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그럼, 준비되시면 말씀해 주세요.”
상황을 지켜보던 헤어 실장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규연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헤어샵에 들어가기 싫어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우선 샵을 빠져나와 비교적 인적이 드문 복도에 나루를 끌고 왔다.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이자니,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창피를 당할 수도 있고.
“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얌전히 따라올 수는 없는 거냐? 어?”
“규연이 너무해.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벌주는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맞잖아, 맞으면서! 내가 저거 무서워하는 거 알고 벌주려는 거잖아.”
나루는 규연이 제게 벌을 주려는 줄 알았다. 나루에게 미용 가위는 흉기나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강아지의 모습으로 애견 샵에 끌려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발버둥을 치다가 가위에 깊게 베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규연은 나루를 모자란 사람 취급하듯 쳐다보았다.
아니, 다 큰 사람이 저딴 가위를 왜 무서워하지.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나루는 어딘가 모자란 게 분명했다. 그래서 대놓고 뭐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거 아니니까 진정해.”
“거짓말.”
“너 나 못 믿냐?”
“못 믿어.”
이런 X발. 대답은 꼬박꼬박 잘도 해요.
보통 좋아하는 사람이 저렇게 물으면 믿는다고 대답하지 않나. 규연은 뒷목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여기서 화를 낼 수도 없고, 어떻게든 마음을 좀 가라앉혀야만 했다.
나루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규연을 경계했다. 기회를 보이면 저 끔찍한 곳으로 또 끌려 들어갈지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기가 빨린 규연은 다 죽은 눈으로 나루를 상대했다. 백화점에 들어온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힘들었다.
“그 거지 같은 머리로 계속 살겠다고?”
“…….”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는데, 다칠 일 없으니까 얌전히 들어가자.”
“…….”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는데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나루는 샵을 힐끔거리며 손가락만 계속 꼼지락거렸다. 우물쭈물하는 입이 답답했지만, 규연은 부처가 된 기분으로 인내심을 다스렸다.
그렇게 5분이 지났다. 규연의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무려 5분씩이나 기다려 줬는데, 나루는 아직도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딴짓만 반복했다.
“됐다, 됐어. 난 쪽팔려서 너랑 같이 안 다닐 거니까 알아서 해.”
“어……?”
“뭘 어야, 비켜. 내 옆에 들러붙지 마.”
“드, 들어갈게요.”
기다리다 못한 규연이 나루를 확 밀쳐냈다. 생각해서 데리고 와 줬더니 안 들어가겠다면서 버티기나 하고. 제 수고가 아까워서 그냥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규연이 매정하게 굴자, 숨죽이고 있던 나루가 팔을 꼭 붙잡았다. 버림받는 것보다 무서운 걸 참는 쪽이 훨씬 나았다.
“이미 늦었어.”
“아니야, 안 늦었어요. 들어갈 거야!”
규연의 팔을 이끈 나루가 제 발로 샵까지 들어왔다. 와중에 붙잡은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줄은 몰랐는데 큰 트라우마도 있나, 싶어 나루의 행동을 관찰하던 규연이 자그마한 몸을 제 뒤에 숨겨 줬다.
“준비되셨나요? 그럼 자리 안내해드릴게요.”
규연의 뒤에 숨어 자리까지 따라온 나루가 의자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이 뒤로는 일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담당 헤어디자이너가 나타나서 나루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더니 분무기를 뿌리고 빗질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루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가위가 등장했다. 서늘한 날이 닿을 때마다 어깨를 움찔거리자 지켜보던 규연이 이마를 짚었다.
“고객님, 불편한 곳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아, 아니요.”
친절하게 웃던 디자이너가 다시 가위질을 시작했다. 겁이 질린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던 나루가 아예 시선을 차단해 버렸다. 눈을 꾹 감으니 앞이 캄캄해서 그나마 덜 무서웠다.
거울로 스타일을 확인해 보던 디자이너가 그런 나루를 발견하고 티 나지 않게 웃었다. 생긴 것도 유순하니 귀여운데, 하는 짓까지 깜찍해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뒷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얼굴 때문인가. 다른 사람이 하면 모자라 보일 행동이 이상하게 나루가 하면 그저 귀여워 보였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사는 게 이상하게 요망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타일은 마음에 드세요?”
