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30)


피자와 파스타까지 남김없이 먹은 나루는 부른 배를 통통거리며 나왔다. 규연은 나루가 먹는 동안 파스타만 몇 번 깨작이더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눈치 보일 법한 상황에서도 나루는 꿋꿋하게 밥을 먹었다.

규연은 아까부터 ‘내가 널 좋아해서 사 주는 게 아니다’, 혹은 ‘착각하지 마라’는 말만 두세 번씩 했다.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옷을 사 줄 때도 그렇고, 해 줄 건 다 해 주면서 마치 변명하는 거 같았다.

“밥도 먹었으니까 됐지. 집 가게 따라 와.”

“조금 더 구경하고 싶어요.”

규연의 옷자락을 붙잡은 나루가 1층 구석을 가리켰다. 문화 이벤트를 위해 작게 마련된 홀에서는 인기 작가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안을 얼핏 구경할 수 있었는데, 몇 개의 사진이 나루의 시선을 확 이끌었다.

옷도 샀고, 머리도 했고, 밥도 먹었는데, 이제는 사진전 구경까지. 몇 가지를 빼면 꼭 데이트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규연은 일부러 나루의 손을 입구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냥 가.”

“보면 안 돼요?”

“너 지금 나랑 데이트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가능하면 하고 싶은데. 데이트.”

고개를 돌려 작게 중얼거리던 나루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왕 나온 거 조금만 더 데리고 돌아다녀 주면 안 되는 걸까. 서운한 마음이 밀려들었지만, 와중에 눈은 문화홀 너머를 힐끔거리기 바빴다.

규연은 하는 수 없이 뒤돌아섰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사진전까지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머, 작가인가 봐. 가 볼까.”

“그러네, 나 저 사람 실물은 처음 보는데. 잘됐다.”

타이밍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조용히 등장한 작가가 문화홀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은 작가인 걸 알아보고 서서히 문화홀로 몰려들었다.

나루도 그중 하나였다. 규연의 새끼손가락을 꼭 붙잡고 걷다 보니 온화한 인상의 작가가 제법 가까이 보였다.

아, 저 사람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찍은 거구나.

벽에는 그림 같은 풍경들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나라인지 모르지만 잔잔한 호수가 인상적인 마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들판, 평화롭고 마음에 안정이 느껴지는 사진들이었다.

넋을 놓고 구경하던 나루는 문득 규연의 손을 쳐다보았다. 틱틱거리긴 해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손은 잡아주고, 사진을 구경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은근 다정했다.

“어, 어엇.”

한참 사진 구경을 하고 있는데 웬 사람들이 한 무더기 끼어들었다. 백화점 1층 입구는 유독 사람이 많은 곳인데 사진전까지 열리고, 외국인들과 새로 방문한 사람들까지 더해지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규연의 새끼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루보다 조금 더 앞에 있던 그가 잡은 손가락이 끊어지지 않도록 힘을 준 것이었다.

순간, 나루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여기서 내가 이 손을 놓으면, 규연이가 날 찾아 줄까. 여태 잘해 줬어도 나한테는 착각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잖아. 마음을 열어 보라고 했으면서, 사실 나만 규연이를 좋아하게 된 거라면?

긴장감에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불안정해진 동공은 어느새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좀 지나갈게요.”

“저 작가 요즘 방송에도 얼굴 비추더니, 여기에 사진전까지 열었네.”

“그러니까 글쎄. 뭐, 사진들이 나쁘지는 않네.”

마침 나루의 앞으로 서너 명의 여자들이 지나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루에게는 그 시간이 30분처럼 느껴졌다. 잡은 손을 보지 못한 여자가 그 앞을 지나쳤고, 계속 붙잡고 있었더라면 놓치지 않았을 손이 허무맹랑하게 끊어져 버렸다.

나루가 먼저 손을 빼 버렸다.

