타이밍이 좋았다. 까칠한 목소리에 거친 말투. 이건 분명 규연의 목소리였다.

차마 건혁에게서 손을 떼지 못한 나루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인상을 가득 찌푸리고 있는 규연이 있었다. 여기까지 뛰어온 건지 머리카락을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입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나루는 규연이 드디어 자신을 찾아와 줬다는 안도감보다 불안감을 더 먼저 느꼈다. 건혁이 아무리 못된 놈이라고 해도 규연의 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루는 그런 건혁의 목을 조르고 있는 상황에서 규연을 마주치고 만 것이다.

황급히 손을 뗀 나루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허망해진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떨렸다.

이런 나루의 태도와 달리 건혁은 아주 여유로웠다. 주머니에 손까지 꽂아 넣고 나루를 깔보며 슬쩍 입꼬리를 당겨 웃는 모습이 특히 얄미웠다.

“뭐 하는 거냐고.”

제대로 열받은 목소리다.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규연이 눈을 매섭게 떴다. 쌍욕이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략 한 시간 전, 차를 돌려 백화점까지 돌아온 규연은 1층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엘리베이터를 타지는 않았을 거 같아서 에스컬레이터로 일일이 한 층씩 오르며 백화점 안을 쥐 잡듯 뒤지고 돌아다녔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12층까지 올라온 그는 식당가부터 헤어샵, 심지어는 비상구 계단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마지막 층까지 확인해 보아도 나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건 직원용 출입구로 향하는 복도뿐이었는데,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구석져서 나루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루가 이 백화점 안에 없다는 걸 확신한 그는 허탈한 발걸음으로 뒤돌아섰다. 믿기지 않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복도 안쪽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떠드는 건지는 모르겠고, 딱 들어봤을 때 직원들 같지는 않았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복도 안쪽까지 들어와 본 규연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마주하고 말았다.

제 모습을 감추고 사라진 애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으나, 더 이해되지 않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도건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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