“어, 네…….”
조심스레 눈을 뜬 나루가 거울을 바라봤다. 깔끔하게 잘린 뒷머리와 예쁘게 정돈된 앞머리가 평소와 달리 단정했다. 디자이너가 드라이까지 해 준 터라 제 모습이 영 낯설기까지 했다.
“배우 윤서인 씨 아세요? 그분처럼 스타일링 해 봤는데 정말 잘 어울리세요. 특히 얼굴이 동글동글 귀엽게 생기셔서 윤서인 씨보다 더 어려 보여요!”
과분할 정도의 칭찬이었다. 나루는 배우 윤서인이 누군지 몰랐지만, 잘 어울린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얼굴을 붉혔다.
규연은 거울에 빨려 들어갈 기세로 자신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나루를 뒤로하고 카운터로 향했다. 나루는 계산을 마치기 전까지 거울 앞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들어가기 싫다고 고집을 부릴 때는 언제고,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나와.”
“어, 어어, 같이 가!”
손가락을 한 번 까딱인 규연이 망설임 없이 샵을 나섰다. 나루는 황급히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와중에 머리를 만져 준 헤어 디자이너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샵에서 나온 뒤, 이제 옷을 살 차례였다. 나루의 몰골을 천천히 훑어보던 규연이 혀를 쯧, 하고 찼다.
“머리만 만져 놓으면 뭐 해, 꼴이 거지 같은데.”
“나 거지 아닌데…….”
소심하게 반박하던 나루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딛었다. 확실히 백화점에서는 엘리베이터보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게 더 즐거웠다. 이동하면서 물건들을 구경할 수도 있고,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났다.
규연은 4층으로 내려와 캐주얼한 남성복을 취급하는 해외 브랜드 매장으로 향했다. 나루는 옷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주는 대로 입을 줄만 알았지, 직접 고르는 재미는 느껴본 적도 없었다.
익숙한 얼굴이 매장에 들어서자 서 있던 직원이 서둘러 두 사람을 반겼다. 규연은 한 번 방문할 때마다 몇백, 몇천씩 써 주는 VVIP 고객이었기에 늘 정성을 다해야 했다.
나루는 직원과 규연에게 끌려다니며 옷을 골랐다. 아니, 골랐다고 하기에는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옷 보는 눈이 뛰어난 규연이 나서서 나루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을 찰떡같이 골라냈다.
연하늘색 니트, 크림색 재킷, 연분홍색 카디건까지. 규연이 절대 입지 않는 색상의 옷들이 나루의 얼굴에는 제 것처럼 잘 어울렸다.
“너무 잘 어울리세요! 피부가 워낙 하얀 분이시라 파스텔 색감이 잘 받네요.”
화사하게 미소 짓던 직원이 과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손뼉을 쳤다. 나루는 오늘이 제 생일인 줄 알았다. 갈 때마다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갈 거 같았다.
규연은 무심한 낯으로 옷을 골랐다. 진심보다 가식이 대부분이라는 걸 잘 알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매장을 옮겨가며 옷을 쓸어 담은 규연은 제 카드를 시원스레 긁고 다녔다. 마지막 매장에서 계산을 마친 그는 뒤늦게서야 제정신을 되찾았다.
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 주고 있는 거지.
어느새 매장에서 벗어난 나루는 복도에 배치된 간이 소파에 앉아 사람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정작 제 옷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일어나, 이제 갈 거야.”
“벌써요?”
“옷도 다 샀고, 네 그 거지 같은 머리도 해결했고. 여기서 뭘 더 해야 하는데.”
“밥 먹고 싶어요.”
배를 움켜쥔 나루가 불쌍한 눈으로 규연을 응시했다. 옷 살 땐 나 몰라라 하더니, 밥 문제에서는 정신이 말똥말똥한 게 웃겼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루가 배고플 만도 했다. 규연은 간단히 이 안에서 해결하자며 12층에 있는 퓨전 이탈리아 식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람이 붐빌 시간이 아니라 식당 안이 적당히 조용했다. 고소하고 짭짤한 피자 냄새에 영혼을 빼앗긴 나루는 안내해주는 직원의 뒤를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갔다.
