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30)


무방비했던 규연은 힘껏 덤벼드는 나루를 피할 수 없었다. 규연의 위로 작정하고 올라탄 나루는 목을 끌어안으려는 건지, 머리채를 낚아채려는 건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손을 마구 휘둘러댔다. 애를 쓰느라 잇새로 낑낑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지만,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야, 진정해 봐. 그만!”

규연이 아무리 소리쳐도 나루는 멈추지 않았다. 행동은 또 얼마나 빠른지, 규연이 잡으려고 하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이 쪼그만 게 권투라도 배웠나, 씹.

규연을 밀어붙이던 나루가 숨을 씩씩, 내뱉으며 어깨를 밀쳤다. 덕분에 규연의 몸이 장식장을 크게 건드렸다.

덜컹!

유리로 제작된 장식장에는 규연의 형이나 아버지가 선물한 고급 장식품과 접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장식장 위에는 규연이 아끼는 유리 조각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작은 충격에 올려놓았던 유리 조각품이 흔들거렸다. 나루는 아직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괘씸하게 구는 규연을 때리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불안한 느낌에 위를 올려다본 규연이 떨어져 내리기 직전인 조각품을 발견했다. 바닥도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떨어지는 순간 산산조각 나는 건데, 큰일이었다.

챙그랑!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한 조각품이 바닥에 떨어졌다. 규연은 파열음이 들리는 순간 나루를 멀리 밀쳐내 버렸다.

“규, 규연…….”

놀란 나루가 입을 틀어막고 손을 벌벌 떨었다. 바닥에는 투명한 유리 파편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규연은 그 사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손만 조금 베인 정도라 다른 곳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다친 건 다친 거였다. 찢긴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자, 규연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나루는 겁먹은 얼굴로 처참한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괘, 괜찮, 아니, 죄송해요…….”

“가까이 오지 마.”

“그, 그래도.”

“오지 말라면 좀 오지 마. 너까지 다치고 싶어서 그래?”

조심스레 일어난 규연이 유리 파편들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이제 할 일은 바닥을 치우고, 손을 치료하는 거였다. 나루는 미안한 마음에 다가가려다가 행동을 저지당했다.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정말 아니었는데.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던 나루가 잽싸게 부엌으로 들어가 고무장갑과 비닐봉지를 챙겨 나왔다. 이전에 조각상을 깨뜨린 적이 있어서 어떻게 치워야 할지 배웠었다. 지금은 규연이 손을 다쳤으니, 자신이 이 유리 파편들을 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놔, 내가 치우게.”

“안 돼요. 손, 손 다쳐서…….”

규연을 밀어낸 나루가 고무장갑을 끼고 유리 파편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하는 행동이 영 불안해서 비닐봉지를 빼앗으려던 규연은 나루의 완강한 태도에 그저 벽에 기대어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앙상한 몰골로 바닥에 엎어져서 유리 파편을 줍는 나루의 모습이 규연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제가 실수한 걸 치우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안쓰러운 건지.

지금 이 순간, 제가 아끼는 조각품이 산산조각 나 쓸어 담기는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규연은 나루의 몰골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머리카락은 눈을 살짝 가릴 만큼 자라서 지저분하고,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해서 꼴이 영 청결하지 못했다. 꼭 나루를 처음 만난 날 같았다.

무조건 나루를 피하려고만 했던 규연은 며칠 간의 쓰레기 생활을 그만두기로 했다. 저런 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사람답게 좀 만들어 놓아야 할 듯했다.

“여태 옷은 왜 안 갈아입고 있었던 거야.”

“작은 것까지 다 허락 맡으라고 했으니까요.”

“…….”

“왜요?”

…내가 죄인이다, 그래.

순수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은 규연이 고개를 떨궜다. 세상에서 저렇게 미련한 사람은 또 처음 본다. 요령껏 옷도 갈아입고, 씻고, 밥도 잘 챙겨 먹을 것이지. 진짜 주인한테 충성하는 개도 아니고,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는 게 다른 의미로 참 대단했다.