눈꺼풀이 감기고 또다시 떠진다. 1초 사이에 규연과 나루의 사이를 지나치고 간 사람들은 정확히 다섯 명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세상이 어두워졌다 밝아진다.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나쳐가는 중년 여성들,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백화점 직원들, 사진전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다섯 명이 일곱 명이 되고, 일곱 명이 열다섯 명이 되고, 열다섯이 또 스무 명이 되었다.

나루는 그렇게 규연에게서 멀어졌다. 충동적인, 바보 같은 행동이었으나 이렇게라도 규연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규연이가 나를 찾으러 오면, 그러면, 계속 옆에 있는 거야. 나를 찾아 주긴 할까. 만약에 나를 이대로 두고 가면 어떡하지. 그때는 정말 내가 먼저 규연이를 포기하는 수밖에. 

……근데, 그렇게 되면 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뒷걸음질 치던 나루가 서서히 멀어졌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문화홀이 저 멀리에 있었다. 12층까지 올라온 나루는 최대한 구석진 곳을 찾았다.

굳이 12층까지 올라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12층에 오래 있기도 했고, 규연이 제일 먼저 자신을 데려온 곳이니, 규연이 가장 먼저 들르지 않을까…… 해서.

화장실 근처, 인적 드문 복도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판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루가 아는 건 음료수 자판기밖에 없는데, 이곳의 자판기는 조금 특이했다.

“꽃……?”

꽃다발이 예쁘게 담긴 자판기였다. 빨갛고 파란 안개꽃부터 장미까지 다양하게 준비된 꽃다발이 나루의 시선을 단숨에 훔쳐냈다.

바지 주머니를 뒤져보던 나루는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잡아 꺼냈다. 이전에 규연을 졸라 간식을 사 먹고 남은 잔돈이었다. 천 원짜리 지폐를 천천히 세어 보니 총 팔천 원 정도가 모였다. 꽤 많은 금액이었다.

꽃다발은 생각보다 비쌌다. 자판기라고 하지만 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가격에 나루가 곤란한 듯 발을 굴렀다. 그나마 지금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손바닥만 한 꽃다발 정도였다.

지폐를 잘 펴서 넣은 나루가 가장 작은 꽃다발 하나를 자판기에서 뽑았다. 하늘색 안개꽃을 잘 말려 포장해놓은 게 귀엽고 예뻤다.

나는 어쩌자고 이걸 뽑은 거지. 규연이가 나를 찾으면, 이걸 전해줄 수 있을 텐데.

한참을 그 앞에 서서 고민하던 나루가 작은 꽃다발을 품에 소중히 껴안았다. 

부디 이 꽃다발을 규연에게 전해줄 수 있었으면.

커다란 자판기 옆에 쪼그려 앉은 나루는 제 발끝만 쳐다보았다. 자그마한 머리에 생각이 가득 차서 뇌가 터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규연의 손을 놓았을 때부터 쿵쿵 뛰어대던 심장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한편, 규연은 심란한 상태였다. 분명 나루의 손을 잘 붙들고 있었고, 사진을 구경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루가 사라졌다.

언제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많아져서 이제 돌아가자고 하려는데, 뒤를 돌아보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나루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근처에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가 돌아가고 사람들이 흩어진 뒤에도 나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문화홀 안쪽까지 구석구석 잘 살펴봤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나루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규연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분명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는 일부러 도망가라며 현관문까지 열어놓았고,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나루에게 시도 때도 없이 착각하지 말라며 상처를 줬다. 모두 규연이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나루가 뻔뻔스럽게 붙어오고,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밥을 먹고,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해서 정말 괜찮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손을 놓고 떠나 버린 것이다.

여태껏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나가길 원했던 거고? 그렇다기에 나루는 규연과 계속 붙어 있고 싶어 했다.

그래, 사람이 많았잖아. 새끼손가락만 겨우 붙잡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잃어버린 거겠지. 그 순진한 놈이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어. 식당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고…….