“그럼 주문하실 때 불러주세요.”
“네엡.”
메뉴판을 건넨 직원이 자리를 떴다. 규연 대신 대답한 나루는 곧장 메뉴판을 펼치고 음식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거 적당히 골라.”
“어, 으음…….”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양식을 파는 곳이라 그런지 메뉴판이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다. 나루는 영어를 읽을 수 있었지만,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곤란한 듯 메뉴판을 살펴보던 나루가 아무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메뉴를 확인한 규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루를 바라봤다.
“이걸 먹겠다고?”
“아, 그럼 이거……?”
“그건 더 매울 텐데.”
“아, 아아! 그럼 이거.”
나루가 고른 메뉴는 매운 고추가 들어간 토마토 파스타였다. 매운 걸 잘 먹지도 못하면서 그 메뉴를 콕 집은 게 이상했다. 하는 수 없이 메뉴판을 제 쪽으로 끌어온 규연이 적당한 음식을 골랐다.
홀을 돌아다니며 빈 컵에 물을 채우던 직원이 눈치 빠르게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나루는 눈만 깜빡거리며 규연이 주문하는 걸 듣고 있었다.
“볼로네제 스파게티 파스타 하나랑 링귀네 파스타 이렇게,”
“피자……!”
“…….”
“피자도.”
주문하던 중 급하게 끼어든 나루가 피자를 외쳤다. 아까부터 저 멀리 있는 화덕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피자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규연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마르게리타 피자까지 추가로 주문했다.
“다시 말해두겠는데, 이런 걸로 착각하지 마.”
“뭘요?”
“나 너 안 좋아한다고.”
그가 한껏 들떠 있는 나루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오해하기 전에 확실히 선을 그어 놓는 거였다. 맛있는 걸 먹을 생각에 들떠 있던 나루는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라고.”
반항심 가득한 말투였다. 머리도 예쁘게 하고, 옷도 사고, 맛있는 것까지 먹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는데 이런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규연이 미웠다.
그러고 보니 백화점에 잠시 정신이 팔려있어서 까먹고 있었다. 규연은 아침부터 제 마음을 대차게 까고 있었다. 기분 나쁘게.
“뭐? 너 방금 뭐라고 했냐.”
“…….”
“어디서 모르는 척이야. 송나루. 대답 안 해?”
“…….”
나루는 아무 말도 안 한 척 시치미를 뗐다. 규연은 혈압이 올라 이를 꽉 깨물었다. 이런 곳에서 화를 낼 수도 없고, 참 답답했다.
“주문하신 파스타와 피자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타이밍 좋게 음식이 나왔다. 나루는 테이블 위에 올라온 피자와 파스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규연과 감정싸움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두고 감정싸움이라니, 실례되는 짓이었다.
그러나 규연은 음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루의 팔을 붙잡은 그가 다소 거친 말투로 몰아붙였다.
“하, X발. 너를 진짜 어떻게 하면 좋지.”
“이거 놔, X발.”
“…….”
“씨…, 놔. 나 이거 먹을 거야.”
습관적으로 욕을 뱉은 규연이 나루의 대답에 넋을 놓아 버렸다. 남한테 함부로 대하면 다 자기한테 다 되돌아온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물론 나루는 먹는 걸 방해받아 기분 나쁘다는 걸 티 내기 위해 규연이 사용한 언어를 그대로 따라 한 것뿐, 그렇게까지 심한 욕이라는 건 몰랐다.
그냥 듣기에 좀 기분이 나빴고, 규연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 다른 사람들도 쉽게 쓰는 표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저 또라이 새끼.
나루를 멍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또라이 취급을 하던 규연이 잡은 손을 놔 줬다. 나루는 고개를 꾸벅 숙여 잘 먹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피자 한 조각을 집었다.
입 안 가득 피자를 욱여넣은 나루가 해맑게 웃었다. 이전에는 저 웃음이 순수해 보였는데, 오늘따라 출처 모를 광기가 느껴졌다.
규연은 조심스레 시선을 피했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저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