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게도 규연은 건혁을 발견하지 못했다. 차마 주변을 둘러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넋이 빠질 대로 빠진 규연은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처음으로 사귀었던 누나와 헤어졌을 때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었다. 나름 오래 사귀었던 세 번째 여자 친구가 떠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운 마음은 잠시뿐이었고 늘 평소처럼 지냈는데, 왜 아무 사이도 아닌 나루에게 이런 감정이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백화점 입구에 다다르자 자동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동시에 여러 사람이 규연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규연은 입구에 가만히 서서 더 이상 발을 뻗지 않았다.
이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송나루를 못 볼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며 규연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문은 계속 열려 있는데 왜 저러고 서 있냐는 눈빛이었다. 체면 구기는 일을 싫어하는 규연이 웬일로 사람들의 시선을 가만히 받아내고 있었다.
멍청하게 여기 서서 뭐 하냐. 나가자.
나가자고 마음먹고도 한참을 서 있던 규연이 겨우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안쪽의 훈훈한 공기와 달리 바깥은 서늘했다. 늦가을이라 그리 춥지는 않았으나 손이 괜히 휑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지상에 주차해놓은 차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수석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내젓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을 걸기까지 자그마치 5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몇 초면 충분한데, 망설이느라 5분이나 허비한 것이다. 핸들을 돌린 그가 도롯가로 들어섰다. 평소에는 제한 속도에 딱 맞게끔 차를 몰던 규연이 최대한 느린 속도로 달렸다.
오후 늦은 시간의 도로는 지옥이었다. 특히, 서울 중심가는 툭하면 길이 막혔다. 가는 곳마다 신호가 걸려서 여러 번 브레이크를 밟던 그가 문득 옆을 돌아봤다.
올 때까지만 해도 온기로 채워져 있었던 조수석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루를 만난 후로는 혼자 차를 탄 적이 많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늘 옆에서 정신 사납게 굴었지만, 창문을 보며 발을 구르는 모습이 나름 귀여웠고. 운전 중인 규연을 빤히 구경하면서도 방해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도 은근 신경 쓰였었다. 규연은 늘 관심 없는 척, 안 보는 척하며 나루를 지켜보고 있었다.
졸부치고는 세상 물정을 아무것도 모르고, 야무진 거 같으면서도 어딘가 맹하다. 그런 애가 과연 서울 한복판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전까지는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루의 부모는 자식이 행방불명됐는데도 무관심했다. 마치 그러길 바랐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라고 했으니 돌아가도 제대로 된 취급은 못 받을 게 분명했다.
이 부분은 규연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으나 나루의 사정을 알게 된 이상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저, 이제 여기서 나가는 거예요……?’
‘죄, 죄송해요. 소중한 친구들을 소개해 줬는데 내가 막 물어버려서. 그런데 저는 진짜 규연이가 괴롭힘당한 줄 알고…….’
‘규연이가 좋아서……. 진짜 좋아.’
‘나는 네가 좋아. 이제 진짜 내 주인이니까.’
‘…가능하면 하고 싶은데. 데이트.’
그간 나루와 지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골치 아프기만 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시간은 저도 모르는 새 뇌리에 단단히 박혀 앞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특히, 문화홀 앞에서 데이트하고 싶다며 중얼거리던 나루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규연은 애써 그 중얼거림을 무시했었다. 쓸데없는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한 번쯤은 원하는 대로 해줄 걸 그랬나. 이런 백화점도 신기해했고, 구경도 더 하고 싶어 했는데. 생각해보니 핀잔만 늘어놨던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규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 12층.”
고층까지 올라가지 못할 거라 판단하고 백화점 전체를 뒤지지 않았는데, 12층이 걸렸다. 오늘 나루가 머리카락을 자른 곳도, 규연과 함께 밥을 먹은 곳도 모두 12층에 있었다.
만약, 나루가 아직 백화점에 혼자 남아있는 거라면?
얼마 전, 심부름 업체에 다녀왔을 때가 함께 생각났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홀로 울고 있던 나루를 보았던 날.
조용히 훌쩍이고 있었지만,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썹이 축 늘어뜨려져 있었고, 커다란 눈망울에서는 눈물이 투둑, 떨어져 내렸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처연하던지, 규연은 아직도 그 모습을 잊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게 울고 있으면 어떡하지.
물기 가득한 얼굴을 떠올려내자마자 가슴 어딘가가 비틀리는 것 같았다. 이를 갈며 고민하던 규연은 곧바로 핸들을 꺾어 차를 돌렸다.
그래, 책임지면 될 거 아니야. 일단 찾자. 찾고 생각해.
빠앙―!
급 유턴으로 인해 반대편 차선에 있던 차가 클랙슨을 크게 울렸다. 규연은 자신의 안전 따위 생각하지 않고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 * *
내가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른 걸까.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나루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으나,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려오다 못해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자판기 근처에 사람이 올 때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 봤지만, 규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규연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갈 때면 심장이 다 철렁했다.