사진전 앞에 서서 생각 정리를 하던 규연이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사람이 많긴 했지만, 근처 매장 직원들이라면 나루를 목격했을 수도 있다. 나루가 흥미를 느낄 만한 매장들은 1층에 꽤 많았다.

“혹시 키 이만하고, 노란빛으로 밝은 갈색 머리에, 귀엽게 생긴 남자 보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고객님. 그런 분은 저희 매장에 들러 주시지 않아서요.”

가까운 매장부터 뒤지기 시작한 그가 같은 질문을 여러 번씩 하고 돌아다녔다. 안내 방송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고민됐지만, 경쟁사 백화점에서 그런 짓을 한다면 무조건 형들이나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매장에 들른 고객들을 상대하느라 미처 밖을 확인하지 못한 직원들은 하나같이 그런 분을 뵙지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삼십 분이 넘는 시간 동안 1층 전체를 쥐 잡듯 뒤졌는데 봤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설마, 다른 층으로 올라간 건가.

시간상 3층까지 올라갔을 가능성이 컸다. 그 이상은 올라가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 분명 저층에 있을 것이다. 규연은 나루가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한 줄 알았다.

그렇게 2층도, 3층도 샅샅이 뒤졌다. 특히 향수를 파는 매장은 더 꼼꼼하게 살폈다. 나루가 신기해하던 게 떠올라서였다.

“키 작고, 노란빛 갈색 머리에…….”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 매장에는…….”

혹시 몰라 4층까지 살펴본 규연은 복도 한 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한 시간 반 사이에 혼이 쏙 빠져나가서 눈이 텅 비어 있었다.

이쯤 찾았는데 나오지 않는 거면, 백화점 안이 아닌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여태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나루는 규연에게 납치당해 온 입장이었다. 아무리 옆에 있고 싶어 했어도, 이런 기회가 생겼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까.

이미 사과받기는 글렀고, 나루가 자신에게 마음을 품은 이상 데리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규연은 나루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을 것이라 결정 내렸다. 애초에 자신이 나루를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이 상황은 규연에게 유리했다. 나루가 먼저 손을 놔 줬고, 규연은 모르는 척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단순히 잃어버린 것이라도 상황 자체가 규연에게 유리했다는 거다.

그런데 나는 왜 미친 것처럼 그 애를 찾아다닌 거지.

“하, 참…….”

모순적인 제 행동에 헛웃음마저 튀어나왔다. 그냥 갔어도 될 것을, 왜 이렇게 찾아다닌 걸까. 찾으면 뭐 어쩌려고.

나루와는 좋게 만난 사이도 아니었다. 합의 후 동거한 것도 아니었고.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이였다. 안 그래도 일찍 정리해야 했던 걸 질질 끌고 있었는데, 이제야 끊어진 것이다. 이게 맞는 거였다.

그래, 내가 여기서 걔를 찾아 데려가면. 그 뒤는? 뭐, 평소처럼 집으로 가서 아무렇지 않게 얼굴 보고 살려고?

좋아하지도 않는데 굳이 데려갈 필요 없잖아. 걔를 평생 책임질 것도 아니고.

그냥 가자, 유규연. 냉정해져. 나답지 않게 왜 이래.

자리에서 일어선 규연이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나루를 찾을 때와는 달리 느리게, 최대한 느릿하게 걸었다.

짧은 사이 규연의 얼굴에는 온갖 근심 걱정이 가득해졌다. 낯빛이 이렇게 어두워진 건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어, 규연이잖아. 굳이 여기까지 와서 안색이 왜 저래.”

우연히 맞은편에서 지나가던 건혁이 넋 빠진 규연을 발견했다. 안 그래도 조만간 규연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곳에서 마주친 게 썩 반가웠다.

싸한 시선으로 규연의 안색을 살피던 그가 묘한 분위기를 읽어내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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