“그런데 좋아하지 말라고 한 건 싫은,”

“됐어, 그건 나중에 얘기해.”

말을 끊은 규연이 나루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뺏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나루는 어리둥절했다.

나중에 얘기하자니. 그럼, 좋아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보류되는 건가.

빗자루를 쓰는 척하며 규연의 옆을 얼씬거리던 나루가 눈치를 봤다. 손을 직접 치료해 주고 싶었는데 홀로 소파에 앉아 치료하는 모습을 보니, 돕겠다고 거들면 또 버럭 화를 낼 것 같았다.

“왜 자꾸 눈치를 봐.”

“다치게 한 게 미안해서…….”

“내 눈치 볼 시간에 가서 거울이나 봐.”

“왜요?”

“꼴이 엉망이잖아.”

무심하게 반창고를 감던 규연이 턱짓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나루는 빗자루를 놓고 달려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으음, 확실히 전보다 꼬질꼬질해졌네.

민망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던 나루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옷이야 갈아입으면 그만이었지만,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규연은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고, 나루에게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했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해도 행색이 깔끔해지는 건 아니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어깨나 팔 부분이 흘러내려서 단정치 못해 보였다.

규연의 옷 중에 가장 작은 옷을 골라 입고 나온 나루는 덜렁거리는 팔 부분을 야무지게 접어 올렸다. 그래놓고 규연을 향해 칭찬을 바라는 눈빛을 쏘아댔다.

규연은 백화점이라도 데리고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이런 행동을 해도 되는 건지 걱정됐지만, 저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 어디 나가요? 어, 언제 들어와요?”

“…….”

말없이 일어서자, 나루가 규연의 팔을 억세게 잡아챘다. 이 커다란 집에 또 혼자 남겨질까 무서워 황급히 붙잡은 것이었다. 나루의 간절한 눈망울에 마음이 약해진 규연이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너도 따라 나와.”

규연의 말 한마디에 나루의 낯이 환하게 물들었다. 어디까지 안쓰러울 수 있는 것인가. 규연은 애써 시선을 피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어 내리던 나루가 규연을 놓칠세라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밖에 나갈 수 있게 돼서 마냥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며칠 내내 냉담하게 굴던 규연이 옆에 있어 줘서 더 감격스러웠다.

조수석에 나루를 태운 규연은 목적지를 백화점으로 정하고 핸들을 틀었다. 옆자리를 힐끔거린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에 찬 나루의 얼굴이 너무나도 해맑아서, 마음이 왠지 모르게 무거워졌다.

* * *

백화점까지는 2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규연은 일부러 YK가 아닌 경쟁사의 백화점을 골랐다. 둘째 형이 도맡아 운영하는 백화점에 간다면 소문이 퍼져 집으로 불려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루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압도적인 크기의 건물을 올려다보고 놀라는 중이었다. 이렇게 큰 건물에는 처음 들어가 보는 거였다. 아직 입구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설레어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규연은 나루를 데리고 들어와 1층을 가로질러 걸었다. 조명이 유독 환하게 켜진 1층에는 해외 유명 브랜드들과 화장품매장이 쭉 늘어져 있었다. 규연이 자주 방문하는 샵은 12층에 자리해 있었다.

“저건 뭐예요? 보석?”

“향수.”

“아, 규연이가 항상 뿌리는 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나루가 진열대에 놓인 유리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2층에서는 유명 향수 브랜드와 액세서리, 패션 소품들을 주로 판매했는데 나루의 눈에는 향수가 값비싼 보석 같아 보였나 보다.