나루는 슬슬 제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도 규연이 자신을 찾아내지 않았다는 건,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실은 작은 희망을 품고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기도 해 봤다. 조금 더 아래층까지 내려가 보아도 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괜한 짓을 한 걸까 싶어 1층까지 가 보기도 했다. 역시나, 규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루는 다시 자판기 옆으로 돌아와 절망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행동을 한 건지, 몇 시간 전의 자신을 흠씬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 같았던 주인마저 잃고 말았다.
나루는 제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지 몰랐다. 규연과 함께 있을 땐 이 세상이 신기하기만 할 뿐 무섭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낯선 세상이 두려웠다.
낯선 사람들, 나루에겐 너무 큰 세상, 묵직해진 공기, 그 어느 것 하나 편한 게 없었다. 나루는 오랜만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다.
지하실에 갇혀 살았을 땐, 하루에 몇 번이고 생각했었는데. 그때는 정말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죽는다고 생각하니 손이 벌벌 떨렸다.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은 없고, 죽는 건 무섭고. 답이 없었다.
한참 우울에 빠져 있는데, 나루의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값비싸 보이는 구두에 긴 다리. 규연과 비슷한 행색에 잽싸게 고개를 든 나루가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
“오랜만에 보네?”
“…….”
나루에게 말을 건 사람은 규연이 아닌 건혁이었다. 저번부터 자꾸 마주치는데, 그리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흰색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정도 풀어헤치고, 연갈색 정장 바지를 매치해 입은 건혁은 저번에 마주쳤을 때보다 더 껄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겉은 단정해 보이지만, 묘하게 껄렁한 게 거슬렸다.
눈물을 매달고 있던 나루는 건혁이 볼세라 눈가를 벅벅 닦아냈다. 규연이라면 몰라도, 건혁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여러 번 봤는데, 웬만하면 인사 좀 받아줘.”
“나랑 안 친하잖아.”
경계 모드로 들어간 나루가 살갑게 다가오는 손을 매정하게 쳐냈다. 항상 능글맞게 웃던 건혁이 따끔한 손등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건혁은 오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꽤 재미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늘 제 잘난 맛에 살던 규연은 정신머리가 제대로 빠져 있었고, 규연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나루는 버려진 강아지 마냥 이런 곳에 혼자 동떨어져 있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상황인가.
게다가 건혁은 이것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을 막 알아낸 참이었다. 바로 어제, 그는 친한 누나의 파티에 갔다가 규연의 흉을 봤다던 ‘졸부’를 보았다.
분명 규연의 집에 있어야 할 사람이 어째서 파티에 등장한 걸까. 사람들에게 캐물어 졸부의 얼굴을 확인한 건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루가 아니었다. 규연의 흉을 본 졸부는 나루와 정반대로 생겨 먹은 인간이었다. 그럼, 대체 여태 규연과 함께 다녔던 나루는 어디서 온 누구란 말인가.
“난 네가 참 보고 싶었는데.”
“나는 안 보고 싶었어.”
“나한테 이러면 후회할 텐데, 괜찮겠어?”
“…….”
나루의 시선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건혁이 자신을 볼 때마다 비아냥거린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뉘앙스가 조금 이상했다. 무언가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여유롭게 구는 게 더 재수 없었다.
건혁은 나루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저렇게 앉으니 진짜 깡패 같았다. 그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뜬 나루가 건혁을 앙칼지게 노려봤다.
하지만 나루가 눈을 매섭게 떠 봤자였다. 온순한 눈매로는 뭘 해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루를 가소롭게 여긴 건혁이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었다.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내가 한번 맞혀 볼까.”
“…….”
“유규연이 드디어 널 버려서.”
“…….”
유규연이 드디어 널 버려서. 건혁의 말이 칼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애써 부인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는데,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말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나루의 턱을 붙잡은 그가 입꼬리를 활짝 올려 웃었다. 건혁이 원했던 반응은 바로 이런 거였다. 발톱 세운 고양이처럼 건방지게 구는 게 아니라, 제 처지를 깨닫고 절망하는 것.
규연과 붙어 다니며 사람 좋은 척을 했지만, 사실 건혁은 규연보다 더한 쓰레기였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도, 모두 건혁이 주도했었다. 안타깝게도 나루는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건혁의 놀잇감으로 걸려들고 만 것이다.
“아니야, 안, 버렸어…….”
“누가 그래? 안 버렸다고.”
“규연이는, 나 안 버려.”
“불쌍해라. 미안하지만 내가 봤거든. 유규연 혼자 백화점을 나가고 있는 모습.”
끝까지 건혁의 말을 믿지 않던 나루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버렸다는 말까지는 그냥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 백화점을 나가는 걸 봤다면…….
나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던 눈물이 어느새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눈은 서럽게 울면서 소리를 내지 않고 어깨와 가슴만 들썩이는 꼴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잔잔하게 웃던 건혁이 가증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나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느라 손을 쳐내지 못한 나루가 몸을 옆으로 피하자, 뒤통수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긴 그가 속삭였다.
“이거 어떡하나. 난 아직 본론도 안 꺼냈는데.”
“윽, 으읍…….”
“울지 말고 들어 봐. 이 뒷얘기는 더 재미있거든.”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감정 없이 서늘했다. 힘에 제압당한 나루는 꼼짝없이 붙잡혀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건혁이 제 옆을 서성이며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늘 규연이 나서서 챙겨 줬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돼서 속이 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