특히 에메랄드 빛깔의 각진 병은 모양새도 보석과 비슷해서 반짝반짝하니 예뻤다. 규연의 드레스룸에는 주로 푸른 계열이나 검은 계열의 향수들만 줄줄이 늘어져 있는데, 이곳에는 형형색색의 향수들이 많아서 나루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에스컬레이터가 올라가며 향수들이 모습을 감추자, 나루는 상체를 아래로 쭉 내밀어 2층을 구경했다. 철없는 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맞은편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던 사람들이 나루를 이상하게 쳐다보자, 규연이 얼굴을 가리고 나루의 어깨를 잡아 뒤로 끌었다.

“얌전히 서 있어.”

“저거 더 보고 싶은데…….”

“머리부터 어떻게 하고 돌아다녀야 할 거 아니야.”

자꾸 다른 곳으로 새려는 나루를 단단히 붙잡은 그가 3층에서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대충 구경시킬 겸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한 건데, 이대로라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게 뻔했다.

클래식한 정장 브랜드가 늘어선 3층은 나루의 시선을 확 이끌지 못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름 얌전히 규연의 뒤를 따르던 나루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주변을 신기하다는 듯 만져 보았다.

“엘리베이터가 금색이야.”

“…….”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엘리베이터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루가 한쪽 벽을 콩콩, 치기 시작했다.

쿠쿵! 쿵!

그 소리에 앞만 바라보고 있던 규연이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나루는 제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벽 두드리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게 진짜.”

“아, 왜!”

“지금 나한테 짜증 부렸냐?”

“아니요……?”

한참 재미있는데 방해받은 나루가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황당하다 못해 넋을 놓은 얼굴로 나루를 쳐다보던 규연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친 나루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누가 타기라도 했어 봐. 하아…….”

깊은 한숨을 터뜨린 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했다.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자 나루가 힘차게 발을 딛었다. 규연은 그런 나루를 붙잡느라 바빴다.

“너 혼자 튀어가지 마.”

“넵.”

“야, 내 눈 봐.”

“넵.”

“아니, 내 눈 보고 대답하라고.”

12층은 확실히 고풍스러운 아래층보다 더 활발한 느낌이었다. 전문식당가와 휴게시설이 합쳐져 있어서 사람들이 유독 많기도 했다. 나루는 눈을 반짝이며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였다.

규연이 뒷덜미를 붙잡고 경고까지 했건만, 나루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입은 착실하게 대답하는데 전혀 들어먹지 않고 있는 듯했다.

반쯤 포기한 규연은 나루를 가만히 두는 대신 손을 꽉 붙잡았다. 되도록 여지 주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큼지막한 손이 제 손을 감싸오자 놀란 나루가 눈을 깜빡였다. 미지근한 온기가 손으로 전달되는 게 느낌이 영 나쁘지 않았다. 규연은 여전히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착각하지 마. 네가 멋대로 튀어 나갈까 봐 잡는 거니까.”

“…….”

까칠한 말투에도 나루는 웃음기를 지워내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규연과 손을 잡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샵 앞에 도착하자 깨끗하게 닦인 자동문이 조용히 열렸다. 다행히 샵 안은 사람이 많이 없어서 한산해 보였다.

마침 카운터에 있던 헤어 실장이 살갑게 웃으며 규연을 맞이했다. 인위적인 웃음이었으나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다른 곳보다 더 친절해 보였다.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방문해 주셨네요. 상담부터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간단하게 커트만 할 거라서요.”

방금까지 헤실거리던 나루가 샵 안을 둘러보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시선 끝에 한 헤어 디자이너가 걸려 있었다.

서슬 퍼런 가위를 손에 끼우고 고객의 머리카락을 빠르게 손질하고 있는 모습은 나루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엄지를 움직일 때마다 날 끝이 교차하며 퍼렇게 빛나는 게 섬뜩했다.

규연이 도망치려는 나루를 강제로 잡아끌자, 나루가 입구에 서서 버티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래. 창피하게 하지 말고 빨리 들어와.”

“저거 싫어, 안 해. 안 할래.”

예상치도 못했던 나루의 행동에 규연의 멘탈이 제대로 터져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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